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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린 Jul 27. 2020

한국에서 멀어졌더니 생긴 변화

탈조선 2년 차, 솔직한 후기

 어쩌다 보니 한국에서 떨어져 산지 1년 3개월. 지난해 2월쯤만 해도 싱가포르라는 나라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없었는데 1년 넘게 살다 보니 여기만큼 좋은 곳이 없더라.


싱가포르라는 나라가 살기 좋은 것도 있지만 한국에서 멀어짐으로써 오는 긍정적인 변화가 많았다는 게 더 솔직할 것 같다. 해외생활에 대한 환상을 오롯이 극대화시켜줄 수 있는 지극히 주관적인 장점들을 몇 가지만 정리해 보려고 한다.



1. 화가 1/2로 줄었다.


 바쁜 출근길, 서울 지하철에선 부딪히는 순간 너도나도 한다는 말이 '아이고!'가 다였다. 하지만 여기선 잠시 앞을 지나갈 때, 살짝 부딪혔을 때, 어떤 부탁을 할 때면 일단 'Sorry'부터 말하고 본다. 싱가포르에선 누구에게나 'Sorry'라는 말을 먼저 하는 게 굉장히 자연스러워서 나도 이 습관을 먼저 배웠다. 그만큼 서로 조심스럽고 예의를 최대한 지키기 때문에 화날 일이 없다.


겉으로 표현은 안 했지만 한국에선 늘 화를 품고 살았던 것 같다. 출근할 땐 붐비는 지하철에서, 퇴근하면 요란한 SNS를 보며 불만이 가득했다. 지극히 단순하고 눈치 없는 성격인데도 날이 서있던 걸 보면 그 화를 어떻게 감당했나 싶다. 여기선 다양한 인종이 서로 배려하고 조심하면서 생긴 분위기가 사람의 성질을 다소 부드럽게 만드는 것 같다.




2. 지하철 스트레스 '0'


 일도, 직장도, 동료도, 심지어는 왕복 3시간 출근 거리도 다 좋았다. 딱 한 가지, 지하철 타는 일만 빼면. 나는 4호선 끝 - 디지털미디어시티역(공항철도)까지 1시간 반이 걸려 늘 회사를 다녔는데, 하루 웬만한 스트레스는 거의 대중교통에서 발생했다. 사람은 많고 앉을자리는 없는 데다 기다리자니 다음 열차는 한참 뒤에 온단다.


나름 선진국인 한국에서도 아직 지하철 문제가 많은 걸 보며, 이건 어딜 가도 평생 겪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싱가포르 지하철은 무인 운행인 데다 열차 고장은 1년 3개월 살면서 딱 한 번 경험했다. 열차 간격은 2~3분이라 조금만 기다리면 다음 열차가 금방 온다. 이게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처음 알았다. 게다가 싱가포르는 도시가 작아서 모든 곳곳이 가깝다. 한 마디로 30분만 지하철을 타도 꽤 오래 탄 셈이다.


서울에선 최소 두 달에 1번 꼴로 열차 고장 문제나 파업 관련 기사를 썼던 것 같은데, 여긴 교통 관련 방송이 필요 없는 곳임에 분명하다.




3. 인간관계 + -


 좋은 관계는 강해지고, 약한 관계는 자연스럽게 정리된다.


매일 보던 가족들도 해외에선 또 보고 싶고 소중해진다. 생각해보니 한국에 있을 때 엄마가, 아빠가, 내 친구들이, 동료들이 나에게 참 소중한 존재였다는 걸 다시 돌이켜볼 수 있게 된다. 거리가 멀어도, 거리가 멀어서, 오히려 안부를 더 묻는 친구들이 눈에 보이고 또 그러다 싱가포르로 놀러 오는 지인들도 생긴다. 설령 내가 한국에 가도 '오랜만에 오는 거니까 꼭 보자.'라며 평소 안 나오던 친구들도 모임에 고맙게도 나와준다.


반대로 멀다는 핑계로 사이가 소원해지는 지인들도 많지는 않지만 더러 있다. 같이 이야기만 하면 뻣뻣해지던 지인들을 슬쩍 놓으면서 마음이 편-안 해지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모든 인연이 소중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다 챙길 필요는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4. 구멍 없는 화장실


 이건 약간 특정 성별, 상황에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내게 너무 중요한 문제였다. 공중 화장실 변기 앞 문에 구멍(몰래카메라)이 없다.


물론 성범죄율이 0%는 아니겠지만 한국에서 느꼈던 내 불안함에 비하면 여긴 꽤 안전한 편이다. 끈나시 원피스를 입고 여성들이 출근하며, 짧은 바지를 입고 계단 오를 때 가방으로 가리지 않아도 되고 공중 화장실을 갈 때 '분명히 어디선가 찍히겠지?'라는 걱정을 덜어도 된다.


자유롭게,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고 돌아다녀도 안전하단 사실이 감사하게 느껴진다.




5. 밉던 서울이 다시 좋아진다


 인간관계도 멀어지면 추억이 미화되어 다시 보고 싶어 지듯이, 살기 참 힘들었던 서울도 무척이나 가고 싶어 진다. 서울의 고즈넉한 골목들과 트렌디한 식당들, 그리고 바쁜 서울 사람들도 다 그리워진다. 어쩌면 지금처럼 거리가 조금은 있어야 살던 곳의 좋은 모습을 곱씹어 볼 수 있는 걸까. 한국에서 멀어져서 아쉽지만 또 그래서 좋다. 그리고 당분간은 이 간격을 유지하고 싶다.



*사진출처_Surfea_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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