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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바람 Apr 21. 2023

좋은 동네의 기준

오늘의 마음 (12)

어떤 계절이 다가올 때마다 ‘기다리는’ 특별한 순간들이 있다. 뜨거운 한낮의 기세가 한풀 꺾여 공기가 적당히 부드러워지는 여름의 때. 밝음과 어둠의 중간 어디쯤 있는 듯한 어스름 해질 무렵의 여름 저녁. 가만 앉아 그 저녁을 즐기던 순간을 나는 좋아한다. 가을에는 완전히 해가 진 후 느슨한 바람이 부는 밤. 그 밤에 낙엽이 날리는 길을 걷는 순간을 기다린다. 그리고 봄. 봄은 좋아하는 순간이 꽤 많지만, 그중에서도 손꼽아 기다리게 되는 순간은 바람에 실려 오는 향. 예상치 못 한 순간에 슬며시 다가오는 아카시야 향이 나는 그 순간을 나는 기다린다. 코끝으로 아카시아 향이 느껴질 때면 피곤도 걱정도 잠시 동안은 잊힌다. 그 순간 충분히 설레고, 설렘으로 충만해진다.

      

매일 출퇴근을 하던 시절,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느껴지던 아카시아 향이 기억난다. 그리고 오랜만에 집에 내려가던 길, 달리는 버스 창 너머로 5월의 향이 전해져 오던 순간의 분위기와 풍경을 또렷이 기억한다. 남편과 동네 산책을 하다가 부드럽게 다가온 아카시아 향을 맡고는 ‘이 동네 역시 맘에 들어’라고 생각하던 순간도 해마다 같은 시기가 찾아올 때면 일렁일렁 다가온다.      


나는 지극히도 현실 감각이 없는 편이며, 집의 형태가 어찌 됐든 남들이 말하는 좋은 동네의 기준이 뭐든 그런 건 크게 관심이 없다. 내가 기준으로 삼은 좋은 동네는, 살기 좋은 동네의 가장 큰 조건은 ‘아카시아향’이다. 쓰면서도 이건 좀 어이없는 기준인가, 남들이 들으면 풉-하고 웃음이 새어 나올 이야기인가 싶기도 하지만, 나는 아카시아 향이 느껴지던 내가 살던 동네들이 참 좋았다. 대학에 오기 전까지 줄곧 살았던 작은 마을에는 곳곳에서 아카시아 향이 느껴졌었고, 대학교가 있던 동네에도 5월이면 아카시아향이 마음을 간지럽혔다. 결혼하기 전까지 살던 동네 역시도 늦은 밤 퇴근하던 나에게 어김없이 부드러운 그 향을 전해줬다.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매번 찾지 못했지만 늘 바람에 실려 오던 은은한 향기로 아카시아꽃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지금 사는 동네에서는 두 번째 봄을 맞는다. 지난해에는 다소 정신없이 보내느라 몰랐던 아카시아향. 올해는 어떨까.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모든 동네에서 익숙하게 느껴왔던 5월의 그 향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여긴 고층의 아파들이 즐비하고 집 앞으로는 또 다른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는 어쩌면 건물들의 동네인지도 모르는데... 바람결에라도 내가 사랑하는 그 향기가 전해져 올까. 그래서 지금 살고 있는 이 동네도 나에게 좋은 동네가 될 수 있을까.      


살짝 창을 한 번 열어본다. 얼굴을 한껏 찡그리며 코를 킁킁거려 보는데 그리운 그 향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봄이 짙어지며 나날이 부드러워지는 바람 내음에, 멀찌감치 들려오는 공사소음에, 간혹 섞여오는 아이들의 소리에, 아파트 산책로에 심긴 크고 작은 초록 나무들의 옅은 향 정도만 바삐 다가온다. 고층 건물들 너머 짙은 산이 보이는데, 그 산자락에는 아카시아 꽃이 피어나지 않을까. 어느 날 한 번은 부드럽고 평온한 그 향기가 스치듯 나를 지나가지 않을까. 그렇게 나의 봄날도 흘러가지 않을까. 다시 한 번 그 순간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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