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생각하면 전생의 일처럼 아득해지는 요즘, 오래전 기억을 꺼내봅니다. 스물둘의 저는 친구와 함께 배낭을 메고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그때를 저는 친구와 함께 참 많이 걷고, 참 많이 웃었습니다. 여행의 첫날, 런던의 중요한 관광지를 버스 한 번 타지 않고 모두 걸어서 구경했지요. 돈은 없었고, 시간과 체력은 그보다 많았으니 그랬겠지만, 그때는 그렇게 많이 걸은지도 모르고 걸었습니다. 목적지가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아도 그저 까르르 웃었고, 가다가 목적지가 아닌 다른 곳을 갑자기 들르게 되어도 어떠한 조급함도 없었습니다.
그때 보았던 멋진 성당들의 이름과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보았던 작품들은 사실 대부분 잊어버렸습니다. 우리가 갔던 도시의 이름도 몇 군데는 가물가물합니다. 다만 지금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그때 우리는 스물둘이었고, 길을 몰라 오래 걸어도 다리가 아프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습니다. 로텐부르크에서의 당일치기 여행을 끝내고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야 했지요. 그러다 역의 이름을 착각하여 잘못 내리고 말았는데, 우리는 서로에게 짜증 한 번 내지 않았습니다. 조금씩 태양빛이 약해지던 여름날의 초저녁에, 알 수 없는 도시의 외딴 기차역 플랫폼에 주저앉아 다음 기차를 기다리는 그 시간마저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기차가 언제 올지 모르는데도 말입니다. 저는 가끔 생각합니다.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르고, 기다려도 지칠 줄 모르고, 몰라도 두려워할 줄 몰랐던 그 시간이, 제 안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다고요.
여행이 삶에 주는 선물은 그런 순간인 듯합니다.
일상을 떠나 낯선 곳에서, 오로지 나의 감각에만 충실하며 눈앞의 닥친 일들을 해결해 내는 그 순간들.
과거에 대한 후회도,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그저 현재의 나로서 충만한 기분.
그 순간과 기분이 내 안 어딘가에 남아서,
일상 속에서 어떤 순간들이 오더라도,
그러니까 힘들고, 지치고, 두렵고, 모르는 순간이 오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기차가 오고, 언제고 목적지에 다다르며,
그 목적지가 다시 출발지가 되어 떠나더라도,
내가 도달할 또 다른 목적지가 있을 것임을 고요히 속삭여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여행은 어쩌면 반드시 배낭을 메고 어디론가 떠나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겠지요. 지금 제게는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순간이 마치 여행 같습니다. 나의 생각과 감각에 충실하여 글을 쓰는 소중한 순간. 내 손을 떠나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지도 모르는 이 글을 마치고 나면, 저는 또 다른 글을 쓰려고 애쓸 것이고 때로 그게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또 언젠가는 술술 글이 써지는 하루도 있을 테니까요. 중요한 것은 여행이든 글쓰기든, 제게 삶을 살아갈 어떤 종류의 힘을 준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삶에는 어떤 여행의 순간이 있나요.
주말 저녁 가족과의 단란한 저녁 식사,
퇴근 후 친구와의 맥주 한 잔,
재미있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잠드는 밤.
어떤 것이든, 당신도 모르게 당신의 마음에 스며들어 당신의 순간들을 지켜 줄 그런 여행이 부디 허락되길,
감히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