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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Jan 10. 2021

도와줘 - 2020년 가장 잘한 말 (1)

싱가포르의 정신 건강 의학과 방문기

잠깐 멈추면 안 될까?  


2021년이 오고 한 살이 더 먹는 건 아쉽지만, 한 편으로는 후련하기도 했습니다. 작년은 20대에서 가장 힘들었던 해였거든요. 그래서 팬데믹으로 혼란한 시국에도, 올해가 끝나면 좀 쉬워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조금은 설레었습니다.


‘고꾸라졌다’는 기분이 들어본 적 있나요? 작년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저는 이 말을 꼽고 싶습니다. 평생 원하던 해외 취업에 성공해서 학생이 아닌 외국인 노동자로 보냈습니다. 한국 고객이 아닌 아시아 태평양 국가의 고객들을 상대하면서요. 6개도 넘는 문화권에서 온 동료들과 함께 일했고, 낯선 땅에서 3개월 간의 락다운을 겪어냈습니다. 물론 잠깐이나마 좋은 시간도 있었습니다. 건조한 일상 속에서 설렘을 주는 사람을 만났고, 난생처음으로 술을 마시고 고백도 해봤어요. 


하지만 설렘으로 버티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봉쇄된 국경이 열리기만 기다리면서, 매일 밤 툭하면 울었습니다. 무력감과 목적의식 상실에 젖어있었어요. 하루 종일 방에 오도카니 있으면 심장이 조여드는 것 같았고, 소화가 어려워 죽을 끓였습니다.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일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일에만 집중하다보니 일을 주도하는 게 아니라 일에 끌려가는 기분이었어요. 잠깐 멈추는 시간이 절실했습니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친구와 가족이 있는 땅에서, 잠시 일에서 멀어질 시간이요. 이미 재택근무를 하고 있으니 잠시 한국에 다녀올 방법이 있을지 알아봤지만, 회사는 고용 국가 외의 장소에서 일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주위 동료들에게도 조언을 구했으나, 그럴 거면 한국 지사로 가는 게 어때? 네 보스가 너 일하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것 같아." 라며 웬만하면 참아보라고 만류했습니다. 보스에게 말을 꺼내는 것이 정말 두려워졌어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상담사를 찾았습니다.




공감받을 수 없는 상담소      


"한국에서 네가 마음이 가장 편했던 순간이 언제야? 지금 이 순간, 네가 꼭 가고 싶은 장소가 있니? 자. 그럼 네 마음속으로 지금 동해바다에 있다고 상상해보자. 파도 소리와, 바다 내음, 얼굴을 스치는 바람까지 생생하게 그려보는 거야. 회사에서 허락해주는 방법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도 대비해야 해. 나는 너에게 지금 버틸 수 있는 힘을 주고 싶어"


이 말을 듣고 저는 너무 화가 났어요. 회사에 어떤 식으로 소통을 해야 할지 조언을 얻고 싶고 지금의 힘듦을 공감받고 싶었는데, 버틸 방법을 알려주는 게 야속했거든요.  나는 지금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은데, 숨을 참고도 잠시 버틸 수 있는 법을 가르쳐주는 느낌이랄까요. 이전 상담 때 약속시간보다 일찍 상담을 종료하고, 선을 긋는 듯한 상담사의 모습에 마음이 닫힌 걸지도 모르지만요 (몇 달이 지난 지금은 상담사의 의도도 십분 이해가 가지만, 제게는 그리 도움되지 않았어요). 그 날 이후 심리 상담사에게는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정신과 상담을 잡았어요.


의사 선생님과의 만남 - 번아웃을 생리적으로 이해하기       


"들어오세요."


진료실은 아늑했습니다. 진료실이라기보다 상담실에 가까워 보였어요. 50대로 보이는 중년의 의사 선생님은 190에 가까울 정도로 키가 크셨어요. 혈색이 좋고 건강해 보였고요. 이야기를 나눈 지 5분 정도 흘렀을까, '선생님은 일을 잘하고 이 일에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인 것 같아. 나도 그렇게 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이라면 내 이야기를 털어놓아도 될 것 같았어요. 정신과든 상담이든 항상 첫 질문은 같았습니다


"어떤 일로 오신 건가요?"


대기 시간 동안 적어놓은 메모로 눈을 돌렸습니다. 간호사에게 종이를 빌려하고 싶은 말들을 휘갈겨 놓은 메모였습니다. 어렵게 잡은 상담이니, 빠짐없이 얘기해야 할 것 같았거든요.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하는 데 5분도 지나기 전에 눈 앞이 뿌옇게 되더니 굵은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굳이 메모지를 보지 않아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제가 코로나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지금 마음이 어떤지 얘기하는 동안, 의사 선생님은 가만히 들어주었어요.


"지금 OO 님이 힘든 것은 당연해요. 혼자 살고 있잖아요. 일 년 가까이 재택근무를 하고, 국경이 봉쇄되면서 사회적으로도 단절된 상황이고요.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외로움과 고립감이 깊어진 거예요. 상황과 별개로, OO 가 힘든 데에는 성격도 큰 영향을 미쳐요. 완벽주의적이고, 실패를 두려워하는 성향이 계속 스스로를 자극해서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거예요. 그런 자극을 받을 때마다 신체적으로 너무 활발히 반응이 이루어지고 있어요. OO의 신경이 과민해지니, 코르티솔이 많이 분비되어서 신경계가 활성화되어 있는 상태예요. 위로 영향을 미쳐서 소화를 못 시키기도 하고, 뇌를 긴장시켜 잠을 못 자기도 하는 거고요."


의사 선생님의 말 중에서 유독 완벽주의라는 단어에서 마음이 계속 맴돌았어요.

 

"싱가포르에 온 이후로, 저를 많이 바꿔보려고 했어요. 새로운 문화와 일에 적응해야 하고, 잘하고 싶었으니까요. 근데 그게 너무 힘들고, 저는 제 자신을 어디까지 바꿔야 할지 모르겠어요. 일에서는 기대치를 많이 내려놓았어요. 아니면 죽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제 삶에서 갖고 싶었던 것들을 놓기가 어려워요. 4년 간 해외 취업을 준비하면서 제가 그려왔던 이상향을 내려놓는 게 쉽지 않아요. 무엇은 포기해도 되고, 무엇은 놓아선 안되는 지 모르겠어요."


선생님이 답했어요.


"OO는 삶 전반에서 완벽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어요. 잘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잘하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지 않아도 돼요. 다만 완벽이라는 건 애초에 환상 같은 거여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기억해요.  OO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어떤 상태에 도달하는 데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요. 주위에서 주는 피드백을 듣기보다, 내가 만족이 안되면 조금 더 가야 돼, 라는 생각을 하는 거죠. I am good enough (이 정도면 괜찮아)라고 계속 스스로에게 말해주는 거예요. 스스로와 하는 대화법, 기존의 언어를 바꾸는 작업이라고 보면 될 거예요."


마음을 지키는 지침


"자, 이제 꼭 지켜야 할 것들을 알려줄 거예요.

첫째로, 물을 1.5L 이상 마시고, 운동을 계속해야 해요.  몸이 스트레스 상황에서 화학 물질과 독소를 내보낼 때, 물을 많이 마심으로써 신장을 씻어주는 효과가 있어요.

둘째로, 지금 힘들다고 성급한 결정을 내리면 안돼요.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어요.  잠시만 멈추고 냉철하게 생각해봐요. 사내에 비슷한 사례가 있는지 알아보고, 냉철하게 회사를 설득해야 해요.

셋째로, 지지 체계를 구축해야 해요. 지금 OO 가 이렇게 힘들었던 것은 지지체계가 싱가포르에 없었기 때문도 있어요. 가족, 친구들, 동료들에게 도움을 계속 청해야 해요. 보스도 마찬가지예요. 어쩌면 상대방이 당신이 도움을 청하기를 기다릴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용기를 내야 해요."






올해 가장 잘한 일 - 도움을 청하는 것


병원비 수납을 마치고 병원을 빠져나왔습니다. 점심을 걸렀는데, 그제야 허기가 느껴졌어요. 어제까지만 해도 음식을 먹는 게 노동처럼 느껴졌는데, 눈 앞에 아이스크림 가게의 아이스크림이 맛있어 보였어요. 카야잼을 발라 갓 구워낸 토스트가 당겼고요. 궁지에 몰렸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턱이 높아 보였던 정신과였지만, 용기를 내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30분 남짓의 짧은 상담이었지만,  이 상황이 제 몸에 생리적으로 미치는 영향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말하는 태도만 보고 완벽주의자라는 걸 5분 만에 간파해내신 능력있는 선생님 덕에,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P.S. 싱가포르에 워킹비자로 온 외국인들은 의료 보험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병원에서 청구하는 초기 비용을 내야 해요. 이전에 다른 과의 진료를 받았을 때, 30분 상담에 25-35만 원 정도를 청구받은 경험이 있어서 비용이 부담스러웠습니다.  더욱이 회사에 청구할 수 있는 의료비 한도가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던 차였거든요. 상담 센터에서 소개받은 병원이었는데,  이런 사정을 얘기하자 상담이 끝나고 선생님에게 할인을 해줄 수 있는지 물어보라고 귀띔 했습니다. 외국인은 보험 지원이 없다 보니 특별한 사정이 있거나 비용 부담의 어려움이 있으면 간혹 병원에서 할인을 해주기도 한다네요. 그리고 약 30프로를 할인받았습니다. 수가가 정해진 한국과 달리 이런 유동성도 발휘될 수 있는 것 같아서 인상적이었어요. 저와 비슷한 경우라면, 할인 여부도 확인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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