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에서 <피로사회>로
'윤리적 자아가 형성되어야 주체성이 세워진다.' 행복의 출발은 바로 여기다. 내가 왜 이 땅에 살고 있는지 깨닫는 것. 그것은 내가 윤리적 책임 의식을 갖게 되는 대상이 생길 때에 가능하다. 악랄한 시대에 살면서 고통받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손 내밀 때, 그러니까 우리가 윌을 안아주며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숀이 될 때에,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특별히 시대가 주는 아픔으로 깊은 좌절을 느낀 사람일수록 시대를 구원할 에너지가 그 안에 흐른다. ‘상처받은 치유자’라고 하지 않던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우발성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타인을 나에게 환원하지 않고 나 또한 타인에게 동일시하지 않는 것, 타인과의 관계에서 상호 호혜를 넘어 고통받는 이웃의 고통을 짊어지고자 하는 책임을 인정하는 것까지 모두 행복을 찾기 위한 요소들이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커뮤니티 안에서 실현 가능하다. 자기계발이 완전히 폐기되어야 할 것은 아니다. 커뮤니티 안에서, 커뮤니티와 함께 성장하는 개인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계발의 방향이다. 커뮤니티가 개인을 돕고, 개인이 그 커뮤니티를, 더 정확히 말해 커뮤니티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 타인을 돕는다. 이것을 앞으로 꼬뮌헬프라고 부르자. 셀프헬프가 아닌 꼬뮌헬프.
<피로사회>와 꼬뮌헬프
<피로사회>는 독일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한병철 박사가 쓴 짧은 철학 에세이다. 이 짧은 책이 독일에서 출간된 지 2주 만에 2쇄를 찍었고 한국에서도 5만 부를 훌쩍 넘었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기야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한국에서는 100만 부를 넘었으니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공감대가 점점 넓게 퍼지고 있는 것 같다. <피로사회>에 대한 비판, 저자 한병철 박사에 대한 논란도 있지만 논평은 뒤로 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살펴보려 한다.
<피로사회>를 읽으며 즐거웠던 것은 근대사회의 프레임을 비판하면서 한나 아렌트, 푸코, 프로이트 등 엄청난 대가들을 거침없이 비판한다는 것이다. 비판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생각으로는 현대 사회를 진단할 수 없다'는 프레임 전환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또 하나 놀랐던 것은 '피로사회'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방식이다. 서점에서 처음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 '피로사회'라는 제목이 당연히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표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책을 읽다 보니 '피로사회'는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야 할 새로운 사회의 모습이었다. 어느 누가 예상이라도 했을까? '피로사회'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라는 것을.
한병쳘 박사는 이 짧은 에세이에서 현대인이 느끼는 피로감의 원천을 밝혀낸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과잉 긍정'이다. (18페이지) 그 말의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 근대 사회를 먼저 조명한다. 근대사회 인간은 통제와 감시 등 외부로부터 오는 폭력으로 인해 주체성을 위협받았다. 미셀 푸코는 이를 '규율 사회'라 규정한다.(23페이지) '규율 사회'에서 인간은 폭력적 통제로 인해 복종적인 주체가 될 것을 강요받는다. 주로 '하면 안 되는 것들'이 제시되고 인간은 그러한 폭력적인 통제를 받아들임으로써 그나마 편하게 살 것인지 아니면 자유로운 고통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하게 된다.
그런데 근대를 지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하면 안 되는 것'에 대한 리스트가 완전히 해체된다. '하면 안 되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 무한한 가능성은 얼핏 보면 자유로움의 근거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엔 끝없이 펼쳐지는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명분에 갇혀 스스로의 한계를 지속적으로 갱신해야 하는 '자기 착취'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다. 과거의 피로는 외부의 폭력 때문이었다면 현재의 피로는 외부의 폭력 때문이 아니라 '자기 착취' 때문이다. 한병철 박사는 이러한 현상을 '자기 자신과의 전쟁'이라고 부른다. (28페이지)
그 결과는 무엇인가?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가 처한 상황, 끝없는 달음박질이다. 결국 남는 것은 피로와 우울증이다. 왜 우울증이 오는 걸까?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끝없는 성취에 대한 욕구, 그에 따른 반복적인 좌절감은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만든다. 이 책을 읽으며 전율했던 것은 현대인에 대한 저자의 묘사가 앞서 말했던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운명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효용 극대화'를 목표로 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에게 만족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아무리 효용을 극대화해도 더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로사회>는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운명을 잘 보여주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긍정 과잉으로 피폐해진 인간사회를 회복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한다. 그 비전이 바로 '피로사회'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한병철 박사의 처방에서 우리들은 레비나스를 본다. 비록 한병철 박사는 레비나스를 전혀 언급하지 않지만 말이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 한병철 박사는 현대 사회의 피로감을 이렇게 설명한다.
"성과 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그것은 한트케가 <피로에 대한 시론>에서 "분열적인 피로"라고 부른 바 있는 그 피로다. "둘은 벌써 끝없이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각자 자기에게 고유한 피로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은 그러니까 우리의 피로가 아니었고, 이쪽에는 나의 피로가, 저쪽에는 너의 피로가 있는 꼴이었다." 이런 분열적인 피로는 인간을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는다. 오직 자아만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67페이지)
한트케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피로 자체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삶에서 피로는 불가피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긍정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과잉 긍정으로 인해 야기되는 피로'가 가져오는 결과다. 끝없는 긍정은 삶의 거의 모든 지평을 '자아 중심적 사고'에 가두고 결국 '나' 외에 다른 사람을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몰아낸다. 마지막에는 혼자 남게 되는 것이다. 외부의 폭력에 의한 소외가 아닌 스스로 초래한 소외, 그것은 거의 완벽한 소외다.
해결책은 무엇인가? 한병철 박사는 또다시 한트케를 인용한다.
"'줄어든 자아의 늘어남'으로서 피로는 자아의 조임 쇠를 느슨하게 함으로써 틈새를 열어준다. 나는 그저 남을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또한 남이고 "남이 동시에 나이기도 하다." 그 틈새는 "아무도 그 무엇도 '지배'하지 않고 '지배적'이지조차 않은" 친절한 공간, 무차별성의 공간이다. 자아가 줄어들면서 존재의 중력은 자아에서 세계로 옮겨간다. 자아 피로가 고독한 피로이고 세계가 없는, 세계를 없애버리는 피로라면, 한트케의 피로는 "세계를 신뢰하는 피로"이다. 그것은 자아를 "개방"하여 세계가 그 속에 새어 들어갈 수 있는 상태로 만든다. 그것은 고독한 피로 속에서 완전히 파괴된 "이원성"을 복구한다. 우리는 보고 또 보여진다. 우리는 만지고 또 만져진다. "접근을 허락하는 피로, 만져지고 또 스스로 만질 수 있는 상태를 실현하는 피로." 그런 피로를 통해 비로소 머물러 있는 것, 한 곳에서의 체류가 가능해진다. 자아가 줄어들고 이는 세계의 증대로 나타난다."
이 부분에서 나는 레비나스를 느낀다. 물론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인보다 한병철 박사(더 말해 한트케)의 타자는 훨씬 더 상호성을 띤다. 두 철학자가 같은 말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과잉 긍정으로 인해 발생하는 끝없는 자기계발의 굴레에 빠진 현대인에게 꺼낸 해결책을 보면 두 철학자 모두 사색을 깊이 하라거나, 느리게 살라거나, 고전을 읽으라는 등, 요즘 유행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사색과 느림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언급은 하지만 궁극적 해결 방법은 아니다. 레비나스도, 힌트케도 진정 쳇바퀴를 멈추고 싶다면 '타인'을 만나라고 충고한다. 한트케는 그것을 '우리-피로'라고 말한다. 타인을 만남으로서 얻게 되는 피로. 그 피로는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열쇠다.
한병철 박사가 제시하는 '피로사회'의 비전은 바로 이 '우리-피로'에 근거하고 있다. 어디서 우리-피로를 찾을 수 있을까? 다름 아닌 ‘커뮤니티’가 이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라 생각한다. 한트케의 문장을 다시 한번 읽어보자. "그런 피로를 통해 비로소 머물러 있는 것, 한 곳에서의 체류가 가능해진다." 커뮤니티를 통해 우리는 타인을 만나게 되고 그때야 비로소 사색하고, 느리게 살고,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