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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도현 Aug 09. 2018

자본주의식 행복론

다시 만난 스펜서 존슨

어느 날 광화문 교보문고에 별생각 없이 들어섰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행복'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다짜고짜 행복이라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행복을 찾아 헤매고 있기에 돈 되는 제목은 귀신보다 더 잘 아는 대형 서점이 입구에 행복이라고 써놨을까. 그 팻말 아래로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 유명한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를 쓴 스펜서 존슨의 신간 제목이 <행복>이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 제너럴 일렉트릭이라는 회사에서 운영하는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3개월 동안 많은 책을 읽게 했는데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는 필독서 목록 중 가장 위에 놓였던 책이다. 


사회생활 초년생들에게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를 읽히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니, 초년생뿐 아니라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너무나도 적절한 책이다. 항상 그 자리에 있던 치즈가 갑자기 사라진 현실 앞에서 누가 행복을 찾겠는가? 답은 너무 당연하다. 치즈가 왜 없어졌는지 불평하는 꼬마 사람들이 아닌 곧바로 치즈가 어디로 갔는지 찾아 나서는 생쥐들이다. 결국 생쥐들은 치즈를 찾았고 그들을 보며 회개(?)한 꼬마 사람들도 태도를 바꿔 마침내 치즈를 찾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 '그래 치즈가 없어졌다고 불평하지 말고 열심히 찾아 나서야지. 그래야 나도 발전하고 행복하게 되지'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참으로 자본이 좋아하는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개인도 행복하고 자본도 좋아하고 이것이야말로 일석이조, 일타쌍피다. 세계적 기업인 제너럴 일렉트릭이 갓 들어온 인턴에게 가장 먼저 읽히고 싶은 책이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인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 스펜서 존슨이 행복에 관해 썼으니 자본주의식 행복을 가장 잘 알려주지 않을까? 


목차를 보니 조금 의외다. '나의 행복, 다른 사람의 행복, 우리의 행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스펜서 존슨 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내용은 흥미로웠다.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 들었던 생각은 '그러면 그렇지. 스펜서 존스이 어디 가겠나.' 그는 역시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을 그려 놨다. 그게 딱히 비판받을 일은 아니다. 어째 건 우리는 자본주의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 


스펜서 존슨은 행복하기 위해 스스로를 돌보라고 조언한다. 구체적인 방법도 제시했다. 그 결과는 매우 신선하면서도 동시에 뻔하다. '스스로를 소중히 생각하고 구체적으로 실천하라.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들도 스스로를 소중히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 자신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이 옆 사람도 소중히 여긴다. 그러니까 옆 사람이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자연스럽게 나를 존중하게 된다. 옆에 있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곧 나의 행복을 위한 길이다.' 이것은 마치 정육점 주인, 양조업자, 제과점 주인이 이기적인 동기로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만 그것이 사회 전체에 유익을 가져다준다는 아담 스미스의 유명한 이론과 비슷하다.


이러한 행복론이 딱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스펜서 존슨의 주인공들이 살아가는 세상과 우리가 처한 현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도 그렇고 <행복>에 등장하는 프랭크 아저씨도 모두 시작할 때는 뭔가가 있던 사람들이다. 원래 치즈가 있었는데 사라졌다. <행복>에 나오는 프랭크 아저씨도 마찬가지다. 한때 불행했으나 스펜서 존슨 방법론을 통해 지금은 행복한 프랭크 아저씨의 직급은 '사장'이다. 그가 행복하지 않았을 때도 사장이었다. 그리고 예쁜 정원이 있는 집도 있었다. 결혼도 했다. 이미 물질적으로 풍요로웠지만 행복하지만 않았을 뿐이다. 스펜서 존슨이 호모 이코노미쿠스에게 말한다. 죽어라 자기계발하고 사다리 꼭대기에 오르면 많은 이들이 허탈하는데 그럴 필요 없다. '너는 이미 행복하다.'


스펜서 존슨이 말하는 행복은 '이미 존재했던 그러나 발견하지 못했던 행복'이다.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미처 성찰하지 못했던, 그래서 시각을 바꾸었더니 발견하게 되는 행복. 물론 그것도 필요한 이야기겠다. 그러나 대한민국 30대에게는 - 곧 30대가 될 20대, 여전히 30대의 고민을 벗어나지 못한 40대에게도 - 너무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우리에게는 애초에 치즈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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