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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마스 Jul 08. 2020

2주간의 기러기 생활(2)

일단 마음을 진정시키고 유나이티드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통화 폭주로 인해 상담원 연결까지 적어도 1시간이 넘게 걸린다는 안내 메시지가 나온다. 전화 연결은 일단 포기하고, 호텔이 공항이랑 붙어 있는 이점을 이용해 공항 카운터로 직접 가보기로 한다.


카운터에 가보니 내일 출발하는 유나이티드의 모든 항공편이 취소돼서 줄이 어마어마하게 길다. 그리고 이때부터 인내의 시간이 시작된다. 우리는 예약 변경 카운터 앞에 줄을 섬과 동시에, 고객센터에 전화해서 상담원과 연결을 시도했다. 하지만 아무리 서있어도 카운터 대기줄은 줄어들 생각을 안 하고, 고객센터 전화 연결음도 무한 루프를 돌고 있다.


티켓 예약이 아내 이름으로 되어 있어서 아내가 일단 한 손에 전화기를 든 채로, 카운터 앞에 계속 줄을 서있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아까부터 옆에서 지루해하는 토쥬군에게 저녁을 먹이기로 했다. 하지만, 천천히 저녁을 먹고 돌아왔음에도 줄은 아주 조금만 줄어든 상황이다. 이번에는 바통 터치를 해서 내가 줄을 서있고, 아내는 토쥬군을 데리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카운터에 직원 한 명이 추가되면서 줄이 줄어드는 속도가 조금 빨라졌으나 여전히 내 앞으로 꽤 많은 사람이 서있는 상태이다. (아... 유나이티드야... 진작에 좀 직원을 추가로 투입했어야지...) 처음 줄을 선 이후 대략 2시간 30분이 다 되어가는 순간, 드디어 전화 연결음이 끝나더니 상담원의 목소리가 들린다.


결국 예약을 1주일 뒤로 변경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통화를 끝낸 다음 유유히 줄에서 빠져나오는 내 모습을 주변 사람들이 모두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지금 돌이켜보면, 결국 1주일 뒤로 미룰 꺼였으면 그냥 느긋하게 호텔룸에 있었어도 됐을 것 같은데... 당시는 워낙 경황이 없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예약 변경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니 어느덧 창 밖에는 해가 졌다. 원래 계획으로는 맛있는 저녁을 먹으면서 여유롭게 호텔에서 쉴 생각이었으나, 오래 동안 줄을 서있으면서 에너지가 이미 다 방전되어 버렸다.


당초 계획과는 다르게 상황이 전개되었지만, 그래도 아내와 아들이랑 1주일 동안 더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한편으로는 위로 아닌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내일까지 호텔에서 푹 쉬다가 가자, 라는 생각도 들었다. 마침 수영복도 챙겨 왔겠다. 내일 체크아웃할 때까지 수영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다 같이 재미있게 노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장모님께 전화를 걸어 비행 편이 1주일 미뤄졌다고 알리는 아내와 그 옆에서 느긋하게 주스를 마시는 토쥬군


그리고 그날 밤.

아내와 아들은 먼저 잠이 들었는데 나는 통 잠이 안 온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창밖을 확인해보니, 조금씩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좀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 눈이면 뭐 별일 있겠어, 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뭔가 싸한 기분이 들어 아직 잠이 덜 깬 상태로 커튼 사이로 창밖을 본다.

맙소사... 앞이 안 보이는 폭설이 내리고 있다.


급히 스마트폰으로 일기예보를 검색하니, 눈폭풍 경보가 내려진 상태이다. 그리고 일부 도로는 벌써부터 통제되었다. 이러다간 수영이고 뭐고, 길이 막혀서 공항에 고립되어 집에도 못 가는 상황이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곤히 자고 있는 아내를 깨워 어떻게 할지 상의를 했다. 그 결과, 원래 늦게까지 호텔에서 놀려던 계획은 다 포기하고, 그냥 최대한 빨리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호텔에서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하고 아침 일찍 체크아웃을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이때 호텔룸에서 머물렀던 총시간 대비 숙박비를 계산해보면, 누워있다가 나도 모르게 이불 킥을 날리게 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가 집에 도착한 이후로, 눈발이 더 거세지더니 그날 하루 종일 눈이 펑펑 쏟아졌다. 전날 아침 스마트폰으로 일기예보를 검색한 그 시점부터 딱 24시간 동안, 뭔가가 한번 안 풀리려면 이렇게까지 꼬이기도 하는구나, 를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여기서 반전 하나,

집에 돌아온 뒤 검색해보니, 토요일 항공편은 전부다 결항되었는데, 정작 원래 타기로 되어 있었던 일요일 항공편은 계획대로 출발하는 것으로 나왔다. 그 순간, 괜히 토요일 항공편으로 예약을 변경해서 일을 꼬이게 만든 것 같아, 나 자신을 계속 자책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반전 하나

그 후 우연히 지인의 가족 한분이 일요일에 우리가 타려던 그 비행기를 실제로 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 스케줄 상으로는 정시 출발이라고 나왔지만, 실제로는 출발이 엄청나게 딜레이 되었다고 한다. 아내와 아이는 중간에 한번 환승을 해야 했었는데 환승시간은 딱 2시간이었다. 만약 비행기가 딜레이 되어 연결 편을 놓쳤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헬게이트의 오픈이었을 것이다. 환승 공항에서 아이를 데리고 아내 혼자서 대체 항공편 찾는다고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떠올려보니, 차라리 마음 편하게 1주일 후에 출발하는 항공편으로 변경한 게 훨씬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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