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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다렸던 퀴어 문학

김지연의 『마음에 없는 소리』를 읽고

by 고전파





우둔한 식견 하에서, 근 몇 년 간 한국 문단에서 퀴어 문학은 다소 과대평가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나쁜 문학을 좋은 문학으로 추켜세웠다는 게 아니라, 이미 좋은 문학을 훨씬 더 좋은 문학이라고 평가해 온 것 같다는 말이다. 문학은 시대를 반영한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서 페미니즘과 더불어 각광받은 퀴어의 이야기 역시 귀담아들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소설들이 받은 찬사와 격려는 퀴어 ‘문학’이라서가 아니라 ‘퀴어’ 문학이기 때문에 받았다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퀴어 문학에 대한 나의 관심은 식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당사자가 아니라 이성애자라서 그랬을 수도 있다. 젊은 한국 소설가들의 책을 읽는 일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아마 계속 그랬을 것이다. 김지연 작가의 『마음에 없는 소리』를 읽고 나서 이게 내가 바라던 퀴어 문학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김지연의 소설 속 인물들은 대체로 희망차다. 그러나 명랑 소설 속 주인공들이 갖는 희망은 아니다. 김지연의 소설 속 인물들은 인생이란 괴물이 던지는 난감한 질문들과 맞닥뜨린다. 그리고 상처를 입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스스로의 답을 내린다.


그러나 그 답들이라는 게 꼭 인생의 항로를 극적으로 바꾸는 전향적인 변화는 아니다. 대개 그 답들은 현상을 유지하는 쪽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때에도 그 선택을 내린 인물 자신이 변해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스스로가 처한 상황이나 이해하지 못했던 타인을 긍정하게 되는 식이다.


이러한 선택은 크게 두 가지 방식을 경유해서 내려진다. 우선 첫 번째 방식은 「작정기」, 「굴 드라이브」,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그런 나약한 말들」처럼 고향이나 타지로 떠나갔다가 돌아오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여행에서 주로 택해지는 수단은 ‘드라이브’다. 차를 운전하거나 차를 타는 감각은 작가에게 각별해 보이기까지 한다. 어쩌면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에서 얼핏 드러나듯이 차라는 공간이 주는 폐쇄성과 내밀함, 그로 인해 생기는 안전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남은 하나의 방식은 거짓말이다. 이 거짓말은 오해에서 빚어지거나 의도적으로 빚어지기도 한다. 전자는 「작정기」에서 드러나며, 후자는 「결로」에서 드러난다. 자신이 마주해야 하는 진실을 덮기도 하며 보류하는 방편이다. 그러나 끝내는 그 거짓말 자체가 주는 일종의 죄책감을 느끼면서 인물들은 변화한다.














김지연의 소설 안에선 죽음, 노화, 병이 자주 등장한다. 「내가 울기 시작할 때」처럼 본격적으로 죽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이 있는가 하면, 80년을 사용한 몸을 지닌 노인이 등장하는 소설(「결로」), 어린 연인이 자신이 더 빨리 늙고 죽는다는 것을 알고 떠날까 봐 수술을 받은 것을 숨기는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이 있다.


이 결들을 하나로 묶으면, 노화와 질병, 죽음으로 이어지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 가장 마지막 단계에 놓여 있을 법한 「내가 울기 시작할 때」는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소설집 안에서 가장 이질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화자가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렇기도 하거니와 분위기 자체도 가장 우울한 편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점은 이 작품에서 작가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지점이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죽은 후) 셋째 날 아침에도 아직 마음의 여유가 있다. 누구라도 곧 나를 찾아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삶에 대해 기대하는 것이 있었다. (「내가 울기 시작할 때」, p. 221)




삶에 대해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의 특권 아니었던가. 죽은 사람이 삶에 대해 기대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 과연 성립 가능한 것인가. 그러나 이 문장에 이르는 순간, 작가의 다른 작품 안에서도 보이던 결기가 확연히 드러난다. 이 구질구질한 삶 속에서도 나는 살고 싶다, 그리고 여전히 삶에 대해 기대하고 싶다, 설사 내가 죽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다른 작품 안에서 ‘나는 아주아주 행복한 사람으로 죽을 거야. 아무도 그걸 못 막을 거야.’라고 반복된다. (「사랑하는 일」, 250쪽) 이 결의는 처절하지만 그래서 더 소중하게 다가온다.




소설이 가지는 여러 기능 혹은 덕목 중에서 내가 각별하게 여기는 건, 어떤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삶에 치여서 미처 알지 못하고 지나갔던 것들을 끄집어내고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일. 그건 때로는 속살까지 낱낱이 드러내기도, 어떤 때는 윤곽만 보여주기도 한다.


김지연의 소설은 인간이 지니는 타인에 대한 이중성, 애증, 삶에 대한 고통이나 희망을 끄집어내서 보여준다. 저 밑바닥을 샅샅이 훑는 탐사선처럼. 나는 이러한 종류의 진실이 꽤 추한 것들이라 믿는 편인데, 김지연은 숙련된 솜씨로 그 추함을 우리가 기꺼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인물들이 변화하는 과정 끝에서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끔 만든다.











「사랑하는 일」이 2021년 <젊은작가상>을 받았을 때, 작품 속에 등장하는 한남이나 남성 성기를 비하하는 욕설 때문에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논란은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읽으면서 이게 그 논란의 작품이란 걸 알았다. 이 작품을 읽고 나서 나는 그다지 이 작품이 공격적이라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오히려 성기를 비하하는 농담은 내가 좋아하는 종류의 말장난이어서 우호적이었을 수도 있겠다. 다만 당시만 해도 강경하던 페미니즘 진영에 대한 피로감, 반감 등으로 인해 생겨난 논란이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덧붙이고 싶은 것은 작품 속에 한남이 등장할 수 있다면, 같은 층위에서 한녀, 김치녀가 작품 속에 등장하는 것도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공정한 게임이다. 이 세상에는 분명 여성들이 한남이라고 부르는 부류의 남자들이 있는 것처럼 동시에 남성들이 한녀라고 부르는 부류의 여성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소설이 현상을 반영하는 것을 어느 한쪽 진영에만 허락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 이를 허용하고도 작품성만으로 따졌을 때, 독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외의 이유로 논란을 부추기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 논쟁과 함께 2017년 <젊은작가상> 대상을 받은 임현의 「고두」가 받은 부당한 비난이 떠올랐다. 공정한 게임이라는 전제 하에서 내게는 두 논란 모두 같은 층위의 것이다. 두 작품 모두 받지 않아도 될 몫의 비난까지 받은 면이 있는 듯하다.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사랑하는 일」이 이 소설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그러고 보니 서두에 내가 퀴어 문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었던 것 같아 민망하지만, 레즈비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 두 작품이 내게는 가장 흥미로웠다.


기존의 퀴어 문학들이 답습하는 그들이 처한 처지 중 최악의 것들만을 파고들며 골몰하는 방식과는 다른 결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 다른 결을 만들어 낸 일등 공신은 아마도 대사인 것 같다. 김지연 소설을 읽으며 가장 놀랐던 부분이 대사였다.



“그래도 말했어야지.”
“뭐 하러 그래. 별일도 아닌데 괜히 걱정하고. 마음 졸이고.”
(…)
“마음 졸이게 했어야지.”
“뭐 하러.”
“같이 졸이게 해 줬어야지.”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p. 30



“섹스는 과대평가된 거 같지 않아?”
(…)
“아니. 나는 여자 너무 좋아…… 가슴 만지고 싶어…… 그거 말고도 이런 거 저런 거 다 하고 싶어.”

-「사랑하는 일」, p. 227



처음엔 좀 낯설었다. 이런 대사는 드라마나 웹소설에서 나올 법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소설들을 읽어나가며 이러한 대사가 작품의 분위기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는 걸 알고 나서는 대사 자체가 재밌게 느껴졌다.



서두를 조금만 수정하며 마치자. 김지연의 퀴어 문학이라면 관심이 있다. 얼마 전에 나온 신간 『조금 망한 사랑』을 곧 읽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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