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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전파 Mar 02. 2020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고

 인터넷의 어딘가에서, 신형철과 그의 신간,『슬픔을 공부하는 슬픔』대한 평가를 보았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평론가가 평론이 아닌 에세이에 더욱 집중하는 것처럼 보여 아쉽다는 논조였다. 글의 전반적인 뉘앙스는 (적어도 내가 느끼기로는) 신형철로 대표되는 평론가 집단이 본업인 평론보다 부업에 치중하게 된 현 세태에 대해 힐난하는 투에 가까웠다.


 나는 신형철의 글을 흠모하는 사람으로서 즉각 반박하고 싶었으나, 끝내 그러질 못했다.

 신형철의 신간을 읽고 나서 생각을 정리해보니, 그러지 못한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첫 번째 이유는, 저 비판 속에서 신형철은 고유명사이자, 상징적인 일반명사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신형철에게 대중이 손쉽게 붙이는 수식어들은 ‘제 2의 김현’, ‘문단의 아이돌’과 같은 것이다. 이 말이 한국에서 활동하는 평론가나 문인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신형철 스스로도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미칠 것 같다'고 표현할 정도로 동시에 부담스러운 수사이기도 하다.


 신형철에게 이러한 수사가 허락되는 것은, 그가 한국 문단에서 지니는 일종의 상징성에 있다. 우리는 유명한 소설가, 시인들은 제법 알고 있고, 좋아하는 소설가, 시인들을 한 두 명 쯤 가슴 속에 담아두고 있다. 그러나 평론가에 이르러서는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개중에서 신형철만은 독특하게도 대중에게 기억되는 평론가다. 그 특유의 미문과 섬세함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첫 평론집을 낸 이후로 10여 년이 흘렀다. (작년 정초부터 그의 두번째 평론집이 나온다는 풍문이 돌고 있긴 하지만, 2020년 3월, 아직도 정확한 소식은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 두 권의 산문집과 한 권의 영화 (서사) 평론집이 나왔다. 나와 같은 이에겐, 신형철 본인이 자신의 글, 나아가 자신의 문학에 고수하는 가혹한 엄격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은 이에겐 본업을 소홀히 하는 태만으로 보일 수도 있다.

 예컨대, 유명한 셰프의 음식점에 가서 긴 대기 시간, 긴 준비 시간 끝에 훌륭한 요리를 즐기는 행위에 만족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 기다림의 시간마저 하나의 즐거움일 수 있다. 반대로, 그 모든 기다림을 낭비라 여기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 태도는 차이가 있을 뿐, 결코 옳고 그름으로 재단할 순 없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형철 본인이 글에서 한 시인에게 했던 말을 빌려 말하자면, 평론가는 글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독자 생각도 해야 한다고 전하고 싶다.


 두번째 이유는, 그의 아름답지만 다소 결벽증적인 윤리관에 피로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고백하거니와, 나는 신형철이 가진 생각과 많은 부분에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의 글을 읽을 때 자주 미문에 감동하고, 종종 그 미문이 담고 있는 메시지에 거부감을 느낀다. 그래서 그의 윤리관은 내가 직조한 윤리관과 필연적으로 충돌을 야기한다. 때로는 그 충돌은 충돌로만 끝나기도 하고, 때로는 균열을 일으켜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윤리관으로 보충해야만 하는 경험을 낳곤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지점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부분이다.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 연습이며 함부로 말하지 않기 위해 늘 텍스트를 앞에 세워 두는 글쓰기라고 그가 말했던가. 그는 어떤 생각을 말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앞에 세워두고 말하는 듯하다. 그 작업은 대단히 조심스러워서 때론 그가 너무 작아져, 보이지도 않을 때가 있다. 그러다보면, 그를 통해 여과된 어떤 진실들은 대개 ‘일반론’밖에 남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의 글들이 고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그의 강점이 아닐까. 끝없는 검열 끝에 그가 내어놓는 결과물들은, 모두를 흡족하게 할 순 없어도 대체로 함부로 비판할 순 없게 만든다.      

 그의 글들은 나를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신형철의 매혹적인 무기인 미문이 아니었다면, 내가 그러한 생각을 담은 글들을 읽기라도 했을까? 과연 그러한 생각과 내 생각들을 대치시켜 더 나은 생각이 무엇인지 고민이라도 했을까? 부끄러운 자책과 함께,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렇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느꼈다. 그의 슬픔은, 나를 슬프게 한다. 내가 그와 같은 방식으로, 같은 일로 슬픔을 느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슬픔을 전적으로 내 것이라 여길 수 없었다. 그것이 내게는 못내 슬펐다. 나의 세계는 차라리, 김훈 선생이 『칼의 노래』 서문에 담은 그 고백에 가깝다.     


 나는 내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 제군들은 희망의 힘으로 살아 있는가. 그대들과 나누어 가질 희망이나 믿음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과 나는 영원한 남으로서 서로 복되다. 나는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서 살 것이다.  


 나는 차라리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 다급하게 여겨진다.     

 이 쓸데없이 긴 말들을 줄이자. (이렇게 말해도 된다. 이 많은 말들을 분리수거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신형철의 열렬한 팬이다. 많은 이들이 신형철의 미문에 위로받을 때, 나는 그의 미문으로 인하여 상처투성이가 된다. 그가 내 정신의 안일함과 부족함을 끊임없이, 날카롭게 물어뜯어주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그 상처로 인하여 내가 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는다.

 나는 그래서, 신형철의 글이, 신형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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