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여자 연애 고백사 2
“빨리 가보이소. 아지매.”
한 겨울에 바깥에서 고무장갑도 없이 얼음장 같은 물에 철로 된 밥그릇을 씻고 있던 한 여자는 이웃의 말에 그릇을 내던지고 집 밖으로 뛰어갔다. 얼마 뒤 그 여자의 품에 들려온 건 이제 초등학생 밖에 안 된 꽁꽁 언 넷째딸이다. 강가에서 친구들과 뛰어놀다 물에 빠져 결국 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여자는 그 날로 한 달 동안 집에서 나오지 못했다. 학교 가는 초등학생들을 볼 때마다 딸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나는 애 잘 못 키운다.”
외할머니는 늘 그렇듯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넣으며 말했다. 나에게 이모가 한 명 더 있었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알게 되었다.
“같이 놀던 여자애가 밀었다더라. 자세한 상황은 알지도 못했고. 그 때는 먹고 사는 게 바빠서 애도 제대로 못 보고... 다들 태어났으니까 알아서 컸지.”
같이 소주 한 잔을 마시던 엄마도 잠깐 옛기억에 잠긴 듯 했다.
“걔는 진짜 내랑 성격이 잘 맞았는데. 똑부러지고. 예쁘고.”
엄마도 동생이 많이 그리운 듯 했다. 지금 쯤 살아있다면 어떤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을까.
“민지야, 니는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아래이.”
외할머니가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는 내게 말했다.
“다 필요없다. 그냥 혼자 편하게 살고 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40년을 지금처럼 혼자 살았다. 엄마도 아빠를 보낸지 어느덧 2년이나 흘러간다. 친할머니도 할아버지를 떠나 보내고 4년간 혼자다. 내 주위의 어른들은 여자 혼자다.
엄마와 외할머니는 내게 항상 결혼하지 말라고 했다. 세 여자 모두 따듯하지 않은 남편을 데리고 살았다. 이는 시대탓일까. 남자 탓일까.
“에이 요즘에는 남자들 자상하고 얼마나 가정적인데. 시대가 많이 변했어.”
내가 외할머니 말에 반박하지만 엄마와 외할머니는 요지부동이다.
“좋은 사람이랑 결혼해서 잘 살 확률이 얼마나 되겠냐.”
엄마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그런 사람 찾기 힘들다며 말했다.
어릴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게 듣고 자란 말이라 나도 어느샌가 비혼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 생각이 내가 스스로 한 생각인지 귀에 딱지가 앉은 건지는 구별이 안 간다. 물론 어릴 적 맨날 싸우는 부모님을 보며 스스로 인생을 보호하려고 한 것일 수도.
그래서 20대 때는 결혼은 머릿속에 담아두지도 않았다. 만난지 얼마 안 되 곧 결혼 준비를 위해 돈을 모으자는 착한 남자도 뻥 차버렸다. 사귀는 와중에도 얘랑 결혼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은 떠올리지도 않았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한 게 아니라 그런 생각이 아예 안 들었다. 이건 내 성격일까. 엄마의 주입식 교육일까.
이 혼란은 30살이 되자마자 찾아왔다. 주위에서 한 두명씩 결혼을 시작한 것이다. 혈혈단신 혼자 살 것 같은 친구들이 남자와 살기로 선택했다. 그게 늘 의문이었다. 어떻게 저런 확신을 가지고 결혼이라는 큰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이건 너무나도 큰 일인데 저렇게 웃으며 결혼식장에 서 있을 수 있을까.
한 날은 우리 집에 김장하러 온 이모한테 물었다.
“이모야는 다시 결혼하기 전으로 돌아간다면 결혼 할거야?”
서른 여덟에 시집가서 애를 연달아 세 명이나 낳은 이모는 대답 전에 이마를 찌푸렸다.
“안 하지.”
“어? 이모야는 그래도 한다고 말 할 줄 알았는데.”
“그렇긴 한데... 결혼하면 한 가지 좋은 점은 있다.”
이모는 아이들에게 줄 김치를 맛보고 난 뒤 말했다.
“왠만한 일에는 별 끄떡없게 돼.”
얼마나 마음을 많이 다스려왔던 걸까.
엄마와 나는 추석 명절에 다시 외할머니집을 찾았다. 그날도 엄마와 외할머니는 작은 잔에 법주를 한 잔 하며 옛 이야기를 꽃피우고 있었다. 두 분이 추억 여행을 떠나는 동안 나는 TV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시골이라 몇 없는 채널 중 남자들이 모여 몽골로 여행을 가는 모습에 리모컨 버튼을 멈췄다. 남자 연예인들은 한국에서 온 소포들을 하나씩 뜯고 있었다. 그 중 차태현씨는 아내에게서 편지를 받은 모양이었다. 그는 최근에 아내가 아파서 마음이 쓰였다고 말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같이 울컥했다.
‘그래.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 내 편 하나쯤은 지지고 볶고 싸워도 있는 게 좋겠다. 남들은 모르는 서로만의 정이 있어야지.’
그 때 같이 티비를 보던 외할머니가 날 보며 말했다.
“결혼 하지 말고 남자 생각나면 그냥 저런 좋은데 여행가고 잊어뿌라.”
눈가에 송글 맺혔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외할머니는 남자들 대화는 안 듣고 풍경만 봤나보다.
“할머니, T야?”
“뭐? 티셔츠? 뭐라카노.”
외할머니는 T인 게 확실하다.
얼굴도 못 본 이모가 지금 살아 있었다면 어떤 여자의 삶을 살았을까. 그 이모도 결혼했을까. 아니면 좀 더 늦게 태어나 결혼에서 자유로운 인생이었을까. 혼자 잘 사는 여성이 주위에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나는 좀 더 수월하게 선택을 했을까. 결혼은 지니의 램프를 열어보기 전까진 아무도 모른다고 하지만 이렇게 다들 말리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일까.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