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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박하 Jan 22. 2020

5. 매일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결심하고 있어.

어제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저께도. 





매일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처럼. 매일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내일은 인간답게 살아야지, 하고. 해야 할 일을 내일로 자꾸 미루고 있어.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오늘까지만 이렇게 살아야지. 오늘까지만 이래야지 하면서. 오늘까지만 망가지는 거야, 라고 생각하면서 자꾸 오늘을 늘려 가고 있어.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겠어. 아침의 기억은 혼곤하고 노곤해. 꿈이었는지 진짜였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아. 미래를 상상하고 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역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자꾸 해. 매일은 지저분하고 집은 조금씩 조금씩 쓰레기에 먹혀 가.



시에 관련한 책을 몇 권 샀어. 시를 공부하고 싶어서 읽어보았어. 어휘를 다듬고 문장을 다듬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어. 조악한 문장들 대신 다듬어진 간절한 문장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문장 하나 하나를 시처럼 뽑아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언젠가는 내 글이 빛을 볼 수 있을까. 빛을 볼 수 있는 글을 써 둬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나는 오늘도 일기를 써. 신세를 한탄하는 글을 써. 이런 글은 아무리 빛을 봐도 회색빛 탁한 먼지묵음내 풍길 뿐 빛이 나지는 않아. 반짝거리는 글을 쓰고 싶지만 내 안에서 반짝임이 모두 사라진 것 같아. 지금도 나는 더러운 집에서 더러운 몸으로 더러운 마음을 옮겨 쓰고 있어. 글은 더러울 수밖에.



깊게 앓았어. 온 몸이 아팠어. 몸살이 났어.



꼼짝도 할 수가 없었어. 움직이면 온 몸이 삐걱거렸어. 살결이 닿는 곳마다 욱씬욱씬 저려 왔어. 이런 아픔을 옮겨 담고 싶었어. 식은땀이 줄줄 났고 말하는 것조차 힘들어서 입술을 열기도 무서웠어. 혼자 아프다는 것은 이런 기분이었어. 종종 혼자 아팠던 나는 아프면 땀내 나는 이불 속에 웅크려서 이 아픔이 저절로 지나가기를 빌었어. 병원에 가서 약을 타 올 힘조차 없었고 어떻게 아프다, 어디가 어떻게 아프다 이렇게 설명할 말도 없었어. 그냥 온 몸이 욱씬거리는 몸살이었어. 감기였던 것도 같아. 술병이 났었던 것도 같고. 건강이 정말 중요하구나, 생각했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거든, 정말로. 무엇도 할 수 없었어. 음식을 먹을 수조차 없어서 입맛도 뚝 떨어져서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어. 하루에 아무것도 안 먹고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정말 그렇게 며칠을 보냈고. 며칠은 아이스크림을 먹었어. 달고 시원한 거라면 토하지 않고 먹을 수 있을 것 같았거든. 먹을 수 있었어.


아프고 나니 생리를 시작했는데, 나는 생리가 시작하면 정말 하루종일 자는 게 증상이거든. 하루종일 잘 수 있을 것 같았어. 이렇게 자면 안되는데, 자기만 하면 안되는데 잠이 쏟아져 내려. 자는 동안 다른 세상에 가 있는 것 같아. 꿈 속에서 나는 다른 세계에 있어. 그 곳에서 나는 누군가와 함께 이야기를 하고, 모험을 하고, 사랑을 나누고 어디론가 떠나. 그리고 갑작스럽게 눈을 떠서 돌아와. 그럼 나는 생각해. 그 세계에서의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을까, 아니면 여전히 잘 살고 있을까? 다른 세계의 나는 잘 지내고 있을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걱정하지는 않을까? 쓸데없는 것들을 생각하고 쓸데없는 것들을 걱정하고 있어.


잘 지내? 잘 지내냐는 전화를 하기도 무서워.


전화를 하면 또 시작하잖아. 나는 아무것도 해 놓은 게 없는데, 하고 있는 게 없는데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무엇을 해 놓았느냐고 묻겠지. 나는 또 혼이 날거야. 무언가를 하고는 있는데, 아무 결과가 없어. 결과가 없어서 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게 겁이 나. 그럴 거면 왜 했느냐는 물음을 들을 것 같아서 무서워. 나는 언제부터 도전하고 시도하는 것에 겁을 내기 시작했을까. 결과 없는 것들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을까. 무언가를 하고 싶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극히 미약하다는 생각을 자꾸 해. 노래를 하고 싶어. 글을 쓰고 싶어. 그림을 그리고 싶어.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은 나를 행복하게 하지만 나를 살게 하지는 않아. 일을 해야 해. 돈을 벌어야 해. 운동을 해야 해. 내가 해야 하는 것들은 나를 행복하게 하지는 않지만 나를 살게 하지. 어제는 정말, 존재하는 게 힘에 벅차다는 생각을 했어.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는 게 버겁더라고. 그냥 앉아 있는데 앉아 있는 게 너무 너무 힘든 거야. 사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는 게 버거워.


존재한 다음 살아야 하고, 산 다음 행복해야 하는 게 맞는 거잖아. 그런데 나는 존재하기조차 힘이 들어. 


나는 살기 이전에 행복하고 싶고 존재 이전에 행복하고 싶어. 행복을 느껴서 그래서 존재해야겠다, 살아야겠다. 이런 걸 결심하고 싶어.


내일은 해야 할 일을 하러 가려 해. 곧 설날 연휴야. 연휴가 오기 전에 꼭 해야 하는 일들이 있어서 그걸 내일은 하러 갈거야. 그리고 연휴 동안 다시 쉬고. 2월이 오면 삶의 방식이 조금은 달라져 있겠지. 그걸 위해서 연휴 전인 내일 꼭 해야 할 일을 할거야. 오늘은 존재하는 것이 조금은 덜 힘들었어. 내일은 존재하는 것이 조금 덜 버겁기를 바라. 어떤 존재의 방식은 이런 식이라고, 나는 생각해. 나는 역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글을 쓰지 않는 나는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서. 이런 식으로라도 존재해야 해.


내 존재를 열심히 새겨야 해.


한 글자 한 글자 쓸 때마다 나는 존재하고 있음을 느껴. 어떤 글은 나를 살아있게 하고 어떤 글은 나를 행복하게 해. 글이 나를 살아있게 하고 행복하게 하니까, 나는 글을 써야 해. 그런데 어떤 글들은 나를 아주 비참하게 만들어. 그것도 삶의 일부일까. 일종일까.


당신에게 쓰는 이 편지들을 모아서 내년에 보여준다면,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할까. 언젠가는 당신에게 이 모든 편지들을 보낼 수 있기를 바라. 그 때까지 나는 살아 있을지도 몰라. 이게 내 마지막 유언들이 될지도 모르지. 일 년을 꼬박 당신에게 글을 쓸거야. 그게 나를 살아있게 해 줄거야. 오늘은 배가 아팠고, 그래서 살아 있다고 느꼈어. 내일은 어떤 아픔이 나를 살아 있다고 느끼게 만들어 줄까. 당신은 항상 나를 아프게 하고, 그래서 나는 당신이 나를 살아 있게 만든다고 생각해. 당신 곁에 가고 싶으면서도, 가고 싶지 않아. 아직도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어. 유예 기간은 착실히 줄어들고 있어.



생각 중이야. 모든 것을. 존재와 삶을. 사랑을. 당신을 생각 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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