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열 살이 조금 넘어갈 무렵부터 엄마는 바깥일을 했다. 교사가 되고 싶었다던 엄마는 주부가 되어 나와 동생을 길러내었고, 그리고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 대신 기술을 배우고 싶어했다. 엄마가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누군가를 먹여살릴 수 있는 일의 범위는 정해져있었다. 엄마는 피자집에서 일을 하다가 5년 넘게 피자집을 직접 운영하기도 하셨고, 초밥집에서도 일을 하셨고 칼국수집에서도 밤 늦게까지 일을 하셨다. 하루에 열 시간이 조금 넘는 노동은 멀쩡하던 엄마의 손과 다리를 아프게 했다.
엄마의 손마디는 어느샌가 굵어져있었다. 굵어진 손마디만큼 통증을 호소하는 날도 많아졌다. 오늘은 손바닥이 아프다, 오늘은 여기가 좀 부어있다, 오늘 아침엔 주먹이 쥐어지지 않는다는 등 아픔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병원에서는 나이가 들어서 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했지만 나는 안다. 그 자연스러운 현상을 앞당긴 것은 쉬지 않고 일을 해왔던 시간이 축적된 결과라는 것을. 집에서 놀고 먹고 질질 짜기만 했던 20대의 나를 만난다면 한대 갈겨주고 싶다. 니가 그러고 있을 시간에 엄마는 손마디가 저릿할 정도로 일을 하고 있다고.
올해 한번 더 서른 살을 살게 되면서 엄마가 그러했듯이, 나도 조금 더 밀도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서른 살에 연년생 남매를 케어하면서 출판사 영업을 뛰었고, 지금은 어느 음식점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엄마처럼 살 수 있을까. 엄마의 반만이라도 따라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꿈 많고 야무진 엄마의 시간을 빌려 자란 내가 아직까지 뚜렷한 직업도 없다는 게 늘 죄송스러웠다.
어제 오후부터 카톡을 확인하지 않고 있다가 엄마가 어제 밤에 보낸 카톡을 오늘 아침에서야 읽게 되었다. '작년 한 해 잘 버텨줘서 고맙고 잘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오늘 아침 출근 전에 일찍 일어나서 밑반찬을 만들고 떡국까지 끓여놓고서도 항시 잘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엄마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보답이 지금 당장 없다는 게 초라했다.
다행히 얼마 전 본 면접에 합격을 해서 이번 3월 1일부터 정식으로 출근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두 달이 빨리 지나서출근하는 직장인이 되었으면 싶으면서도 그 두 달동안 엄마의 손마디가 더 뻣뻣해지면 어떡하나, 다리가 조금 더 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엄마와 나는 사이좋게 한살 씩 먹었다. 나는 나이만큼 생각이 많아졌고 엄마는 아픈 곳이 많아졌다. 흐르는 시간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언젠가는 엄마의 손마디가 아프지 않을 정도로 꼭 잡고, 경치 좋은 카페에서 생전 처음 보는 메뉴를 먹어보고 호캉스를 떠나고 싶다. 그게 바로 올해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