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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종이 Feb 22. 2023

예비 시아버지께 프로포즈 받아보신 분?

나는 귀하다

 지난주 주말에 남자친구와 예비 시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약속을 잡아 맛난 걸 먹으러 다닌다. 아버님이 부르는 건 아니고 보통은 내가 주동자가 된다. 이혼하고 혼자 지내는 아버님이 눈에 밟히기도 하고, 남자친구와 이미 오랜 시간을 함께 해서 그런가 자꾸 그의 가족들을 한 번씩 챙기게 된다. 또 다른 이유라고 한다면, 사실 아버님이랑 보내는 시간이 즐겁다. 오래간만에 상사도 아니고 부모님도 아닌 그냥 어른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기도, 내가 7년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또 다른 면모를 접하는 시간이기도, 마냥 어린 아이처럼 사랑을 받게 되는 시간이기도 해서 그렇다. 


 나의 예비 시아버님은 수줍음도 많고, 무뚝뚝한 성격이셔서 표현이 많지 않다. 아들 둘뿐이기에 생전 처음 보는 어린(나는 어리지 않지만 아버님께는 한참 어리니ㅎㅎ)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이 많아 보인다. 벌써 5번째의 만남을 갖고 그동안 술과 함께 서로 친해졌을 법도 하다 싶었는데 여전히 아버님은 내 눈을 잘 못쳐다본다. 그러다 술 한잔씩 들어가면 그제야 나를 보면서 당신의 젊었을 적 이야기를 털어놓고, 내 남자친구의 어릴 적 이야기, 직장 생활이며 여러 가지 시시콜콜한 얘기들로 웃고 울고 하신다.(생각보다 예비 시아버님은 눈물이 많으시다.)


 그렇게 예비 시아버지께서 심심하기도 하고 어색한 농담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면 리액션 장인인 나는 눈을 마주치며 웃기도 하고 끄덕이면서 대꾸도 하고 나름 '티키타카'를 하려고 노력한다.('노력'이라기엔 좀 더 자연스럽지만 '자연스럽다'라기엔 신경을 쓰며 리액션을 하고 있다.) 그러니 혼자 살면서 직장만 왔다갔다 하시는 아버님께는 밤 12시도 아쉬운 시간이다. 좀 더 있다가 택시타고 가길 바라며, 조금이라도 우리 둘을 붙잡아 놓으려고 쉴새 없이 떠드신다. 그 애탐이 내 눈에도 보여서 거의 한 달에 한 번씩 보는 아버님과의 자리는 쉽사리 빠져나올 수가 없다. 나도 불편하지 않기 때문에 더 즐기는 것도 있지만 매번 갈때마다는 '오늘은 꼭 지하철 막차는 타고 온다..!' 다짐한다. 이유는 단 하나, 택시비가 너무 아깝기 때문.


 매번 실패했던 다짐이었는데 어쩐 일로 이번에는 성공을 했다. 나와 남자친구, 예비 시아버지는 mbti로 따지면 완벽한 'p'들이기 때문에 충동적으로 번개 약속을 할 때가 거의였다. 근데 이번에는 더더욱 제대로 번개로 만났다. 아버님이 토요일마다 쉬는데 금요일 밤에 남자친구와 있다가 '우리 내일은 아버님이랑 놀까?' 제안을 했고, 남자친구가 바로 오케이 해서 아버님께 전화를 한 것이다. 목소리가 왠지 좋지 않은 것 같긴 했지만 아버님도 'OK' 해서 만났다. 아니나 다를까 만나보니 아버님 컨디션이 영 꽝이었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고 기침을 한 번 시작하면 말을 잘 이어가지 못할 정도로 목감기에 걸린 것이다.(코로나 검사 결과 코로나는 아니었다.)


 내가 만두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아버님께서 미리 알아두셨던 딤섬 맛집으로 향했는데 여러 가지 음식들을 시켜놓고는 정작 아버님은 잘 드시지 못했다. 아무래도 목감기에 제대로 걸렸으니 음식을 넘기는 것도 힘드셨던 것이다. 원래는 술도 2차까지 마시러 가고, 마무리로 24시 카페에 갔다가 그래도 아쉽게 헤어져야 아버님인데 이번에는 딤섬에 짬뽕에 버섯탕수육까지 맛있는 것들을 앞에 두고도 잘 드시지 못하고, 술도 우리의 분위기를 망칠까봐 한잔씩 겨우 드셨다.


 "아버님, 저희 2차 술집 미리 알아왔는데 거긴 다음에 가고 카페로 바로 갈까요?"

 "그럴까? 오늘은 술은 안되겠다 허허"

 "이것도 마시지 마세요~제가 다 마셔버리면 되요!"

 " 아니야 그냥 심심하니까 한잔씩 마시는거야 괜찮아~"


 나름 농담을 하면서 우리 분위기를 맞추려고 노력하시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아 텐션이 오르지 않는 느낌이었다. 속으로 계속 걱정이 되어 나도 모르게 아버님 괜찮냐는 말을 끊임없이 물어봤다. 그때마다 괜찮다면서 허허 실실 하셨지만 전혀 괜찮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나마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를 드시면서 몸을 녹일 때는 조금 돌아오는 듯했지만 결국 10시 좀 넘으니 일어나자는 말을 하시더라. 평소같았으면 우리에게 10시는 아주 이른 시간이었지만 이날은 아버님이 다음에 더 맛있는거 사주신다면서 멎쩍은 웃음과 함께 홀연히 집으로 향하셨다. 우리도 이왕 일찍(나름 일찍) 일어난 김에 지하철 막차는 놓치지 말자며 후다닥 갔다.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남자친구와 나에게 아버님 톡이 왔다. 몸이 안좋아서 오래 있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셨는지(사실 10시도 그다지 이른 시간은 아니지만) 일찍 보내 미안하다는 말씀이셨다. 괜찮다고 답장을 하고 나서 나와 남자친구는 술이 모자라 동네로 와서 간단하게 한잔씩 더 하고 마무리했다.


 다음 날 아침 주말 늦잠을 자고 일어나 폰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버님께 톡이 와있었던 것 자체만으로도 놀랐는데(아버님은 웬만하면 먼저 연락하시지 않는다.) 내용에 더 놀랐고, 눈물까지 났다.

나를 놀라게 한 예비 시아버지의 톡, 내 답변이 이 톡 아래로도 있었지만 여기까지만ㅎㅎ

 읽고 또 읽어본 것 같다. 이것은 마치 프로포즈..? 그래 이건 프로포즈야. 아니 결혼을 계획하고 있는 남자친구한테도 아직 받아보지 못한 프로포즈를 예비 시아버님께 받다니..이상하고 놀랍고 말이 너무 이뻐서 눈물이 났다. 그러면서도 참 어떻게 대답을 해야할까 싶었다.


 내가 고민했던 몇 가지가 있었는데 가장 큰 건 '남자친구가 이걸로 프로포즈를 대신하진 않겠지?!' 였다. 참 내가 생각해도 웃겼다. 우린 7년을 만났기 때문에 당연해진 것들이 아주 많은데 그 중 남자친구에게 '결혼'도 그렇게 인식된 것 같아서 평소에 내가 항상 "난 프로포즈 받고 결혼할거야!" 라는 말을 한다. 그럼 남자친구도 "당연하지~" 라고 하는데 항상 무던하고 둔한 그가 진짜 하긴 할까? 이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근데 그에게서 받기도 전에 조금은 쌩뚱맞게도 예비 시아버지께 받은 것이다. 톡이었지만 무뚝뚝한 아버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서 눈물이 흘렀다. 그와중에 '아꽁이가 이걸로 퉁치면 안되는데 이걸 승낙하는 답변을 해야하나 어떻게 답해야 하지?' 라는 생각도 했다는 게 지금 떠올려보면 웃기기도 하다. 살짝은 농담스러운 걱정이기도 했지만 솔직히 감동이 훨씬 크기도 했다. 


 어떻게 답해야 했을지 지금도 모르지만 그때의 감정을 담아 답톡을 했다. 생각해보면 '승낙'이란 게 없는 프로포즈 답변이었던 것 같다. 언젠가 당신의 아드님께서 준비가 되어 나에게 프로포즈를 하고 '예비'가 아닌 진짜 며느리가 되는 날이 되면 나도 좋겠다는 식의 답을 했다. 이건 나를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하는 방어적인 면도 드러내면서 나도 얼른 이 애매한 '예비'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비춘 것이었다. 아버님께는 어떻게 와닿았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진심은 사실 그보다도 더 많이 감동하고 행복했다.


 특히 아버님께서 '아빠 식구가 되어주면 어떨까? 아빠의 욕심일까?' 라고 하는 말씀이 잊혀지지 않는다. 나를 식구로 맞이하는 걸 욕심이라고 느끼고 계시는구나, 아버님께는 내가 귀하구나 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나에게는 이미 시아버지 신분이 되신 아빠가 계시다. 아빠를 보면 우리 새언니를 사랑하지만 표현이 없고, 어쩔때는 새언니보다 아들이나 손주를 더 생각하는 듯하다. 그럴때면 '역시 시자는 시자구나' 라는 생각을 하는데 나의 시아버지도 다를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아무렴 아무리 예뻐도 내 자식이 먼저겠지. 그래도 내 자식 위해서 그 티를 내지 않고 며느리를 더 위해주느냐, 티를 내느냐 차이겠지만, 그래서 나도 앞으로 결혼 생활을 하면서 서운해질 때도 많겠지만, 아무튼 나의 예비 시아버지는 나를 귀하게 생각하는구나. 


 차마 '욕심 아닙니다.' 라는 답변은 드리지 못했다. 욕심일까 라는 말을 듣는 순간 자존감이 팍팍 올라가서는 '네 욕심이십니다, 다만 저도 아버님의 식구가 되려 합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참 모순적이라면 모순적이지만 예비 시아버지의 프로포즈와 같은 카톡 하나가 이미 결혼을 준비하자며 한 남자와 약속을 하고 계획을 하고 있던 나에게 또 다른 종류의 자존감을 올려줬다.


 아버님, 저는 아드님과 함께 당신의 식구가 될 준비를 하고 있지만, 욕심은 맞으니 욕심부려 주세요. 프로포즈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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