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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May 29. 2024

젠더의식과 가정폭력의 관점에서 본다면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를 보고서

(본 글에는 영화의 주요 줄거리 및 결말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여성서사의 영화라고 하면, 주연배우가 여성인 것만을 강조한 영화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페미니즘 영화라고 내세워서 저질의 영화만을 내놓는다면 단기적인 여성관객의 표를 받을 수는 있겠으나 실은 그런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자체가 여성관객에 대한 모독이다. 반면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여성서사의 영화라 하면 <에일리언>에서의 리플리와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서의 퓨리오사라고 생각한다. 둘 다 남초집단의 리더를 맡는 여성이자, 강인한 여성이며,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이성적이다. 


그런 연유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처음 보았을 때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당연 퓨리오사라고 생각했다. 억압된 여성들과 연대하여 탈출을 시도하는 점, 장애인인 사회적 약자라는 점이 퓨리오사의 강인함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러나 조지 밀러 감독은 성별 한쪽에 치우쳐 관객에게 억지 공감을 요구하지 않았고,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임모탄), 여성과 연대하는 남성(맥스) 등 다양한 역할을 보여주며 영화의 균형을 이뤘다. 영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그런 퓨리오사가 시타델에 오기까지의 여정을 그린 이야기라 하니, 개봉 전부터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로지 작품으로만 이야기해 본다면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전작에 비하여 이야기구조의 섬세함은 덜하나, 작품성만큼은 여전히 뛰어나다. 주인공의 서사가 개연성이 있으므로 퓨리오사의 선택지가 공감이 되며 엔진의 굉음은 영화의 또 다른 O.S.T이다. 줄거리와 연출을 모두 잡은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 감독이 무려 일흔이 넘은 노장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카레이싱 장면에서 느껴지는 섬세함과 액션신에서 느껴지는 폭발적인 힘은 노인이라기보다는 중년에 가깝다. 이제 갓 풋내기인 청년이 아닌 무엇이 맞는지를 구분할 줄 아는 중년의 모습이랄까.


그렇다면 앞서 말하였듯이 이 영화를 젠더의식에 관점에서 본다면 전작인 분노의 도로보다도 균형적이라고 생각한다. 모계사회에서 자란 퓨리오사가 폭주족인 남성으로 주로 이루어진 디멘투스의 군단에게 납치되는 과정에서 보이는 남성캐릭터들이 꽤나 폭력적으로 느껴지지만 이 것이 전부는 아니다. 퓨리오사의 엄마인 바사, 바사의 동료와 디멘투스 군단이 대칭적인 것 같지만 영화는 그 이후로 각기 다른 역할들을 통해 젠더리즘의 편견을 조금씩 흐트러트린다.

몰래 잠입에 성공하여 바사가 퓨리오사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마지막 사람은 바로 여성이다. 여성바이커는 자신도 아이가 있다며 여성과 모성애를 강조해 읍소하기에 바사는 같은 여성연대의식으로서 자비를 베푼다. 그러나 여성바이커는 바사와 퓨리오사가 탈출하자마자 그들을 고발한다. 바사가 여성으로서 베푼 연대의식이 도리어 그녀를 죽게 만들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참 아이러니하다. 더불어 퓨리오사의 탈출을 돕고 그녀가 처음으로 마음을 열게 된 사람은 남성인 근위대장 잭이다. 디멘투스와 대칭되는 퓨리오사의 조력자이며, 결국 같은 남성인 디멘투스에게 끔찍하게 처형당하는 안타까운 인물이다. 이렇듯 성별을 교차하여 조력자와 방해자를 번갈아가며 영화는 조금씩 젠더의 경계를 흐린다.


더불어 젠더관점에 이어서 이 영화는 한 편에서는 가정폭력에 관한 영화처럼 보이기도 하다. 애초에 어린 소년들을 추방시켜 모계사회를 유지하는 부발리니인 퓨리오사에게 처음으로 아버지라 칭한 것이 디멘투스라는 점에서 그렇다. 디멘투스가 퓨리오사를 단순히 물건취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식들이 남기고 간 곰인형을 건네주는 것도 인상적이다. 비록 그녀를 시타델에 넘기고 곰인형만을 갖고 왔지만, 그는 죽어서까지 퓨리오사를 자신이 정한 애칭(리틀 D)으로 부른다. 디멘투스가 죽기 직전까지도 용서를 구하다기보다 자신과 퓨리오사가 별반 다를 것 없다며 조롱하는 것은 드라마 <더 글로리>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가정폭력의 가해자들이 끝끝내 용서보다는 혈연관계임을 강조하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관점들은 사실 이 영화의 해석이라기보다도 한 번 생각해 본 주장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내놓을 수 있는 블록버스터라는 것이다. 자신이 세운 공고한 세계관을 무너트리지 않고 세월이 지나도 그것을 기반으로 수작을 내놓는 노장의 감독. 앞으로도 그의 영화를 오래도록 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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