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을 보고서
어릴 적부터 애니메이션을 매우 좋아했다. 투니버스 황금기를 제대로 관통한 90년대생으로서 기억나는 만화만만 나열해도 원피스, 나루토, 명탐정 코난, 신의괴도 잔느, 다다다, 후르츠바스켓 등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러한 내 열정은 성인이 되고 난 후 서양문화에 좀 더 관심을 보이며 옅어져 갔고 서서히 나에게 애니는 추억의 산물일 뿐 더는 심장 뛰게 하는 무언가는 되지 못했다. 오랜만에 며칠에 걸쳐 정주행 한 귀멸의 칼날을 보기 전까지.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은 급하게 20분짜리 몰아보기 영상으로 사전정보만 숙지한 채 관람한 작품이다. 아주 기본적인 정보만 가진 채 보게 된 이 영화는 한동안 애니를 잘 보지 않았던 내 세월의 격차를 깊이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다. 2D 혹은 전체가 3D인 애니메이션에 익숙했던 나에게 전형적인 2D그림체와 공간적 배경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CG는 그야말로 격세지감이었다. 그리고 이는 귀멸의 칼날이 원작만큼이나 애니메이션의 덕을 톡톡히 본 작품이자 유현준교수의 말처럼 앞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의 방향성처럼 느껴졌다. (귀멸의 칼날 무한성 구조를 건축가가 본다면)
<귀멸의 칼날>은 유현준교수의 유튜브를 인용해 보자면 일본의 오니와 사무라이 문화, 서양의 드라큘라가 합쳐진 시대극이라 할 수 있겠다. 흡혈을 하고 밤에 돌아다니지 못한다는 것은 드라큘라가 절로 떠오르지만 극 중 시대배경과 주요 무기가 칼이라는 점, 그리고 혈귀의 외형은 일본 오니의 것이다. 스토리라인은 흔히 볼 수 있는 소년만화(성장만화)이지만, 작가가 여성으로 추정된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극 중 남성 주인공들은 로맨스영화의 일부를 닮았다고도 볼 수 있다.
여동생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기본적으로 친절하고 다정한 성향의 남자주인공과 이번 무한성편의 진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아카자의 순애보는 우정과 모험을 중시하는 여타 소년만화에 비해 유독 두드러지는 편이다. 더불어 아카자의 설정은 그의 비극적인 서사를 독자들이 공감하는 데에 방해되지 않도록 작가가 의도적으로 설계한 것이 보인다. 더불어 <귀멸의 칼날>은 각각의 캐릭터성이 뚜렷한 편이며, 장치로서 소모되는 캐릭터가 그 양에 비해 적은지라 '이 중에 네가 정 붙일 캐릭터가 한 명즈음은 있겠지'를 말하는 것 같다.
이야기의 매력은 이쯤 넣어두고 앞서 말한 CG와의 조화를 본다면 <귀멸의 칼날>은 확실히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어야만 하는 작품이었다. 특히나 '무한성'이라는 공간 자체는, 낱장의 종이로는 채 보일 수 없는 단점을 컴퓨터그래픽으로 보완시켰다. 공간적 감각이 전혀 필요 없는 이공간 안에서 주인공들이 추락과 상승을 번갈아갈 때 관객 역시 그 공간 안으로 빠져들 수 있도록 CG가 유기체적 공간인 무한성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이 작품은 어찌 보면 적절히 CG를 사용할 수 있는 지금 나온 것이 매우 적기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은 2D와 3D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존재했어야 하는 작품일지도 모른다. 2D는 옛날의 것, 3D는 현재의 것으로 나뉘는 디즈니사의 애니메이션과 비교해 보았을 때 2D 만의 매력을 그리워한 나 같은 이들은 충분히 반가울 작품이다. 펜촉의 그리움을 그대로 가진 채 필요한 적재적소에 CG를 섞는 것. 이것이 범람해 오는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만화강대국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향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