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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y 18. 2023

춤 앞에서 좀 더 밝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4막 n장

‘이제부턴 사람에 관심을 두기보다 춤 자체에 집중할 거야! 나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수강 신청 버튼을 누르면서 몇 번이고 다짐했다. ‘그럼 그전에는 춤에 집중하지 않았던 건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동호회의 1차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춤 자체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여러 관계나 마음에 신경 쓰고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사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큰 불만 같은 게 없었다. 도리어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오랜만에 갖는 공동체 활동이었기에 제법 신선하기까지 했다. 아끼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그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게 꽤 기쁘기도 했다. 오랜만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고 그 문 안으로 들어오는 수많은 사람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했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 관계는 그 폭이 넓어지면 다시 좁힌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고 다시 관계가 소원해질 무렵이면, 그만큼의 여파도 크게 오는 법이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좋은 관계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서로를 반목하는 나쁜 관계가 되어 그렇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저, 높은 파도처럼 밀려와 비교적 단단히 만들어놓은 평정심이라는 방죽을 넘어선, 넘실대는 마음의 강물이 문제였다. 그 신선한 강물이 방죽을 넘어 목초지로 밀려 들어와 어여쁜 꽃을 피웠고 그 꽃들은 향기가 났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다. 어느 시기가 흐르고 강물은 다시 잔잔해지고야 말았다. 나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강물은 다시 잔잔해졌고 전처럼 쉽게 방죽을 넘어오지 못했다. 목초지의 꽃은 시들었지만, 나는 그 꽃을 잊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런 상황이었다. 강물이 내가 가진 의도와 상관없이 범람하던 시간은 지나갔고 나는 그 목초지에 쭈그리고 앉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 된 느낌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강물의 흐름을 바꾸려고 매일 조금씩 물길을 팠다. 그리고 그게 소정의 성과를 이루어 이제는 과거 꽃이 만발하던 시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제는 적당한 꽃들이 목초지 위에서 계속 피어오기는 했다. 다만, 점점 이제는 나 자신도 어여쁜 꽃보다도 목초지가 갖는 본래의 성격에 집중하고 싶었다. 이제는 만발하는 꽃들의 시간이 아니라 목초지를 통해 나 자신을 살찌울 시간이었다. 꽃향기 그윽하던 그 시기는 실로 행복하던 시기였다. 그 아찔함에 평정심을 잃을 만큼 즐거웠던 시기였다. 그래서 그 향기가 조금이라도 사그라질 것 같으면 서글퍼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강물은 강물로 봐야 하고 그것이 온전한 내 것이 될 수는 없었다. 범람하던 강물과 그윽한 꽃향기에 허우적거리다 나의 시간을 조금은 잊고 6개월을 보냈다면, 지금부터의 시간은 오롯이 나 자신을 가꾸는 시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춤 자체에 집중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였다. '그냥 사소한 향기로도 만족할 것이다. 설령, 향기가 나지 않더라도 강물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다음날이면 다시 무너질 다짐이었고 어쩌면 다짐 따위는 까맣게 잊은 채, 어디선가 마음의 강물이 보리이삭마냥 넘실거리고 그윽한 향기라도 나면, 조건반사처럼 그저 좋다고 꼬리를 살랑거릴 테지만, 그래도 오늘! 아니 지금만큼은 신경 쓰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가급적이면 정규 과정으로 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그 두 선택지 혹은 둘 다 선택할 수 있는 조건에서 만약 정규 과정을 따라야 하는 게 의무라고 했다면 아마 아예 수강을 다음으로 미뤘을 것이다. 그땐,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거나 심지어 다 포기하고 싶은 욕망마저도 있던 시기였다. 그렇다고 둘을 다 선택하기에는 또한 주말에 새로운 일들을 계획하고 있었기에 3시는 지금으로선 부담이 되는 시간이었다. 이러한 이유들과 더불어, 슬슬 어두컴컴해지는 저 5시에는, 그 누구보다도 마음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가 한 가족은 아니지만, 애들처럼 함께 깔깔대고 웃던 존재들이 거기 있었다. 나는 그 추억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말할 수 없는 든든함과 위안의 감정마저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출발 준비를 할 오후 4시부터 세상이 온통 핑크빛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러한 이유들로 이번에는 그저 오로지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하기로 했다. 편하고 자유롭게, 그리고 아무 고민 없이 즐겁게만 듣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정규 과정을 포기했다.


어찌 보면 재수강이었지만, 커리큘럼은 과거의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듯했다. 이는 내게 좋은 시너지를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까닭은 배웠던 것을 충실히 복습할 기회를 주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것을 익힐 수 있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특히, 나를 둘러싼 어떤 굴레나 기짱으로서 신경 쓸 것도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무엇보다 배웠던, 그리고 다시 배우는 기본기들을 충실히 복습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운동은 다 몇 안 되는 기본 동작에서 파생하여 여러 갈래로 변화하는 것들이 많았다. 그 말인즉슨, 고급 과정의 것들은 그 많지 않은 기본기가 충실하면 결국 다 해낼 수 있는 것들이라는 말이었다. 기본이 단단하지 않고서 다음 것을 배우는 데 급급하다면, 그것만큼 위험한 게 없었다. 물론 다음 나가야 할 것들을 아예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매일 기본을 충실히 쌓아가면서 그 위에 새로운 것을 얹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러한 새로운 것을 얹기 위한 토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첫째는 기본에 충실해야 하고 둘째는 꾸준히 기본과 배운 것을 해봐야 한다는 것 셋째는 배운 것들을 처음에는 느려도 정확하게 해낼 수 있도록 하고 그 이후에 속도를 붙여 나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당연한 거겠지만, 이러한 반복 숙달의 과정이 지루할 수도 있다. 하물며, 누군가는 그저 즐기기 위한 취미활동인데, 굳이 이렇게 지루한 과정을 거쳐 나갈 필요가 있냐고 생각하기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좋은 것들은 마치 운동 중의 땀과 운동 후의 근육통과도 같은 노력과 고통을 필요로 한다. 올바르게 과정을 따라가는 중에 생기는 그 고통은 근육의 파괴와 재생을 거듭하면서 성장한다. 우리가 그 땀과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성취에 따른 만족감이 있기 때문이며 그 이후에 찾아올 것으로 기대하는 긍정적인 변화 때문이다. 그 기대감에는 신체적인 변화와 더불어 잘하고 싶은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그 욕망은 잘 하고 싶은 욕망이다. 그리고 그 욕망을 들여다보면 단순한 욕구가 아닌, 그보다 상위 단계의 욕구인, 누군가에게 존중 받고자 하는 욕구나 무언가를 이뤄 내고 싶어 하는 자기 실현의 욕구와 관련된다.

이러한 성취감과 기대감에도 불구하고 그 변화는 더디기에 포기할 수도 있다. 뭐, 다행이라 여기는 건, 나이를 먹고 나서 깨달은 점과 좋은 점이 몇 가지 생겼는데, 깨달은 건 나는 비교적 우직하고 성실하다는 점이고 나이를 먹고 전보다 참을성이 강해졌고 여러 경험을 통해 지루한 시간이나 스트레스에 둔감해지거나 흘려보낼 방법을 스스로 고안해 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사실, 뭐 주짓수를 할 때도 기본 드릴만 한 시간 이상 매일 하는 내게는 꾸준히 반복 연습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실로, 나는 꾸준함만이 완전함에 이르는 비결이라고 믿는다.


‘완전’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좀 더 이야기하자면, 나는 ‘완벽하게’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완전하게’라는 말을 좋아한다. ‘완벽’의 사전적 정의가 ‘흠이 없는 구슬이라는 뜻으로, 결함이 없이 완전함을 이르는 말.’이고 ‘완전’의 사전적 적의는 ‘필요한 것이 모두 갖추어져 모자람이나 흠이 없음.’이라는 비슷한 의미를 지니지만, 완벽은 ‘완전’에 ‘무결(결점이 없음)’이 더해진 느낌이다. 내게는 전자의 경우에는 그것에 몰두하여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안 된다는 느낌, 또는 그러한 스트레스를 주는 것 같다면, 후자는 조금의 어긋남이 있더라도 그것을 포용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느낌을 준다. 물론 이는 내가 가진 언어에 대한 느낌일 따름이다. 좀 더 생각해보니, 이는 ‘완전’이라는 말보다 ‘온전’이라는 말이 좀 더 어울릴 것 같기도 하다.


수업은 간단한 스트레칭과 함께 예상대로 기초의 반복부터 시작됐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던 바운스 연습이었다. 이따금 단톡방에 바운스 연습이나 트리플 연습을 한 것을 영상으로 찍어 올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바운스를 좀 더 신경 써서 하라는 말을 듣곤 했었다. 바운스 연습에서 많이 도움이 되었던 것은 영상을 찍는 것뿐만 아니라, 과거 쌤들이나 잘하는 이들의 바운스 모습을 상상하며 비슷하게 따라 해보려던 것이었다. 동호회 카페의 장점 중 하나는 매번 복습 영상이 올라온다는 것이었는데, 지금 내가 수강 신청해서 듣고 있는 것뿐 아니라 검색하면 과거의 영상들도 함께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바운스는 항상 중요한 동작이었기에 많은 분의 영상을 볼 수 있었는데, 그중에는 친근한 이의 바운스 동작도 있었다.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여러 사람을 접하게 되었고 그중에는 좀 더 가깝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친한 친구처럼 편안한 감정이 들었고 좀 더 상상하기가 수월했다. 과거에 쌤들로부터 배운 것을 바탕으로 그런 이들을 움직임을 떠올려가면서 동작을 따라 하니 조금 더 편안하게 그리고 선명하게 동작을 따라갈 수 있었다.


바운스 연습은 다리를 벌리고 무릎을 살짝 구부린 채 탄성을 느끼며 움직이는 기본적인 바운스, 왼발과 오른발의 무게중심을 바꿔가며 하는 교차 바운스, 그리고 걸어가면서 진행하는 바운스로 이어졌다. 이전의 나의 바운스를 상상해보자면, 음악의 템포 때문에 조금은 쫓기는 듯한 바운스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동작은 내 몸이 조금은 뻣뻣한 납작한 미술용 붓과 같다면, 바닥에 대고 있는 붓끝을 살짝만 찍어서 그 탄성으로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쌤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한 바운스 동작은 붓을 끝에서부터 밑동까지 아래로 충분히 눌러 사용했다가 그 탄성으로 부드럽게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물론, 둘 다 붓의 끝부분은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 붓에 물감을 뭍힌다면, 바닥에 충분히 붓 끝에서 밑동까지의 전체 자국이 남지 않을까 싶었다.


바운스가 끝난 후에는 트리플을 만났다. 왼발 락스텝에 프론트 트리플을 4번 한 뒤 마지막 네 번째에 오른발 락스텝으로 전환해서 프론트 트리플을 했다. 이때도 바운스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도장에서 맨발로 트리플을 밟을 때와는 달리 미끄러운 신발을 신었을 때 전진했을 때 미끄러져 제동을 걸기가 쉽지 않았다. 미끄러지는 것이 맞는 것인지 잘 몰라서 나중에 동기에게 이 고민을 이야기했더니, 이미 오랜 경험이 있던 동기는 락스텝을 밟을 때 기본 스텝에서는 너무 뒤로 밟으면 추진력이 그만큼 강해진다는 조언과 함께 지나치게 앞으로 나가려고 하기보다 보폭을 줄여 스텝을 정확히 밟는 것이 좋다는 조언을 해 주었다. 확실히 그 부분을 신경 써서 바운스를 유지해가면서 천천히 연습했더니 미끄러지는 일이 확실히 줄어들었다. 프론트 락스텝 트리플을 하고 나서는 사이드 왔다 갔다 하는 락스텝 트리플, 한 자리에서 트리플만 양쪽으로 하는 연습 등을 진행했다.


이러한 종합적인 연습은 내게 상당한 자극이 되었는데, 그전까지는 어떻게 기초 훈련을 해야 할지 모르던 나에게는 단비와 같은 훈련법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파편화된 연습방법은 있었지만, 마치 국민 체조와 같이 전체적으로 이어서 연습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그게 바로 한 음악에 연속으로 이어지는 여러 형태의 바운스와 트리플 드릴(반복 훈련)이었다. 각각의 연습을 각각 1분씩 돌리면 약 8분~10분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것이었기에, 큰 부담없이 매일 꾸준히 연습하기에 안성맞춤인 듯했다. 이 훈련법을 기준으로 복습이나 점차 다른 것들을 추가하면 꽤 좋은(더불어 주짓수에도 좋은) 밸런스 훈련 프로그램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스트레칭과 워밍업이 이렇게 끝나고 본격적인 수업으로 들어갔다. 수업은 일반적인 스윙아웃의 연습으로 시작했다.

언어의 힘은 이름이 부여된 사물에 관하여 인간의 사고를 고정하거나 한정한다는 점이다. 특정 단어를 보면 그것 혹은 그것과 관련된 모든 사물들을 떠올릴 수 있지만, 동시에 더 멀리 뻗어 나갈 수 있는 사고의 한계를 정해버린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사물은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물건뿐 아니라 품사(단어)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스윙 댄스에서 그 한계를 볼 수 있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이 ‘스윙아웃’이 아닐까 싶었다. 적어도 나에겐 ‘스윙아웃’이라는 용어는 그 단어가 가지는 이미지와 실제 움직임 사이의 혼동을 가져올 수 있는 단어였다. 마치 감자탕이라는 단어를 듣게 되면, 그 탕의 주인공이 감자처럼 느껴지는 것과 비슷하다랄까? 참고로 감자탕의 주인공은 단언컨대, 돼지 등뼈다. (‘감자탕’이라는 용어를 보면, 자연스럽게 감자가 들어가 있는 붉은 색의 탕을 먼저 떠올리게 되지만, 실은 감자탕의 어원이 우리가 먹는 채소가 아니라 돼지등뼈를 의미하는 감저(甘猪; 단맛이 나는 돼지고기)라는 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스윙아웃’을 말할 때, 어떤 이미지가 떠오를까? 적어도 나는 회전을 하여 밖으로 나가는 이미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스윙이라는 말에서 ‘회전’이라는 데에 집중하게 되는데, 그러한 까닭에 항상 5번째에서 6번째 스텝으로 이를 때, 나도 모르게 몸을 의도적으로 돌리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실은 스윙이라는 말은 프로 레슬러들이 로프로 달려가다가 그 탄성으로 다시 되돌아 나가는 직선 운동에 가까웠다.  직선 운동이 되기 위해선 몸이 돈다는 느낌보다 그저 다리의 위치를 전환해주며 무게 중심을 한 발과 그 발의 반대편에 위치한 다른 발로 꾹꾹 이동해준다는 느낌이 중요했다. 이러한 방식의 설명은 강사님마다 여러 방법으로 설명을 했다.  

“저는 네 번째 스텝에서 다섯 번째로 이동하는 스텝을 우향우한다고 생각하고 이동해요.”

리더 강사님의 설명은 직관적이었다. 즉 네 번째 스텝에서 중심이 왼쪽에 잡혀 있는 발의 축을 우향우하면서 오른쪽으로 전환하여 상대를 보내고 다시 왼쪽으로 중심을 잡아가는 방식이었다. 회전한다는 느낌보다 스텝을 정해진 스텝의 지점에 꾹꾹 밟아 움직인다는 느낌이었는데 큰 체구인 선생님의 스텝을 보면서 분명한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한 스텝 이동만큼이나 중요한 건 보듬(?)고 있는 상대를 함께 옮기는 일이었는데, 주짓수에서 깃이나 소매를 잡던 버릇 때문인지는 몰라도, 체중 이동으로 상대를 옮기는 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당기는 듯한 실수를 하곤 했다. 머릿속 이미지는 커다란 냉장고를 번쩍 안아서 옮기는 게 계속 떠올랐는데, 실제로는 상대와 몸이 닿을 것이 우려해서인지 네 번째 스텝에서 계속 상대와의 발의 거리가 멀었고 그로 인해 상대를 지지하고 있는 오른쪽 팔이 펴져 어정쩡한 상태로 상대를 받치고 있었다. 이미 그러한 자세가 습관화되어 버렸는지 이후에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도 고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자전거 타기처럼 일단 한번 깨우치고는 고민했던 게 '이게 이렇게 하면 되는 거였어?'라며 해결된 것도 있었는데, 하나는 리더 강사님으로부터 다른 하나는 팔뤄 강사님으로부터 깨닫게 된 것이었다. 리더 강사님은 수업에서 스윙아웃을 혼자서 연습 하는 방법을 알려주시면서 동시에 그 동작을 ‘크게, 보통, 작게’ 하도록 주문하셨다. 평상시에는 과하게 하거나 보통의 거리로 스윙아웃을 연습하곤 했는데, 그러다 보니 실제 소셜 때에는 공간이 협소하여 이따금 스윙아웃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강사님이 말씀해주신 작게 움직이는 스윙아웃이 떠올라 시도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도 스윙아웃이 잘 되었다. 비좁은 상태에서 하려니 4번 스텝의 공간을 평소보다 좁게 하게 되고 상대의 발과 내 발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지 않아 오히려 이상적으로 상대와 함께 중심이동을 할 수 있게 된 게 아닌가 싶었다. 여하튼 뭔가 스윙아웃이 잘 되어간다고 느껴지니 정말 보이는 것이 상대밖에 없고 즐거움에 취하게 되는데, 처음 겪어보는 경험같이 느껴졌다. 물론 기존에도 즐겁긴 했으나 이 경험은 뭐라 말하긴 어려우나 실로, '되고 있구나!'라고 나도 모르게 말하게 될 경험이었다.

팔뤄 강사님께 배운, '이게 이렇게 하면 되는 거였어?'는 나의 오른팔과 상대의 팔과의 밀착하여 느낄 수 있는 움직임의 리드였다. 물론 팔을 밀착해서 상대의 동작을 유도하는 건 잘되지 않고 아직도 뭐랄까 마음은 아직도 쭈뼛쭈뼛했다. 다만, 팔뤄 강사님의 경우 벌써 알고 지낸 지 6개월 이상의 시간이 흘러서일까? 뭔가 마음을 놓게 되는 게 있었다. 생각해보면, 어깨동무라도 기꺼이 할 수 있는 의지가 될만한 동기에 가까웠기에 좀 더 적극적이 될 수 있었다. 여하튼, 뭔가 마음을 놓아도 될 사람이라 생각해서인지 수업 이후에 소셜 모임에서 개인적으로 강사님들에게 물어보면서 팁을 배울 때 조금 더 그녀에게 가까이 붙을 수 있었고, 그때 비로소 팔의 정밀한 컨트롤(?)이 무엇인지 조금 더 느낄 수 있었다. 수업 그리고 그 이후 소셜에서 이 두 가지 경험이 나로서는 뭔가 처음 느끼는 것 같은(물론 예전부터 계속해서 많은 선생님이 설명해오셨겠지만) 깨달음이었다.


춤을 출 때, 이처럼 누군가를 특히 편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 때문일까? 다시 말하면, 누군가에게 친근함을 느끼게 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상대의 눈을 그저 바라보는 것인가?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건 내 눈빛을 본 상대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아마, 단언컨대 그건 미소가 아닐까 싶다. 적어도 내게는 상대의 미소를 띤 눈짓 하나만으로도 실수에 위축되지 않고 조금은 상대를 믿고 춤을 출 수 있게 하는 요인이었다.

‘나의 반복되는 패턴의 레퍼토리에 지루해하지 않을까? 혹시 내 실수를 언짢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시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춤을 추다 보면 무미건조한 눈빛 하나에 오만 가지 생각을 다 하게 된다. 그러다 어설픈 실수라도 하게 될 때, 상대의 미소를 보게 되면 미안함과 동시에 안도의 감정이 솟아오른다. 환한 미소가 아니더라도 그 미소 띤 얼굴을 보게 되면 거짓말을 조금 더 보태서 사랑에 빠질 것 같은 기분마저 드는 것이다.

어느 책인지는 모르겠다. 심리학과 관련된 조금은 두툼한 책이었던 것 같은데, 그 책에서는 사랑이 무엇인가에 관해서 수많은 인터뷰와 정의를 듣고 나서 크게 세 가지를 분류했는데, 바로 열정, 친밀감, 헌신이었다. 물론 어느 사랑에서나 어느 하나가 두드러지게 나타날 뿐 다른 게 없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는 대략 70여 가지 키워드 중에서 비슷한 범주의 것으로 분류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의견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대체로 이러한 범주가 마음에 드는데, 젊은 날의 열정과 열정 이후의 친밀감, 그리고 자녀에 대한 헌신이라는 사랑의 다른 이름을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랑의 형태는 이러한 춤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듯하다. 격렬하면서도 리드믹하게 추는 춤에서 젊은 날의 사랑과도 같은 열정이, 온화한 눈빛과 동작의 교감, 그리고 실수조차도 웃을 수 있을 때에는 어떤 친밀감이, 그리고 오로지 자기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한다는 데에서 헌신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스윙 댄스란 3분 동안 사랑에 빠지는 것’이라던 모 팔뤄님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 말에 절대적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마치 감기에 걸렸을 때와 독감이 걸렸을 때 그 증상이 비슷한 것처럼, 춤 병에 걸렸을 때와 사랑에 걸렸을 때 어찌 보면 비슷하게 저 세 가지가 드러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왜 사랑이 좋거나 위대한가?'를 물었다 하자. 그 대답은 각자 다르겠지만, 우리가 어떤 음식이 좋은지를 물어볼 때, 그것이 지닌 어떤 맛, 식감, 성분 등이나 또는 더 나아가 어떤 추억까지도 이야기하듯이 사랑이 좋거나 위대한 까닭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엇을 포함하고 있는지, 혹은 자신에게 주는 의미가 어떠한지를 말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사랑의 의미 또는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앞서 말한 상대에 대한 불같은 열정, 마음을 편하게 여는 친밀감, 아낌없이 주는 헌신이며 그 때문에 위대하다고 말한다면, 그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저 스윙댄스도 위대하다고 여겨볼 만하지 않을까?

이따금, 등불 아래에서 나라는 존재가 빛나는 것 처럼 느껴질 때, 스윙 음악이 흐르는 이 3분의 시간이, 마르셸 프루스트가 그의 책에서 한 말처럼,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초라하고 우연적이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고 느끼지 않게 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으로 남기도 한다. 또 이따금은, 물론 아직은 나의 모습이 초라하며 이따금 죽고 싶을 만큼은 아니라도 내가 가진 실력을 부끄럽게 여기기도 하지만, 춤을 추면서 점점 초라함이라는 껍질을 조금은 벗어던지고 상대와의 만남을 운명처럼 여기게 되거나 미소를 띤 상대의 모습을 바라볼 때면, 이런 나라도 좀 더 배우며 살아볼 가치가 있겠다고 문득 생각하기도 한다. 생각이 과해지면, 이런 춤을 함께 출 수 있는 사람을 만나 3분이 아닌 같은 공간 안에서 30년을 함께 손을 맞잡았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을 하기도 한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게 되면 다시 현실을 깨닫고선, 바닥 아래 머물러 있는 행복해 보이는 두 조각의 그림자에다가 그런 생각일랑 떠나보내고, 그냥 지금은 그런 생각없이 이 순간에만 충실하겠다고, 그러니 되지도 않는 생각일랑 말고 그저 춤이나 추자며 옆자리에 앉은 이에게 수줍게 손을 내민다.


스윙아웃과 관련된 여러 패턴을 배우면서 연습은 계속 이어진다. 일반적인 스윙아웃에 이어서 완전히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아닌 270도로 상대를 보내는 스윙아웃, 상대를 한 바퀴에서 90도 정도를 더 보내는 스윙아웃, 옆으로 함께 걸어가는 스윙아웃, 포워드 스윙아웃 등, 여러 패턴의 시범을 보여주고 반복 연습을 해나간다. 같은 공간 안에서 같은 움직임으로 같은 시간을 보낸다. 눈앞으로 보이는 수많은 반가운 이들, 내가 존재하는 이 공간의 시간 안에서 존재하는 반가운 다른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다시 새로운 다짐을 마음에 되새긴다. 내가 존재하는 공간, 그 공간을 풍요롭고 따뜻하게 만드는 것은 안타깝게도 내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시선이, 손길이, 발끝이 맞닿은 곳곳마다 남겨져 있는 상대의 미소와 부드러운 말이며, 한 번 더 돌아보게 만드는 어떤 온기였다. 그것들이 이따금 어느 공간 속에 깊게 녹아들어 있을 때면, 나는 마치 잃어버렸던 내 영혼의 조각들이 거기 남겨진 것처럼, 다시 그곳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조금은 잊었던 시간을 더듬어 상대의 미소와 말과 온기를 재조립한다. 부스스한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거울을 보면서 한 번, 찬 바람이 부는 문밖을 나설 때 한 번, 그렇게 한숨을 한 번, 두 번 쉴 때마다, 모든 것이 다 부질없다고 여기다가도 내가 사랑하는 존재와 사물이 눈앞에 있거나 그들에 관한 기억이 우연히 내 감각을 깨우고 허무의 공간을 채우면,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시작해보자고 마음을 먹는다. 한숨을 쉬며 '그렇게 생각하는 건 오로지 어리석은 감정과 호르몬과 그리고 이 춥고 서글픈 계절의 탓'이라며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이 회색의 계절과 감정의 허무로 모든 걸 망쳐버리지 않도록 미소 한 번 짓고선, 자기 자신을 구해낼 어떤 음모(?)를 꾸민다.


'이번만큼은 충실히 저 동작과 움직임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지.'라는 다짐으로 세운, 어떤 계획은 그렇게 만들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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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말 중에는 이런 말이 있다.

나는 천 가지의 발차기를 할 줄 아는 사람은 무섭지 않다.

하지만 한가지의 발차기를 천 번 연습한 사람은 무섭다. - 이소룡


무도뿐 아니라 연습이 필요한 모든 것들에 필요한 말이 아닐까 싶다. 이소룡뿐 아니라 내가 아는 인생의 모든 스승들은 기본기와 더불어 반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나는 이소룡이 말한 이 말은 반복의 중요성만큼이나 다른 중요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바로 객관화 또는 수치화였다. 기본기나 반복의 중요성은 알지만, 언제나 고민이 되는 부분은 ‘언제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구체적으로 해야 하는가?’였다. 시간은 한정되기에 효율적인 횟수나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도 중요했다. 어떤 기준도 없이 즉흥적으로 생각날 때 한다는 것은 정작 해야 할 것들은 못하게 될 가능성이 있었으며 할 때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말하자면, 이를 프로그램 식으로 객관화하여 루틴으로 만든다면, 그저 연습할 때에는 그 프로그램만 진행하면 될 것이었으며 스트레스도 적어질 일이었다. 그뿐 아니라 특정 공간이나 시간에는 당연히 해야 하는 습관처럼 여기게 되기에 의지나 열정을 불사를 필요도 없을 터였다.

난 ‘의지나 열정, 열심히’라는 단어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그 까닭은 이러한 개인의 의지가 필요한 것들은 그렇게 하기까지 하기 싫은 감정, 즉 스트레스가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어느 기자가 김연아에게 무슨 생각을 하면서 스트레칭을 하느냐고 물어보니, 무슨 생각을 하냐니 그냥 하는 거라고 말했다는 유명한 답변처럼 그냥 때가 되면 밥을 먹는 것처럼 해야 할 일로 만들어야 스트레스가 없거나 상대적으로 적을 수 있었다. 하여튼 나는 그래서 무언가를 그냥 하는 걸로 만드는 걸, 말하자면 루틴화하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지금의 이 수업 시간에 배운 것이나 기본기를 마치 바에 오거나 특정 시간이 되는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하는 것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싶었다.

또 하나는 처음에 혼자서 시작해서 습관화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 있었다. 새롭게 시작하는 일의 경우, 시간을 할애한다고 하여 그 시간을 오롯이 새로운 일에 전념하거나 습관화하기 쉽지 않은데, 그럴 때마다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곤 했다. 말하자면, 스터디 개념인데, 내가 하고 싶은 프로그램을 구체적으로 만들고 다른 이들을 동참하게 하는 것이다. 잘 짜인 훈련 프로그램은 비단 나만 도움이 되는 게 아니고 타인에게도 도움이 되며 모집을 하기로 한 나 자신은 내가 하고픈 걸 짠 것이기에 참여하기로 동의한 사람들에게 이 프로그램으로 나아갈 명분을 세울 뿐 아니라 책임감 때문이라도 꾸준히 하게 된다는 이점이 있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처음에는 이렇게 프로그램을 짜고 모집을 시작했다.


① 스트레칭

② 워밍업 드릴(요청에 따라 추가)

a. 바운스 연습 1분 연습 20초 휴식

b. 왼발 오른발 교차 바운스 1분 연습 20초 휴식

c. 걸으며 바운스 1분 연습 20초 휴식

d. 왼발 락스텝 프론트 트리플 1분 연습 3초 남으면 바로 발 바꿔 다음 전환

e. 오른발 락스텝 프론트 트리플 1분 연습 3초 남으면 바로 발 바꿔 다음 전환

f. 사이드 락스텝 트리플 1분

g. 뒤로 삼각 트리플 1분

h. 앞으로 삼각 트리플 1분

i. 휴식 1분

③ 수업 복습(각 주차 각각 4회 반복 x 4세트 계획중)

a. 일반 스윙아웃 - 서클 1번 / 스윙아웃 2번 / 다시 서클 1번  

b. 사이드로 팔뤄 보내는 스윙아웃 - 서클 1번 / 스윙아웃 2번 / 서클 1번

c. 270도 회전하며 스윙아웃 - 서클 1번 / 스윙아웃 2번 / 서클 1번

d. 옆으로 함께 걸어가는 스윙아웃 – 스윙아웃 3번 / 서클 1번

e. 옆으로 함께 걸어가되 걸을 때 강세를 달리해서 – 스윙아웃 3번 / 서클 1번

-1번 딴딴 딴따단

- 2번 딴따 단따 단따단 으로

f. 포워드 스윙아웃 - 서클 1번 / 스윙아웃 2번 / 서클 1번

g. 음악에 맞춰 섞어서 해보기 3번 스윙아웃 1번 서클 기준으로

④ 해보고 싶은 패턴 공유

미리 영상으로 공유한 패턴이나 준비한 패턴 1개를 연습해 보면서 피드백


처음에는 수요일 정기 모임 때 할 수 있는 운영 계획만 올려서 의사를 타진하다가, 모 리더분과 팔러 분의 도움으로 목요일에 대관하여 복습을 진행할 수 있게 되면서 모집 계획을 좀 더 상세화했다. 그 결과, 생각보다 많은 분이 호응해주셨고 이를 통해 복습을 진행해 나갈 수 있었다.


이렇게 모여 한두 번의 모임을 하고 점차 훈련의 그림이 그려지자, 나아가 혼자서 할 수 있는 훈련 루틴을 짰다. 보통은 ① 스트레칭 ② 기본 바운스 동작 플로우 ③ 수업에서 했던 전 과정 복습 ④ 기존에 배운 동작 복습 ⑤ 해보고 싶은 동작 연습이었는데 이번에는 횟수를 정하는 게 아니라 동작 하나하나를 3분 동안 하고 1분을 쉬는 전략으로 짰다. 마치 운동에서 크로스핏과 같은 인터벌 트레이닝 방식을 빌린 건데, 이렇게 하면 장점은 하고자 한 동작들을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연습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또한, 정해진 시간만 마치면 훈련이 자연스럽게 끝나게 되는 것도 좋았다. 3분을 정한 까닭은 보통 스윙 댄스 음악이 3~4분 정도에 끝났기 때문에 그 음악의 박자에 맞춰서 하기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춤을 즐기는 것인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각자마다 생각이 다르고 춤을 대하는 방식이 다르기에 누군가 보면 이런 방식이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이나 스타일에 맞지 않는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각자가 느끼는 '즐긴다'의 관점 차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즐긴다'라는 게 무엇일까? 공자님은 왜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기지 못하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라고 했을까?

나는 주짓수를 ‘즐긴다’라고 여긴다. 나는 주짓수와 관련된 그 모든 것들이 좋다. 반복해야만 하는 드릴이나 주짓수와 관련된 체력 운동마저 거르지 않는다. 유튜브에서 보는 대부분의 콘텐츠는 주짓수와 관련된 것이다. 멍을 때리고 있거나 길을 걸을 땐 별일 없으면 배웠던 것들을 머릿속에서 반복해서 이미지를 그려본다. 스스로 원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니 그다지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는다.

물론 난 아직도 그 영역에서 초보이고 잘하진 못하지만, 뭐 공자님이 말씀한 이기고 지고의 의미가 단기간의 승부 영역에서만 해당하는 말은 아닐 거라고 본다. 여하튼 즐긴다는 의미는 내게 이렇다. 그 안에는 잘하고 싶은 욕구, 심리학자 메슬로우가 말한 5단계 욕구 중 가장 높은 욕구인 자아실현과도 관련된 욕구가 자리 잡고 있다. 비록 지금은 스윙 초보이지만, 내 등에 멋진 날개를 달고 싶은 욕구가 있으며 나는 이를 위해서 실로 스윙을 즐기고 있다. 그리고 더욱더 즐겁게 즐기기 위해서 저런 드릴마저 너무나 즐겁게 행하고 있다. 계획한 모든 것을 끝마칠 때 느껴지는 성취감! 누군가와 손을 맞잡고 만족스럽게 춤을 출 때 느끼는 즐거움만큼이나 기쁜 감정이다. 만족스럽게 소셜을 나눌 때 만큼이나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이러한 성취감으로 그날 하루도 치유를 받는다.

나는 행복이나 불행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행복을 느끼게 만드는 감정들의 합성물질과도 같은 것이라고 여긴다. 성취감, 소속감, 안정감, 생각지 못한 위로와 온정, 따스한 말과 눈빛, 배부름, 성공 뭐 이러한 긍정적인 것들이 불행을 주는 요인의 총량 또는 밀도보다도 많거나 높을 때 대체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톨스토이가 "행복한 가정은 저마다 다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다 다른 요인으로 불행하다."라고 말한 것처럼 불행을 느끼도록 하는 요인들이 행복을 주는 감정들보다 더 강할 수밖에 없지만(칼에 베이거나 넘어져 생긴 상처는 한순간이지만 치유는 오래 걸리는 것처럼), 저 프로그램을 행할 때 내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성취감이라는 열매가 보장되어 있다면, 누가 보면 지루하다고 느낄 훈련들 조차 재밌겠다고 여길 만하지 않을까? 뭐, 소셜을 많이 못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소셜만 하던 예전보다는 덜하겠지만, 그래도 요즘 같은 때에는 보통 빠닫(바가 닫힐 때까지 춤을 추는 것)까지 하고 가니, 그 횟수로도 아쉬운 점이 없었다.


인생의 실로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우리 삶에 공허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이다. 한가해진 틈을 타서 공허감이 때로는 우리를 집어삼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들게 하기에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채워 놓는 게 중요하다. 어떠한 시간은 노동과 같은 타인의 의지가 개입되는 방식으로 시간을 흘려보내고 어떠한 시간은 나 자신의 의지로 마음을 채운다. 어느 시간의 틈 안에 남겨진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건 대체로 나의 의지이다. 그러나 이 의지는 마치 몇 번 쓰고 나면 부서지는 싸구려 소모품 같은 것이어서 어느 정도 쓰고 나면 지쳐서 아무것도 하기 싫게 된다. 아니 때로는 이미 지쳐버려 의지를 불러일으키기도 전에 공허함이 자신을 좀먹도록 내버려 두기도 한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에도, 또는 내 의지가 고작 티끌만도 못한 허망한 것이 되어버릴 때조차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해야 할 의미 가치 있는 일이 있다는 것만큼 나를 붙잡아 주는 것 또한 없다.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 아닌, 그날 하루 치의 무언가를 ‘해냈다!’라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나 자신은 알고 있는 그 만족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 어쩌면 나는 지금 그러한 걸 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내가 쏟은 시간과 노력만큼의 보상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오늘 하루 이걸로 내가 충실해졌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바라는 게 없으니 지칠 일도 없다. 열정과 노력이 아닌, 그냥 하는 루틴이니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냥 습관처럼 하면 된다. 하기 싫지만, 해야만 하는 일조차 ‘싫다’라는 기분을 무디게 만드는 건 결국, 또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바로 습관이다. 어느 날 문득 본 책에서는 나의 이런 생각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해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산다. “시작이 반이다!”라고 외치며 호기롭게 시작하지만 금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원점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자꾸만 실패를 반복하는 이유는 뭘까? 인간 내면의 충동적 본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하다. 삶의 목표 중 대다수가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강렬한 충동 때문에 방향을 잃고 좌초된다. 그리고 그 끝에는 끔찍한 무기력이 기다리고 있다.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이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올바른 선택을 하루도 쉬지 않고 꾸준히 해나가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미국인의 84퍼센트는 채소가 몸에 좋다는 걸 알지만 늘 베이컨과 햄을 장바구니에 담는다. 체중 관리에 실패하는 사람 중 71퍼센트가 날씬한 몸매라는 목표에 집착하지만 밤마다 정반대의 행동을 한다. 우리가 아는 것, 우리가 목표로 추구하는 것, 우리가 의지를 불태우는 것 등은 사실 삶에서 큰 도움이 안 된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여전히 자신이 잘 제어되고 있다는 거대한 착각에 빠져 산다.

성공한 이들을 보며 우리는 그들이 매사에 자신을 엄격하게 몰아붙이고, 필적할 수 없는 강렬한 끈기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라고 여긴다. 더 일찍 일어나고,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고, 담배와 술을 끓고, 부부 관계를 회복하고, 스마트폰을 덜 들여다보는 습관을 새롭게 형성하려면 비범한 의지력을 발휘하고 유혹에 꾸준히 저항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지난 수년간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성공한 사람들은 이런 불굴의 정신력으로 좋은 습관을 형성하지 않았다. 그들은 무언가를 자제하거나 인내할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았다. 자제력 대신 습관을 활용했다. 내가 지난 수년간 만난, ‘충동에 휘둘리지 않고 일상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결코 스스로의 의지력과 끈기를 과신하지 않았다. 고통스럽게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4회 이상 달리는 사람 중 93퍼센트는 날마다 운동하는 장소와 시간, 즉 ‘상황’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이렇게 살지 않는다.

올바른 습관을 들이려면 먼저 습관이 우리가 좌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의식이 깨어 있는 시간 중 거의 절반 동안 인간의 뇌는 이른바 ‘습관 시스템’에 의존한다. 샤워, 옷 입기, 수면 등 삶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부터 이메일 확인, 문서 읽기, 운동 등 상대적으로 더 복잡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고민이나 판단을 거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반복한다는 것이다. 나는 항상 이런 질문에 매력을 느꼈다. “우리가 인생의 중요한 목표를 마치 저녁에 소파에 앉듯이 자동조종 모드로 달성하도록 뇌를 훈련시킬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다이어트, 일찍 일어나기, 날마다 운동하기 같은 우리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일들을 애쓰지 않고도 완수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여기 흥미로운 실험이 하나 있다. 연구팀이 사람들에게 팝콘을 준 다음 영화가 끝난 후 수거해서 그들이 얼마나 먹었는지 확인했다. 실험 참가자들은 몰랐지만 그들 중 젊반은 일주일 전에 만든 눅눅한 팝콘을 받았다. 공짜로 줘도 먹지 못할 음식이었다. 과연 사람들은 팝콘을 얼마나 남겼을까? 그들은 가리지 않고 그냥 다 먹었다. 신선한 팝콘이든 눅눅한 팝콘이든 대다수의 사람은 자신의 평소 습관에 따라 주어진 팝콘을 그대로 먹었다. 빈 통을 반납하며 팝콘이 너무 눅눅해서 맛이 없었다고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도 팝콘을 다 먹었다. 이처럼 습관은 의식적 자아 바깥 영역에서 작동한다. 우리가 자주 반복하는 행동일수록 인식조차 안 된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면 에너지가 샘솟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연구 결과는 어디에도 없다. 그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반복적으로 커피를 마시는 것뿐이다. 커피뿐만이 아니다. 사람을 대하는 방식, 회의 때 취하는 동작, 쇼핑 패턴, 운동 횟수, 먹고 마시는 주기와 양 등 수많은 일상이 인간의 의식 밖에서 이루어진다. 이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목표를 이루고 변화를 꾀할 때 그저 꾸준하고 성실한 노력에만 기댄다. 노력에 노력을 더하고 꾸준히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긍정적인 변화를 이뤄낼 수 있으리라 낙관한다. 사람들에게 비만에 이르지 않도록 살을 빼는 데 가장 큰 장벽이 뭐냐고 물으면 대개 의지력을 언급한다. 비만 인구 중 4분의 3 이상이 음식의 유혹을 참지 못해서 비만이라는 형벌에 짓눌려 산다고 믿는다. 입술을 꽉 깨문 채 견디고 버티고 맞서고 부딪치고 이겨내지 못해 삶이 이 모양 이 꼴이라고 자책한다. 그것이 유일한 성공의 법칙이라고 확신한다. 이들은 지난 수십 년간 과학이 축적한 습관의 힘을 삶에 적용하는 전략을 무시한 채 가시밭길을 걸어가고 있다. 이것이 대다수의 사람이 변화에 실패하는 이유다. 스스로를 착취하다 삶을 낭비하는 것이다. 이제 이런 삶을 끝장내야 한다. <도서 해빗 中, 웬디 우드 지음, 김윤재 옮김, 다산북스>



물론 어떠한 것이든 단계가 존재하며 습관화하기 전에 필요한 것은 흥미를 돋우는 것이라고 본다. 말하자면,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입문단계에서는 반복적인 훈련이나 습관화시킬 계획보다 흥미를 갖고 계속하게 할 요인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처음부터 체계적인 훈련 계획보다도 소셜 모임을 많이 가지거나 그 안에서 돈독한 인간관계를 맺으며 정해진 커리큘럼을 동료들끼리 함께 따라가는 게 옳다고 본다. 요는, 꾸준함을 통해 탁월함에 이르기 위해서라도 단계별로 다른 목표를 세워야 한다.

‘내가 가는 길이 어느 단계쯤일까?’ 이 공간에 들어와 남들과 비슷한 속도로 나아간 것도 7~8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이 정도면 완벽한 그림은 아니더라도 아주 기초적인 단계의 밑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간이라고 본다. 거기에 다른 이들과 다른 오로지 나만의 색깔을 덧입히는 건 전적으로 네 몫이다. 밑그림에 색을 칠할 때 하나하나 칠하듯, 나도 하나하나 꾸준히 칠해 나가야 한다. 때로는 타인의 조언에 귀담아 듣되, 그것이 과연 내가 그릴 그림에 옳은 것인가 판단은 전적으로 내가 해야 한다. 내게 귀는 두 개가 있으며 그 두 귀로 흘려 버릴 말과 깊이 담아 둘 말을 구분해야 한다. 상황에 따라 귀담아들을 말이 흘려 버려야 할 말이 되기도 하고 흘려 버릴 말이 귀담아들어야 하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역시 그 판단조차 전적으로 내가 해야 한다.


‘나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가?’ 결국, 그렇게 될 거라고 여기지만, 장담하지 않는다. 현재로는 나를 여러모로 실험하고 있다고 여기고 그 실험의 경험을 통해 어떤 형태로든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거라고 기대할 뿐이다. 꾸준히 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바라는 것 하나 없다. 다만, ‘여러 형태의 좀 더 나은 사람’ 중에서도 그 형태를 선택할 수 있다면, ‘이러한 춤 앞에서 좀 더 밝게, 그리고 자주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아주 아주 조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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