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ris May 21. 2023

초보자들의 도우미가 되어 다시 쓰는《1막 1장》

5막 n장. - 춤의 의미.

린디 초중급 강습이 마무리되었을 때, 쌤이 올린 메시지 하나를 보았다. "춤 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 처음에 춤을 췄던 이유를 꼭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짧은 문장이었다.


 '처음에 이 춤을 췄던, 그리고 앞으로 춤을 춰 나갈 이유가 무엇일까?'


이 짧은 메시지 하나가 한동안 뇌리에 박혀 떠나질 않았았다. 그런 와중에 지터벅 도우미를 하면서, 바로 눈앞에 처음 춤을 접하고 있는 분들의 모습을 보았고, 2개월간 이들과 함께하면서 겪은 경험을 통해 그 이유를 다시 찾아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도우미로서 그분들을 보며 겪었던 생각이나 느낌을 주르륵 쓰다 보니 조금 긴 글이 되었다. 비슷한 기억들과 경험은 시간과 상관없이 초현실주의 그림과도 같이 하나의 기억에 중첩되어 뭐가 먼저였는지 잘 모르게 될 때가 있듯, 이 글 시점은 이따금 어느 시기(첫 주차 기억이 가장 많지만)를 가리키는지 잘 알기 어렵게 적어나갔다. 그 까닭은 우리의 삶은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경험이 중요하기 때문이며, 그것이 중첩되는 경험일 때, 우리의 추억은 시간과 상관없이 비슷한 것들을 한꺼번에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3월의 어느 날은 체감상 다른 날보다 더 추웠다. 덜덜 떨릴만한 추위는 아니었지만, 추위를 극심히도 싫어했던 나는 이 정도 추위에도 못 견디겠다며 옷을 여미고 다리까지 뒤덮는 롱패딩을 입고 밖으로 나섰다. 차라리 더운 게 좋았다. 찜통 같은 더위는 참을 수 있어도 추위는 참기가 힘들었다. 따뜻하려고 몸을 여러 옷감으로 꽁꽁 싸매는 것도 싫은 일이었다. 수년 전부터 롱패딩이 유행이 된 건 정말 기쁜 일이었다. 옷을 전보다는 덜 꽁꽁 싸매면서도 따뜻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몸으로 느껴지는 추위는 마음마저도 꽁꽁 싸매 어디를 나가는 것도 포기하게 했다. 나가고 싶지 않다. 그냥 보일러 빵빵하게 틀어놓은 집 안에서 방바닥이나 뒹굴대며 그냥 곰이 되고 싶다. 이러한 욕구는 봄이 와서도 계속되고 있었다. 정리되지 않은 방 안에서, 정리되지 않은 오만가지 생각들을 들여다보다가 어느 시간에 이르자 추운 날씨의 문밖을 도망치듯 나섰다. 더러운 방구석을 치워야 내 복잡한 머리도 정리될 것 같았지만, 이번에도 번번이 그건 실패로 끝났다.

‘사람들을 초대해야겠어. 누군가 저 안으로 들어와야 쪽팔려서라도 치우지. 그렇지 않으면 방바닥만 긁어대고 방을 치워야지, 오늘은 꼭 해야지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잖아?’

내 인생이 이렇게 된 것도 우왕좌왕하다가 복잡하게 어질러진 마음을 치우지도 못한 탓 같았다. 모두가 누군가를 마음에 들이고 무언가를 소유하고 또 무언가를 정리하는 동안, 나는 그 자리에서 누워버리고 시간만 흘려보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난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에 쓰여 있는 글귀처럼 이미 어린 시절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아버렸던 것 같았다. 항상 불행을 느끼는 것들은 일어난 뒤에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느끼는 사후확증편향이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아는 것과 그렇게 느끼는 건 다른 일이었다. 

하여튼 이런 생각을 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건만, 그날은 모든 것들 날씨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개 같은 날씨가 마음까지도 이렇게 만드는 거라고…. 뭐, 따뜻한 봄이 오면, 분명 또 그러겠지. 날씨가 개 같이 좋아서 마음이 더 허전하다고.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던 것처럼, 나는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것이 개 같을 때가 있었다. 

자전거 페달을 조금 더 세게 돌리자, 롱패딩이 덥게 느껴질 만큼 몸에서 열이 올라왔다. 달리기 시작하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그저 목적지까지 달려가는 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나쁜 충동이 들 때는 몸을 어떻게든 바삐 움직이는 게 좋았다. 더구나 지금 달려가는 곳은 몸을 바삐 움직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조금이나마 내가 더 따뜻해질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기어를 바꿔 주변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더 세게 페달을 돌렸고, 질주를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을 것 같았던 마음이 그곳에 다다를수록 단풍나무 가득한 숲이 되어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계단을 오르면서 나보다 먼저 온 이들에게 먼저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인사를 받은 이는 조금 어색한 듯 이에 응답한다. 다시 잠깐 계단에 머무는 침묵…. 서로 5층을 천천히 오르는 데에만 집중한다. 

새로운 지터벅 친구들이 오는 날이다. 처음 이곳에 왔던 9개월 전의 날을 기억한다. 그날도 지금처럼 자전거를 타고 왔었다. 6월 말의 날씨답게 조금은 여름같이 더운 날이었고 나는 지금처럼 검은색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왔었다. 조금 늦어서 헐레벌떡 왔었고 5시가 조금 넘어 도착하니 사람들이 갈색의 바닥 위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처음 스윙 댄스를 접하게 된 바로 그때, 그리고 바로 지금. 벌써 ‘조금 있으면 1년이 된다니… 우리 참 잘 버텨왔구나!’ 바로 지금 눈앞에는 아무것도 모르던 그때, 나의 선생님이었던 친구들과 도우미였던 친구들, 그리고 동기들이 있었다. 이제는 함께 같은 스텝으로 수업을 듣고 있었다. 물론 실력이야 다르지만, 그래도 내 바로 옆에, 앞에, 그리고 맞은 편에 내가 이 장소 위에서 9개월 동안 가장 아껴왔던 친구들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반가워서 먼저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인사보다도 그저 가서 잘 지냈냐고 물어보고 어깨동무를 하거나 안아준다. ‘함께 수업을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의 안정이 느껴질 수 있을까?’ 함께일 때 우린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던 어떤 영화 포스터의 글귀처럼, 무슨 우스갯소리를 해도 받아줄 이들이라 느끼니, 마음이 편안했다. 수업을 듣는 동안, 반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반가운 한 사람을 만나면, 눈앞에 웃는 얼굴이 있으면서도 영화나 광고 디자인에서처럼 그 존재가 여러 시간과 배경에서 중첩되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내 9개월간의 기억의 사진첩에 존재하는 존재의 모습은 여러 형태로 각인되었다가 이내 갈색의 마루 위에 휘도는 수많은 그림자가 되어 아련하게 사그라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버벅대는 내 모습에 기가 죽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다가도 그저 그냥 그 존재들만 발견하면 다시 한번 시도해봐야겠다고 다짐을 하게 된다. 이들은 추억을 머금은 종합 비타민 같은 존재들이었고, 그 비타민을 먹을 때면 다시 힘을 얻곤 했다. 

우아한 두 분의 린디 초중급 수업을 마치고 단체 사진을 찍고 있으니 멀리서 지터벅 쌤들이 신을 갈아신고 들어왔다. 모두 수고했다고 손뼉을 치는 둥 마는 둥 하고 얼른 문 쪽으로 달려가 새로운 친구들이 받아갈 이름표를 정리하고 테이프를 가져와 벽에 오늘 할 커리큘럼이 담긴 종이를 꺼내 벽에 붙였다. 

“어디까지 배우셨어요?”

지터벅 졸업 공연이 끝나고 새로운 지터벅 멤버들이 들어와서 소셜을 할 때, 매번 물어보는 게 바로 이 질문이었다. 그리고는 슬쩍 벽에 붙은 저 커리큘럼 표를 봐주고 잘 못 춰도, 그냥 스텝만 밟아도 괜찮다는 듯 온화한 미소와 함께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며 춤을 춘다. 처음 상태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온전히 자기의 발만 보는 데 바쁘다. 그러면 나는, “발을 보지 마시고, 상대의 얼굴이나 인증 혹은 어깨너머를 보세요.”라고 웃으며 알려준다. 

불과 몇 개월 전, 막 지터벅을 끝냈을 무렵의 그런 소소한 기억들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한번은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 자기도 그렇다며 박장대소를 했다. 나의 기억의 바구니에는 그렇게 큼직큼직한 존재들이 우선 자리를 차지하고 남은 부분을 이러한 소소하지만 함께 공감하고 웃을 수 있는 기억들로 채워갔다. 마치 퇴적층처럼 그렇게 한 층 쌓이고 나면 다시 그 위로 새로운 큼직큼직한 기억을 쌓고 또 다른 소소한 기억들로 가장자리를 채우게 되겠지? 그게 단단히 굳어지고 어느 날 그 퇴적층을 들여다볼 때, 우리는 그것을 추억이라 부를 수 있게 될 것이다. 추억은 모든 것들을 다 들여다볼 수 없으나, 그때, 그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바로 그 단층, 조금은 변성된 기억을 더듬어 그 당시 있었던 이야기를 엮어가게 되는 바로 그런 게 추억이 아닐까? 새로운 지터벅 친구들을 만나고 그들을 위하여 기꺼이 도우미가 되는 활동이 어쩌면 하나의 퇴적층이 끝나고 새로운 기억의 층을 만들어갈 시기인 듯했다. 

어떤 소중한 이들이 내게로 다가와 큼직한 기억과 소소한 기억으로 쌓이게 될지 기대하면서도, 나 역시 사람인지라 어쩌면 놓칠지 모를 다른 추억들, 이를테면 함께했던 동기들과 이전처럼 단단히 추억을 쌓지 못하게 될 아쉬움, 린디 하퍼로서 좀 더 내 역량을 발전시키지 못할 게 분명한 아쉬움, 3~5시 새로운 선생님들과 배울 린디 수업에 복습을 충실히 하지 못하게 될 아쉬움, 그 밖에도 도우미 활동에 시간을 할애하게 됨에 따라 발생하게 될 아쉬움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문득 어색한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에 문득,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졸업’의 영화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커리큘럼을 붙인 흰 벽 기둥 앞에서 그 마지막 장면의 주인공처럼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문앞으로 돌아가 전보다 더 밝게 웃으며, 처음 갈색의 플로어 위를 밟을 이들에게 명찰을 나눠주었다. 



‘진짜 좋아서 추는 춤은 저절로 미소가 번지지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상대에 대한 예의로서라도 미소를 띠는 게 좋다.’ 

새로운 친구들과 만나기 전, 아니 이미 그들과 만나고 나서도 종종 우리는 쌤들과 이러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처음 춤을 배우는 몸치(?)들을 어떻게 춤의 세계로 유도할 것인가가 대화의 중심 주제였고 미소와 칭찬이 그 주제의 핵심을 이루는 단어가 되곤 했다.

춤을 추고 얼마 되지 않아서 느낀 점 중 하나는 상대의 미소가 나의 동작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점이었다. 춤을 추면서 상대가 나를 향해 어떤 정서를 가졌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가장 큰 근거는 상대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서 어떤 표정도 없을 때, 어떤 동작을 시도해보기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상대가 한결 편안한 모습으로 미소를 띠고 있을 때, 나의 춤 역시 조금은 더 자신감이 생기고 동작도 활발해졌으며 함께 웃으며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고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표정의 변화는 그처럼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떤 식으로 웃어야 하는지를 잘 몰랐던 것 같다. 어쩌면 눈앞에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늘 변함없이 웃어주는 방법 자체를 잘 몰랐던 듯하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이따금 농담이나 하면서 웃을 줄 알았지, 이처럼 나의 영역 안으로 사람을 들여 예의와도 가까운 미소를 띠는 것, 특히 마스크를 쓴 상태에서는 눈웃음을 짓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진정성 혹은 즐거움이라는 정서를 담지 않고서 그저 웃기만 하라는 말은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나의 액션이 눈앞에 있는 상대의 반응을 끌어낸다는 점에서 내가 웃을 때 상대 역시 웃을 수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아주 오래전, ‘스피노자의 뇌’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우리의 정서적 반응이 신경 생물학적으로 어떤 메커니즘을 가졌는지를 밝히는 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뭐, 기억이 나는 건 별로 없지만, 마음이 신체적-정서적 반응을 만든다는 통설과는 달리 신체적-정서적 반응이 마음을 이루기도 한다는 걸 증명하려 했던 것 같다. 말하자면, 웃음이라는 장치는 나의 내면에서 외부로 표출되기도 하지만, 웃음을 일부러 표출하면서 내면으로 전이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단순하게는 ‘웃는 표정을 하면 즐거워진다.’라는 정서 반응에 관하여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책이기도 하다. 또 하나 배운 것은 미소는 중요하다는 일반적인 믿음보다도 그 미소가 내가 생각하는 양의 미소보다 상대가 인지할 수 있을 만큼의 크기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아무리 미소를 짓는다고 하더라도 상대가 그것을 바로 볼 수 없다면, 상대 역시 나를 향해 미소지어주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어쩌면 많이 간과하고 있지만, 미소 역시 연습이 필요한 부분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상대는 내 미소를 알고 있지만, 정작 나는 내가 어떤 미소를 짓고 있는지, 춤을 출 때 어떤 식으로 상대를 바라보는지 알 수 없으니까 말이다. 

여하튼, 나는 그러한 미소, 그것도 단지 예의로서가 아니라 마음 어딘가에서 어쩔 수 없이 배어 나오는 편안한, 그리고 내가 그 시절 나 자신도 모르게 상대에게 그토록 원했을, 그러한 미소를 한 껏 담은 뒤, 상대의 손을 잡아 마법의 고리를 만들었다. 더구나 이번에는 팔뤄가 부족하여 팔뤄가 되어 내 손등을 하늘로 향하게 하고 고리를 만들었다. 손끝에 감지되는 리더들의 굳은살과 딱딱한 지문들, 긴장한 힘이 느껴진다. 조금 긴장한 듯, 땀과 체취도 느껴지기도 한다. ‘아… 춤을 추기 위해 팔뤄들이 처음 손을 잡으면 이런 감각을 처음 배우겠구나.’

나와 손을 맞잡은 리더들은 아까보다는 한결 편한 듯 미소를 띤다. 아직은 잘 모르는 이성과 눈을 마주치는 것도, 손을 맞잡는 것도 어색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보다는 내가 편하긴 하겠지. 더구나 팔뤄들도 긴장했을 테니 서로 웃기도 어렵겠지.’ 그러한 생각에 한결 편안한 미소를 보여주며 인사를 건넨다. ‘훗, 이게 바로 경험자의 여유이기도 하겠지.’ 삐걱거리면서 몸을 움직이는 게, 마치 로봇 같았다. 불과 몇 개월 전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나기도 했다. ‘점점 나아지고 이따금 좌절도 했다가 졸업 공연을 마칠 무렵이면 기쁨과 감동의 웃음을 띠겠지. 그리고는 다소 공허감을 느끼다가 마음을 다잡고 강습을 듣겠고, 다시 조금 좌절, 그래도 연습, 또다시 시간이 흐르고 졸업 공연 후 조금 나아지고… 또다시 새로운 수업에서 새로운 것들을 배우며 어려워하고…’ 내디딘 이 사람의 첫 발자국이 끊이지 않고 계속 내가 몇 개월간 걸어간 길을 똑같이 걸어간다면, 아마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미래를 보는 것인가? 손끝으로 느껴지는 심지와 눈빛에서 눈앞에 있는 존재의 미래마저도 맞출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필연적으로 겪어가게 될 큰 흐름 사이에 어떤 우연이 이들에게 다가와 입을 맞추게 될지 궁금했다. 바라는 건 그 우연이 기쁜 일이 되거나 힘들거나 서글픔을 주더라도 동기들끼리 잘 뭉쳐 이겨나갈 수 있게 되기를, 혹은 전화위복이 되어 자신을 더 단단히 만들어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우리도 그랬으니까. 결국, 다 잘되지 않았던가? 다 괜찮아지지 않았던가? 뭐, 그러면 된 거지. 내일 잘 안되다가도 내일모레 혹은 그다음 날이 되면 괜찮아질 테니까.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인상은 제각각 달랐다. 나도 사람이니까, 마냥 좋다고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좋은 점 중 하나는 아마도 하나의 인상으로 판단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인내심이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첫인상에 따른 판단은 보류하고 인상이 나처럼 사나워 보이거나 많이 경직되어 보이는 분들에겐 좀 더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 발 보지 마시고 저를 보세요. 락스텝, 스텝엔, 스텝!” 상대가 나를 보면서도 계속 스텝을 밟을 수 있도록 입으로 계속 락스텝과 스텝, 스텝을 불러주었다. 잘 안되는 부분은 전체 동작을 이어서 보여주기보다 한 동작씩 끊어서 하고 그 부분이 익숙해지면 그다음 스텝과 붙여서 연습했다. 그 시절 내가 도우미로부터 배웠던 식으로 적절한 칭찬과 친근한 답변, 그리고 하나의 동작을 나눠 짧은 시간 동안 안내했다. 그 당시, 이름은 밝히지 않겠지만, 한 팔뤄 도우미는 지나칠 정도로 경쾌한 성격과 말투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특유의 말투에 이내 긴장하고 있던 마음이 풀리고 조금은 더 쉽게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오빠, 잘하네! 이건 이런 식으로 해야 하는 거야. 한번 해봐.” 언제 절 보셨기에 편하게 말을 놓으시냐고 할 겨를도 없이 나는 그 도우미의 말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고 같이 웃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계속 존댓말을 쓰든 말든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편한 말투로 말하고 있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너무 튀지 않으면서도 강습생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도우미의 역할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물론 내가 그렇다고 반말을 쓰면, 그녀와는 달리 이 사람이 정신이 나갔나 싶을 테니, 나는 내 방식대로 편안하게 해주고 싶었다. 매일 긴장하며 한 주를 보냈을 테니, 하루쯤은 편안함에 이르러도 괜찮지 않겠는가? '잘할 수 있을까? 내가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강습생들에게 그런 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아무리 말해도 귀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도우미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웃음을 보이고 편안한 말을 건네고 사소한 실수에 함께 웃으면서 즐겁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걱정하지 말아요! 그저 함께 웃으면서 즐겨요!’

우리는 다 사실 어린아이이다. 성인이라고? 아니, 뭔가를 배우는 걸음마 단계에서는 누구나 다 어린아이이다. 린디로 올라가면 초등학생, 그다음은 중학생, 그다음은 고등학생… 물론 누군가는 한순간에 그 단계를 뛰어넘기도 하겠지만, 대체로 모든 이들은 이러한 과정을 밟는다. 아이 한 명을 키우기 위해서는 온 공동체가 보살펴야 한다던 아프리카 어느 지역의 속담처럼 이곳이 새로운 아이를 키워 이 공동체를 대표할 수 있는 일원으로 키워나가기로 했다면, 모든 이들은 이 아이들이 잘 커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배려해줘야 할 것이다. 

나는 이따금 자유롭고 멋진 춤을 생각할 때, 영화 ‘빌리 엘리어트’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발레를 배우고 싶어 하는 한 소년이 발레 학교 면접에서 자유롭게 춤을 춘다. 짜임새 있는 구성도 아닌 거 같고, 대단히 멋지다는 생각이 드는 움직임도 아니지만, 그는 한 마리의 새처럼 자유롭다. 음악과 자신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 장면이 춤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면접이 다 끝나고, 한 면접관이 나가려는 그를 향해 묻는다. “네가 춤을 출 때 어떤 기분이 드니?” “모르겠어요.” 실망한듯한 면접관의 얼굴을 보여주지만, 빌리는 이어서 대답한다. “그냥 기분이 좋아요. 조금은 어색하기도 하지만 한번 시작하면 모든 걸 잊게 되고…. 그리고…. 사라져 버려요.” 면접관들은 그 말에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본다.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아요. 내 몸 전체가 변하는 기분이죠. 마치 몸에 불이라도 붙은 느낌이에요. 전 그저…. 한 마리의 날고 있는 새가 되죠.” 한 면접관이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다른 면접관을 곁눈질로 바라본다. “마치 전기처럼….” 빌리는 한숨을 한번 쉬며, 잠깐 상념에 젖고는 다시 한번 말한다. “네…. 전기처럼요.”

글을 쓰면서 느꼈던, 최고의 감정 역시 그러했다. 내가 글을 쓰기로 결정했을 무렵,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노라면 내 몸이 붕 떠오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내 몸은 그 자리에 없으며 오로지 키보드에 붙어 있는 나의 손 만이 뇌 신경과 바로 연결된 것 같은, 그래서 그냥 생각하는 대로 글이 써지는 듯한 기분이 든 적이 있다. 그런 기분이 들면 자판을 두드리는 것을 놓을 수가 없게 된다. 

글을 쓸 때도 그러하지만 요즘에는 이따금 춤을 출 때, 나는 저 영화에서 빌리가 느꼈던 감정을 종종 비슷하게 느낀다. (글은 지상으로 내려와 정신을 차리고 글을 고쳐 나갈 때가 진정 중요한 순간이며 또한 고통스러운 순간이다) 비록 잘 추는 것도 다양한 패턴을 활용하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 내가 사라져 버리는 느낌, 그저 그냥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하게 되는 느낌, 눈앞에 있는 상대의 웃음밖에 보이지 않는 그런 느낌. 내 몸 전체가 변하는 기분이다. 글을 쓸 때나, 춤을 출 때나 사실 약간 결은 다르지만, 그러한 내가 사라지는 기분을 느끼게 될 때,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고 하늘로 붕 떠올라 오로지 나의 영혼과 눈앞에 보이는 존재의 영혼만을 느끼게 될 때, 오로지 희열과 감동만 남는다. 그 감정은,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 나의 발이 지면의 감촉을 느끼게 될 때까지도 여운이 사라지지 않는다. 한 번 그러고 나면 세상 모든 것이 다 사랑으로 변한다. 모든 것을 다 용서하고 싶고 모든 것들에 다 감사하고픈 기분, 그리고 그 기분을 누군가도 느껴볼 수 있도록 하고픈 기분이 든다. 

춤의 본질이라는 게 무엇일까? 어쩌면 인간은 새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딱딱한 지면에서 벗어나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몸짓으로 자신의 감정을 그 하늘 위에 그리는 것, 말과 이성이 필요하지도 않고 그저 나의 내면에 있는 나 자신도 표현할 수 없는 모든 감정을 쏟아내는 것, 그렇게 하여 나 자신을 위로하는 것, 자신을 위로하고 어루만질 수 있는 것, 다른 사람이 결코 해줄 수 없는 내면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감정을 한순간이나마 표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춤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 바로 카타르시스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음악을 들으며, 우리의 몸 자체가 악기가 되고 선율이 된다. 니체는 “우리는 음악을 근육으로 듣는다”라고 말했다. 의식하지 않아도 우리는 음악 속에서 어떤 이야기를 발견하고 몸을 움직인다. 그리고 나의 근육의 극대화가 춤을 통해 드러난다. 그중에서도 자유롭고 신나는 재즈 음악에서 자유롭게 나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스윙 댄스이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이유는 모르겠다. 아마도 머릿속에 5층에 있던 저 갈색의 플로어가 떠올랐고, 그 위에서 자기 나름의 그림을 그리던 이들이 떠올랐고, 이들과 함께하며 여러모로 운이 좋았던 나 자신의 지난날들이 떠올랐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아니, 그냥 울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슴의 두근거림처럼 우는 것도 나의 의지와 상관없을 때가 있으니까. 뭐, 나도 잘 알지 못한 사이에 환상들이 눈앞에 떠올랐고 그중 사소한 장면 하나가 눈으로 보기 힘든 아주 작은 바늘이 되어 심장을 찔렀지 않을까 싶다. 요즘에는 나이를 먹고 노안이 와서 그런지 보이지 않는 그런 작은 바늘이 시시때때로 나를 찔러오곤 한다. 



다시 기억의 틈으로 돌아가 나는 팔뤄가 되어 상대의 손을 맞잡으면서 말했다. “아래를 내려다 볼 게 아니라 음악을 들으면서 스텝을 밟아보세요. 상대를 바라보며 상대의 움직임에 반응해 보세요.” 

몇 주차 기억인지도 모르겠다. 첫 주차일까? 2주 차일까? 이렇게 말하면서 나 스스로 계속 의문을 던지고 있었다. ‘음악을 듣는다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음악을 듣고 있는 게 아닌가?’ 상대와 계속 스텝을 밟으면서도 그 의미를 다시금 되씹고 있었다. 몇 번이고 물었고 어쩌면 몇 번이나 답변을 찾았던 것 같은데 마치 처음 질문을 던지는 듯한 생소함으로 나는 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마치 어제까지 확신하고 있던 어떤 가설을 오늘 아침 기꺼이 내 던지는 과학자처럼 나는 다시금 나만의 의미를 찾고자 했던 건 아닐까 싶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는 ‘음악을 듣는다’라는 의미와 ‘그림을 본다’는 것의 의미를 함께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림을 본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시각이라는 감각 기관으로 들어와 미와 추를 판단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단순히 그 안에 담긴 의미가 무엇일지 과장하여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마치 탐정이 어떠한 사실을 기반으로 추리를 하여 사건의 맥락을 파악하고 결국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거나 사건을 해결하듯, 그림을 좀 더 재미있게 감상하기 위해서는 그런 태도로 보아야 한다고 믿는다. 어떠한 범죄가 범죄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충동이나 무의식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이 있듯, 그 작품의 해석이 작가의 의도와 상관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그림을 감상할 때, 작품의 표면 너머로 예술을 통해 발산되는 내재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여하튼, 말하고 싶은 바는 깊은 의미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우선은 표면에 드러나는 사실을 되도록 객관적으로 분석하면서 점점 깊게 들어가야 한다는 점이다. 그림의 가까운 거리에는 무엇이 있고 먼 거리에는 무엇이 존재하고 있는지, 구도와 배치는 어떠한지, 어떤 색을 썼는지, 질감은 어떠한지, 인물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으며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또한 나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등등 있는 작가가 캔버스 위에서 그린 것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해 나가다 보면 어느새 숨겨진 의미들이 하나둘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물론 이따금 배경 지식이 필요한 것들도 있고, 때로는 심리적 해석이 필요한 때도 있다. 도상학이든, 도상 해석학이든, 인문학이든, 심리학이든, 또는 역사학이나 어느 시대의 이데올로기 마저도 예술은 이따금 활용을 요구한다. 물론 어느 경우에는 작가의 의도와 상관이 없는 해석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한 해석이 충분한 근거가 있고 예술의 한 단면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러한 해석조차 충분히 용인된다. 그 까닭은 예술은 이따금 의도를 넘어서 작가 자신도 파악하기 어려운 깊은 내면이나 무의식을 표출하기도 하거니와 내가 어쩌지 못하는 거시적 환경의 영향을 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가서 ‘음악을 듣는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나아가서 ‘음악을 표현한다.’라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들, 음악적 표현인 춤은 ‘정답이 없다’라고 하는데, 정말 정답이 없는 것일까? 그림은 내 심리 상태를 들여다보고 그 자체를 표현하거나 그리고자 하는 대상에 나의 영혼을 새겨 넣음으로써 표현할 수 있다. 춤은 음악을 듣고 그 음악이 자신의 내면과 결합하여 그려지고 있는 것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을까? 몇 가지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음악을 듣는다’라는 것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그림을 본다’라고 할 때, 거기에는 한마디 말이 더 붙어야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제대로’라는 말이었다. 물론 사람마다 보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라는 말은 그림을 보는 일종의 ‘태도’로서, 건성건성, 대충대충의 반대말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자신만의 확고한 태도나 관점을 갖춘 이들에게는 보는 방식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분명 필요한 자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제대로’란, 마치 스윙 댄스를 가르치는 사람마다 자신의 스타일과 방식은 있을지언정 그 기본은 비슷하며, 배우는 이들 모두가 정확하고 충실하게 그 동작을 따르길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음악을 듣는다’ 역시, 중요한 건 ‘제대로’가 아닐까 싶었다. “음악을 들으세요!” 가 아니라 “제대로 음악을 들으세요!” 가 되어야 하며, 그림을 제대로 보기 위한 배경 지식이나 그림에 표현되는 구도, 색깔, 사물, 질감, 표현 등등의 사실을 기반으로 이해해야 하듯, ‘제대로’ 듣기 위해선 스윙 재즈라는 음악 자체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건 깊은 식견만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우리가 그림에 대한 깊은 조예나 지식이 없더라도 그 자체를 진지하게 감상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려는 태도만 있어도 존중받듯, 음악 자체를 진지하게 감상하고 이해하려는 태도가 중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거기에 지식까지 쌓이면 바로 다른 예술에서도 그러하듯, 탁월한 식견이나 조예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이르자 단지 운동이나 산책할 때 듣던 스윙재즈 음악을 좀 더 진지한 태도로 들어보고 그 음악이 표현하고 있는 이야기를 그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그림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 같아요?” 이따금 내가 물어봤던 누군가에게 물어봤던 그 질문이 다시 내게로 돌아와, “이 음악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라고 묻는 듯했다. 그리고 춤은 음악이 표현하는 이야기를 몸짓으로 표현하는 것이겠지. 문득, 오래전 국어 시간에 배웠던 조지훈의 ‘승무’라는 시가 떠올랐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얇은 무명실로 엮은 하이얀 고깔을 고이 접어서 나비처럼 움직이는 모습으로 춤을 추고 있을 때,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 보이도록 할 때,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개 별빛에 모두 오도록 할 때,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으로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 할 때… ‘이 존재는 어떤 음악을 듣고 있기에 이런 춤으로 표현하고 있을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건 분명 대체로 느리고 구슬프며 때로는 한마저 서린 노래일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그 음악을 찾아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한참 지나서야 피리, 대금, 해금, 장구, 북으로 이루어진 그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참 재밌었던 건, 그 악기들이 주는 특유의 음색이 할머니가 부르는 구슬프고 오래된 노래의 곡조와 유사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저 스윙 재즈 음악과 함께 펼쳐지는 춤의 향연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조지훈의 시처럼 그 이야기 속에서 적절한 음악이 느껴질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 승무가 인간 만사의 기쁨과 슬픔, 한과 같은 정서를 표현한다면, 나는 이 스윙 재즈 음악에서 어떤 정서를 멋지고도 조화롭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나의 동작과 다음 동작을 어떻게 상대에게 맞춰 부드럽고 의미가 있도록 연결할 수 있을까? 

나는 또한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노래를 부를 때 그 음악에 맞춰 감정을 충실히 실어 불러야 잘하는 것이듯, 춤을 출 때도 그 음악에 맞춰 연기해야 옳겠구나 싶었다. 내가 슬픈 일을 겪지 않았다고 한들, 슬픈 노래를 부를 때에는 진정성이 담긴 듯한 슬픈 정서를 담아야 옳듯, 스윙 댄스 자체의 특성이 빠른 비트의 댄스이기 때문에 기쁨을 연기하는 것이 옳아 보였다. 말하자면, ‘진짜 좋아서 추는 춤은 저절로 미소가 번지지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상대에 대한 예의로서라도 미소를 띠는 게 좋다.’라는 것보다도, 스윙 댄스라는 장르 특성상 음악을 표현하는 방식으로서 웃음을 보이는 것이 좀 더 적절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즉, 웃음은 상대를 위함보다도, 먼저 나를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만약, 내가 추고 있는 게 이게 승무에 나오는 음악이나, 단조로 구성된 슬픈 발라드 음악이었다면, 결코 웃어선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제야,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조금은 풀린 듯했다. 

스윙 재즈라는 녀석이 궁금해 집에 있는 책 중에 몇 가지를 훑어보았다. 그중 한 책에서 블루스 재즈에 관한 내용이 길게 나와 있었고 뒤이어 스윙 재즈에 관한 내용을 짧게 소개하고 있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기악곡을 연주하는 것 이외에 빅 밴드는 흔히 재즈 가수를 선보였으며, 가수는 곡 전체에 걸쳐서 노래하는 경우도 있었고 나중에 나오는 코러스 중 하나에 등장할 수도 있었다. 빅 밴드 레퍼토리 가운데 다수는 팝송을 포함했는데, 이 경우 밴드는 가수를 반주하는 동시에 밴드의 어떤 한 섹션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재치 있고 화성적으로 대담한 편곡을 통해서 노래를 부연했다. 세련되게 잘 수행된 편곡과 효과적인 재즈 리듬의 결합은 스윙이라고 알려지게 된 음악을 만들어냈다. 스윙은 나오자마자 미국 대중에게 큰 인기를 얻었으며 전국에 걸친 댄스 열풍에 불을 붙였다. 1930년대에는 스윙 밴드가 폭발적으로 불어났으며, 이는 재즈의 세계에 발을 디딘 새로운 백인 밴드, 특히 토미 도시와 글렌 밀러가 이끄는 밴드에 의해 고양되었다. 여전히 인종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두드러지는 시대에, 백인 밴드는 보다 손쉽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Donald J. Grout 외, 그라우트 서양음악사 제7판(하), 305p.>



내친김에 요즈음 나와 가장 많은 대화를 하는 친구인 ‘CHAT GPT’에게 스윙 재즈에 관하여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왜 재즈에 스윙이라는 말이 붙었어? 스윙이라는 말은 회전이잖아?”

“재즈에서 스윙이라는 용어는 회전이 아니라, 음악적인 용어로 사용됩니다. 스윙(Swing)은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있는 음악에서, 각 박자의 길이와 강도를 조금씩 바꾸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스윙된 리듬은 일정한 박자와는 달리, 부드럽고 느린 느낌을 줍니다.

스윙이 재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는, 재즈가 처음 등장했을 때 스윙 리듬이 중요한 요소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1920년대 미국에서 등장한 재즈는 아프리카 음악과 유럽 음악이 결합되어 만들어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아프리카 음악에서 비롯된 리듬 중 스윙 리듬이 재즈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스윙된 리듬은 당시 사회 상황과도 어울려, 흑인들이 참가하는 춤장에서 대중적으로 유행하게 되었고, 이후 스윙 재즈라는 장르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재즈에서 스윙이라는 용어는 음악적인 용어로 사용되면서, 재즈와 스윙은 상호 깊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스윙 재즈와 블루스 재즈의 차이점이 뭐야?”

“스윙 재즈(Swing Jazz)와 블루스 재즈(Blues Jazz)는 둘 다 재즈 음악의 장르이지만, 서로 다른 역사와 음악적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윙 재즈는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에 미국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한 장르입니다. 스윙 재즈는 빠른 템포와 북과 베이스의 강한 리듬감, 그리고 솔로 연주에 중점을 둡니다. 또한 빅 밴드(Big Band)라는 큰 악단을 구성하여 연주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Duke Ellington, Count Basie, Benny Goodman 등이 있습니다.

반면 블루스 재즈는 블루스 음악과 재즈 음악이 결합된 형태입니다. 블루스 재즈는 느린 템포와 블루스 음악의 멜로디와 하모니를 기반으로 하며, 고급스러운 소리와 더불어 노골적인 감성을 담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B.B. King, John Lee Hooker, Etta James 등이 있습니다.

따라서 스윙 재즈는 빠른 템포와 대규모 악단의 연주, 솔로 연주에 중점을 두며 블루스 재즈는 블루스 음악과 재즈 음악이 결합된 느린 템포와 고급스러운 소리를 중시하는 장르입니다.”

“스윙 재즈와 블루스 재즈의 화성악적 구조도 다르겠네?”

“네, 스윙 재즈와 블루스 재즈의 화성악적 구조도 서로 다릅니다.

스윙 재즈는 대개 32박자나 48박자와 같은 긴 박자 구조를 사용하며, 대부분의 곡은 32박자 형태의 스윙 댄스를 위해 작곡되었습니다. 이 때, 대개 박자 구조를 따르는 기본 리듬 패턴 위에 화음과 멜로디가 구성됩니다. 대부분의 스윙 재즈 곡은 기본적으로 대명사적인 4-4 타임(TIME)을 사용하지만, 특정한 리듬 패턴과 템포 변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리듬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반면, 블루스 재즈는 대개 12박자 형태의 박자 구조를 사용합니다. 이 때, 12박자 중 8박자는 강조되고, 4박자는 보조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박자 구조 위에 블루스 스케일과 블루스 프로그레션(Blues Progression)이 적용되며, 대개 블루스 음악의 특징인 "12온스 블루스(12-bar blues)" 형태로 작곡됩니다. 이 때, 블루스 재즈에서는 악기의 솔로 연주나 보컬의 어디까지나 기존의 블루스 음악에서 파생된 형태이기 때문에, 곡의 화성악적 구조는 상대적으로 간단한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스윙 재즈는 대개 긴 박자 구조와 다양한 리듬 패턴을 사용하며, 블루스 재즈는 대개 12박자 형태의 박자 구조와 블루스 스케일과 블루스 프로그레션을 사용합니다.”

“스윙 댄스가 32박자 형태로 정립된 까닭이 있어?”

“스윙 댄스가 32박자 형태로 정립된 이유는 주로 미국의 1920년대와 1930년대 사이에 대중음악에서 스윙 재즈가 대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스윙 재즈는 대개 긴 박자 구조를 사용하며, 대부분의 곡은 32박자 형태의 스윙 댄스를 위해 작곡되었습니다. 이 때, 대개 박자 구조를 따르는 기본 리듬 패턴 위에 화음과 멜로디가 구성됩니다. 이러한 구조로 인해, 스윙 댄스는 대중적으로 매우 인기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1930년대에는 미국에서 대규모의 댄스 이벤트인 스윙 댄스 대회(Swing Dance Contest)가 열리기도 하였습니다. 이 대회에서는 대부분 32박자 형태의 스윙 댄스를 춤으로 삼았고, 이로 인해 스윙 댄스가 대중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스윙 댄스가 32박자 형태로 정립된 이유는, 스윙 재즈가 대세가 되었기 때문이며, 대중적인 댄스 이벤트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36박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거야? 왜 굳이 32박자를 고집했을까?”

“스윙 댄스에서 사용되는 32박자는 일종의 표준처럼 자리 잡은 것입니다. 32박자가 반드시 고집되어야 한다는 규칙은 없지만, 이전에 언급한 것처럼 대부분의 스윙 재즈 곡이 32박자 형태로 작곡되었고, 대중적으로 매우 인기 있었기 때문에 32박자가 스윙 댄스의 기본 구조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또한, 스윙 댄스는 대개 대규모의 댄스 이벤트에서 춤으로 삼았으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춤을 추기 때문에 일정한 박자 구조와 리듬이 필요했습니다. 이에 따라 32박자와 같은 일정한 박자 구조가 채택되어 스윙 댄스의 기본 구조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36박자와 같은 다른 박자 구조도 스윙 댄스에 적용될 수 있지만,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는 스윙 재즈 곡이 대부분 32박자 구조를 따르기 때문에, 32박자가 스윙 댄스의 기본 구조로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32박자는 어떤식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거야? 가령, 팝송의 경우 AABA 의 형식이라고 말을 하잖아?”

“32박자의 스윙 댄스는 일반적으로 8박자씩 4개의 섹션으로 구성됩니다. 각 섹션은 8박자로 구성된 두 개의 마디(meaure)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32박자의 스윙 댄스는 "8-8-8-8"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스윙 댄스의 각 섹션마다 리듬 패턴과 움직임이 다르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섹션은 대개 춤을 시작하는 부분이며, 두 번째 섹션은 첫 번째 섹션과 비슷한 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 번째 섹션에서는 대개 춤의 속도가 빨라지며, 네 번째 섹션에서는 다시 춤의 속도가 느려지면서 춤이 종료됩니다.

팝송과 같은 경우는 일반적으로 AABA 또는 ABAB와 같은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노래의 구성과 형태를 나타내는 것이며, 각 섹션의 멜로디와 가사, 하모니 등이 다르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스윙 댄스와 마찬가지로, 팝송에서도 각 섹션마다 구성이 다르며, 전체적으로 노래의 분위기와 흐름을 결정합니다.”

“스윙 댄스를 잘 하려면 음악을 잘 들어야 하겠네? 어떻게 하면 음악을 잘 들을 수 있을까?”

“네, 스윙 댄스를 잘 추려면 음악을 잘 들어야 합니다. 스윙 댄스는 음악의 리듬과 템포에 따라 춤을 추기 때문에 음악을 이해하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스윙 댄스를 잘 추기 위해서는 음악 감각을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음악을 잘 듣기 위해서는 먼저 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필요합니다. 스윙 재즈와 블루스 재즈 등의 스윙 댄스 음악은 독특한 리듬 패턴과 하모니, 멜로디 등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음악 장르와 구성 요소에 대한 지식을 쌓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음악을 들을 때는, 음악에 집중하고 감정을 담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음악이 전달하는 분위기와 감정을 느끼며, 그에 맞게 자연스럽게 춤을 추게 됩니다. 음악을 들을 때는 감정을 담아 듣고, 음악에 맞게 몸을 움직이는 것을 연습해보세요.

또한, 스윙 댄스를 잘 추기 위해서는 춤을 추는 과정에서 음악에 맞춰 움직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음악에 맞춰 움직일 수 있도록 음악을 들으면서 연습해보세요. 음악이 어떻게 움직임과 연결되는지 느끼면서,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것을 반복적으로 연습하면서 음악 감각을 기를 수 있습니다.” 

이따금 거짓말을 하거나 두루뭉술하게 이야기를 해서 저게 100% 정확한 정보인가에는 의문이 있긴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할 만했다.



강습이 끝나고 이들도 나처럼 소셜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소셜을 한다기보다 그냥 자리에 앉아서 경직된 채로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처음 이곳에 왔던 그 날, 음악에 맞춰 행복한 듯 춤을 추고 있는 이들을 보면서 내가 느끼던 신선함과 나의 어색한 춤 솜씨에 상대에게 민폐를 끼칠까 하는 두려움에 용기를 내어 춤을 청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그저 앉아 있었던 것처럼, 이들도 그런 감정으로 눈앞의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도우미로서 누군가에게 부탁해 그들 앞에 데려오면, 마치 외국인이 말을 거는 것처럼 손사래를 치며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고 말을 한다. 나는 괜찮다며, 그냥 다리만이라도 움직여 보시라고 이분들도 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왔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춤을 춰보시라고 권한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가수의 목소리가 끝날 무렵이면 또 부리나케 달려가서 다른 아는 이들에게 요청을 한다. 때로는 내가 춤을 먼저 청하고 음악이 끝난 뒤, 상대 팔뤄에게 “우리 지터벅 좀 부탁합니다!”라며 사정을 하기도 한다. 

어느 날,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세상을 보는 시야가 '| |'에서 '\ /' 이렇게 달라지고(그는 두 손을 눈 양옆에 대고 정확히 저렇게 표현했다), 모든 세상이 아이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내가 하는 일이 바로 그런 거 같아 조금 웃음이 났다. 도우미를 하면서 나 자신에게 쏟던 모든 연습과 노력을 거의 다 중단하고 이들에게 초점이 맞춰진 것이다. 뭐, 과장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두 달간의 사정이 그렇게 돌아갔기에, 이 활동이 끝나고 나면, 당분간 단호하게 나 자신을 발전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여하튼 시간이 흐르고 이들이 점점 더 소셜에 적응해 가면서 밝은 웃음을 보여갈 때, 나도 모르게 행복하고 뿌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특히, 어느 한 리더는 처음에는 조금 어리둥절하고 당혹스러운 모습을 보이다가 몇 주가 지나자 사진으로 간직하고 싶을 정도로 정말 행복해 보이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나는 그가 나보다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잘했다고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뿐만 아니라 그를 바라본 모든 이들은 내 생각에 공감하고 있었고 그를 향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분명, 거기에는 나이든 어른이 아닌, 때 묻지 않은 어린 소년이 있었다. 도우미로서 플로어에 섰던 첫째 날, '내가 이 5층에서 겪었던 감동과 인연을 그 친구들도 느낄 수 있을까?'라며,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이 그 순간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변화하는 모습과 춤을 출 때, 언뜻언뜻 보이는 소중한 웃음들이 켜켜이 내 기억의 한 바구니에 쌓여갈 때, 나 역시 그들을 위해 춤을 전파하는 복음의 사도가 되어가고 있었다. 

벌써부터 그 날들이 아련해진다. 아련함이라는 것은 시간과 상관있는 것인가? 시간이 지나면 더 아련해지는 것일까? 시간이 흘러야만 흐리게 보이거나 떠오른 것일까? 

시간이 흘러야만 아련해진다고 믿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시간이 충분히 흐르지 않아도 심지어 눈 앞에 있음에도 아련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하루가 지나면 망각해버리는 나의 어리석은 기억력 덕분에 흐릿한 기억들이 앞뒤 구분 없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올 때 나는 어느 시간의 선에서 발생한 일인지 깨닫지 못하고 모든 것들이 마치 아득한 옛날에 일어난 일인 것 마냥 여긴다. 그야말로 시간 위에서 어느 한때(Once upon a time)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당장 며칠이 흘러서라도, 옛날에 좋은 선생님 두 명이 있었고, 그때 이 주인공은 착하고 귀여운 다른 친구랑 함께 도우미를 하고 있었고 처음에는 누군가와 함께 춤을 추는 걸 어색해하거나 힘들어했지만, 점점 춤을 출 때 행복해지는 친구들이 있었다고 마치 아이에게 읽어줄 법한 전래 동화의 도입부처럼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아련함이 그들의 웃음과 함께 있었다. 물론 전래 동화의 마지막은 해피엔딩이지만 우리의 삶은 그 뒤에도 삶은 불확실한 미래와 함께 계속되는 법이다. 바라는 건, 이곳을 배경으로 하는 이 이야기가 한, 두 편의 해피엔딩만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약 1년간의 춤에 관한 나의 여정을 되씹어보면, 마치 긴 능선을 가진 높은 산을 오르는 느낌과도 같았다.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라던 어느 노래 가사처럼, 가파른 길을 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이따금 웃음기가 사라지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든다. 그러나 비교적 완만한 능선을 동료와 함께 걸으며 느꼈던 그 때와 그 시절의 웃음을 기억하며 다시 올라선다. 지나온 길에는 허울뿐인 말보다도 끈적이는 땀과 거친 숨, 그리고 달콤한 향기만을 기억하는 행복한 춤이 있다. 실력이 올라올수록 느끼는 풍경이 다르며 그만큼 만족감이 생긴다. 이따금 손이나 스텝을 놓쳐 당황하거나 미안해하기도 하지만, 점점 그런 것마저도 웃음이 되어 간다. 그래 그렇게, 이 춤은 행복한 웃음이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춤 앞에서 좀 더 밝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