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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Nov 18. 2023

We Just Swing On.

7막 n장


“쌤! 저도 조언을 해주세요!”



MT 대신 금요일 출빠를 택한 우리는 쏘셜클럽에서 행복한 춤을 추고 나서, 바 사장님의 배려로 바 안에서 뒤풀이를 가졌다. 모두가 떠나고 우리만 남겨둔 붉고 널따란 바 안에서 흥겨운 20년대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자, 몇몇은 마시던 술을 잠깐 내려놓고 바 안을 넓게 돌아다니며 춤을 추었다. 영어 회화와 스윙 댄스의 공통점은 술과 음악에 거나하게 취하면 좀 더 자신감이 생긴다는 점이었다. 평소에는 하지 않던 표정과 동작들이 스스럼없이 나왔고, 서로의 에너지와 움직임이 일치할 때면 박장대소를 하며 껄껄 웃어 재꼈다. 그러고 나서 자리에 앉으니 눈앞에는 한 리더와 쌤이 조금은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애정 어린 모습에 조금은 심통(?)이 났는지, 어린애 같이 쌤이 말에 마침표를 찍는 틈을 타서 '나도 조언을 해달라'고 졸랐다. 


“잘하고 있어요. 조언은 이따가 해줄게요.”


상대가 끼어들어서 막는 듯한 몸짓이 아니라, 쌤은 옆의 사람과의 비교를 피하고, 더불어 내게 진짜 도움이 될만한 알맞은 말들을 골라서 해주고 싶다는 느낌으로 조용하게 그 뜻을 전했다. 나는 알겠다고 말하며 다시 관심을 선생님과 그 친구가 있는 곳에서 정 반대로 돌려 처음 본 사람들을 바라보고 또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랑가의 살롱에서- 툴루즈 로트랙, 1894>출빠를 간 쏘셜 클럽의 분위기는 대략 이러했고, 사람들은 벽 쪽으로 나란히 깔린 의자에 앉았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 자정이 넘어서 한차례 사람들이 내일을 위해 떠난 무렵, 쌤의 곁으로 가서 앉아 조용히 다시 조언을 청했다. 나의 어렴풋한 기억을 조합한다면, 선생님은 이런 말을 했다.



“아까도 말했듯 잘하고 있어요. 다만, 춤을 출 때는 주변을 살피고 음악에 맞게 동작을 크고 작게 해야 하는 게 좋아요.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서 춤을 출 때는 동작을 작게 하면서도 음악을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상대에게 집중한다는 건 좋은 거지만, 주변을 살피지 않으면 부딪히거든요. 몇 번이나 부딪힐 걸 제가 피한 적도 있어요. 또한, 아직은 패턴이나 배워야 할 게 많으니까 그렇겠지만, 음악을 듣고 그 음악의 흐름이나 변화에 따라 함께 춤을 표현하면 좋아요. 리듬이나 템포의 변화를 줘야 하는데 그게 크게 변하지 않는다랄까? 말이나 노래도 확 작게 했다가 크게 하면 더 크게 들리잖아요? 그것처럼 춤도 작게 해보는 연습을 해봐야 해요. 그래야 하이라이트 구간에서 더 크고 멋지게 보일 수 있어요. 그러려면 음악을 잘 들어보고 어느 구간이 작고 어느 구간이 하이라이트인지를 봐야겠죠. 물론 지금도 잘하고 있어요. 이건 좀 더 계속 춤을 추고 음악을 들다 보면 늘 거에요.”




생각해보니 작은 틀에서 스윙 재즈의 여러 구조 중 기본적인 AABA 라는 구조를 생각하고 B 구간에서 뮤지컬리티나 어떤 특이한 걸 해보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음악 전체에서 기승전결을 고려하진 않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다 보니 AABA 이후에 오는 A'A'B'A'가 다른 것이라고 여겨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음악을 들을 때 전체를 고려하여 큰 일관성 안에서 각 구간별로 변화가 있는 것인데, 나는 그저 하나의 구간 안에서만 패턴이나 그 무엇인가를 보여주려고 했지, 이 음악 전체의 그림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생각이 음악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에 쏠려 있어서 그랬던 것일까? MT 주가 끝나고 한번은 엽님과 함께 수업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춤을 잘 추기 위해서 초보자에게 제일 먼저 조언을 한다면 무엇을 하시겠어요?


“음악을 많이 들어보세요. 그리고 음악을 분석도 해보면서 들어보는 것도 좋아요. 저는 직장을 오며 가며, 그리고 일하면서도 엄청나게 들었어요. 그렇다 보니 스윙 음악들의 비슷한 부분을 발견하게 되었고, 어느 구간에 변화를 줘야 할지 대략 느끼게 되었죠. 많이 들으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게 있어요.”



그는 노트를 꺼내 간단히 음악의 구조와 자신이 음악을 어떤 식으로 들었는지도 보여주었다. 그는 수요일 정기모임이 끝날 무렵 이런 조언도 해주었다. 



“크리스님이 춤을 추는 모습을 보았는데, 음악의 흐름이 변화했음에도 똑같은 바운스로 추고 있는 것을 보았어요. 물론 초보자가 일정한 바운스를 한다는 것은 좋은 것이긴 하지만, 음악의 흐름이 달라졌는데도 일정한 바운스를 계속하는 것보다는 음악에 맞춰 다른 느낌을 전달하는 게 좋겠죠. 물론 하시는 게 틀렸다는 건 아니에요. 춤을 추는 데 틀린 건 없으니까요.”



이 말은 스윙 댄스를 즐기면서 수없이 들었던 말이지만, 나는 이들의 조언을 통해 음악을 듣는다는 것의 의미를 조금 더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말하자면, 음악의 흐름과 강약을 몸짓으로 표현하는 것이랄까? 노래를 부를 때에도 기타를 칠 때도 음악을 전달할 때에도, 음과 리듬의 강약을 고려해서 노래 부르거나 연주하곤 했는데, 댄스에서도 결국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형은 빠워보컬이야.”


어린 시절 동생과 노래방을 갔을 때, 동생은 나의 노래를 이렇게 평가했다. 나름 힘을 뺀다고 생각하고 불렀던지라, 동생의 그러한 조언에 뒤통수를 맞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저 모든 구간에 진정성과 감정을 담아 부르려고 했던 것인데, 그게 과했던지 이따금 약하게 부른다고 생각했던 부분조차도 상대가 보기에는 그것이 매우 세거나 다른 구간과 똑같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나는 열심히만 하고 있던 거지, 음악을 이해하려 하거나 잘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음악이든 사람이든, 어떤 관계에 걸쳐 있을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 중 하나가 바로 ‘열심히 한다’라는 만족감이었다. 열심히 하는 건 물론 필요한 일이지만, 눈앞의 상대, 또는 사물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열심히 했다’라는 만족감에 도취하여 버리면 아집으로 바뀌거나 고치기 쉽지 않은 습관처럼 되어버릴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춘다고 틀린 건 아니에요. 춤에는 정답이 없으니까요."

엽님은 멋쩍게 웃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


"물론 즐겁게 추는 게 가장 중요해요. 춤에는 정답이 없으니까요."

쌤은 내게 애정어린 눈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거쳐 간 모든 선생님은 다들 '춤에는 정답이 없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운영장님이나 지금 나의 선생님들도 음악적 조언 끝에는 춤을 추는 데 틀린 건 없으니 행복하게 추면 된다고 말씀하신다. 


‘정말 틀린 건 없을까?’ 

나는 고민 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춤이 우리 삶에 가치 있는 금을 만드는 것이라면, 우리는 14k 금도 금이라고 말할 것이고 18k 금도 금이라 말할 것이다. 어떤 광물에서 금을 정제하는 과정에서 불순물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가치 있게 세공을 하거나 적절히 사용하면,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니며 외려 더 높은 순도의 금보다도 돋보이게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일부 불순물이 포함된 것들을 금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인생이라는 광물 속에서 춤이라는 금을 뽑아낸다면, 우리는 불순물이 포함되었다 하더라도 지금 순간에는 최선을 다해 정제해 내고, 잘 엮어 세공하면, 가치 있는 금이라 말할 수 있다. 춤을 연습하고 고민하고 좀 더 멋지게 나아가는 건 그 금을 순금에 가깝게 정제하는 과정이다. 좀 더 순도 높은 금과 같은 춤을 구사하기 위해 우리는 자신을 갈고닦는다.' 


그리고는 이러한 결론에 이르렀다. 


'그들의 춤을 금이라고 부른다면, 나의 춤도 금이다. 그러나 누군가 나의 춤을 순금이냐고 묻는다면, 아직은 불순물이 가득한 금이다.'


조언 끝에 혹시나 과도한 조언에 혹시나 우리가 춤에 재미를 잃어갈까 싶어, 멋쩍게 웃으면서 건네던 여러 거인들의 ‘춤추는 데 틀린 건 없다.’라는 말 한 마디는 내게 늘 여러 종류의 순도와 그 순도 안에서 멋지게 세공된 금반지와 목걸이와 귀걸이를 떠오르게 했다. 그리고 이들의 눈을 바라보며, 내 영혼 안에 필연적으로 내재한 나 역시 순도 높은 금이 되고 싶은 욕망을 들여다보았다. 



‘음악을 듣자.’ 

수도 없이 들었던 이 말이 또다시 쌤과 운영장님의 입에서 나오자, 음악을 듣는다는 것을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림이나 건축물과 같은 예술 작품을 볼 때 사용하던 분석 기법을 사용해 보기도 다짐한 것이다. ‘구도나 배치, 색이나 질감, 오브제의 상징성, 외경-중경-근경(그림의 시선이 닿는 바깥-중간-안쪽 풍경)의 구분 등등 실체화된 것들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그 전체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그리고 예술가는 어떤 동기나 예술 의욕을 가지고 있는가?’ 등등을 추측해 보는 것처럼 음악을 그렇게 들어보기로 한 것이다. 예술을 그렇게 볼 때, 우리는 예술 속에 담겨 있는 수많은 의미와 상징, 의도 등을 살필 수 있고, 나아가 그 틈 사이로 우리 인생의 진리를 이따금 발견하게 되듯, 하나의 재즈 음악을 그렇게 들어보기로 했다. 



음악을 듣는다는 것을 생각하다가 작년에 한 학생을 가르치다가 보게 된 어느 영어 지문이 떠올랐다. 글은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어느 대학 교실, 첫 미술 교양 수업이다. 눈앞의 교수는 학생들에게 프레젠테이션으로 그림 하나를 띄워 보여주고는 무엇이 보이느냐고 묻는다. 학생들은 생각한다. 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림에서 어떤 상징을 의미하고 있는 것을 묻는 건지, 혹은 저 말과 그림 안에 어떤 트릭 같은 게 있는 건 아닌지 등등. 그러다가 어떤 답변도 하지 못하고 만다. 그 앞에서 선생은 있는 그대로의 것을 말하지 못하느냐고 역정을 낸다. 




그 때 지문에 나온 그림을 나중에 찾아보니 이 그림이었다.
독일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인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 D. Friedrich, 1774~1840)작품이며, 제목은 비밀이다.  음악과 마찬가지로 제목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천천히 그리고 있는 그대로' 
그림을 보고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상상해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 


그 지문은 이따금 너무 쉬운 것임에도 되레 지나치게 그 안에 무언가 심오한 게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정작 눈앞에 본질 자체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몇 줄 안 되는 이 지문이 내게 큰 감동으로 다가온 까닭은 모든 것들의 시작은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했기 때문이었다. 예술 작품을 볼 때도 무언가 심오한 게 담겨 있으리라 생각하며 보기보다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며 생각하고 그다음에 그것들을 종합하여 예술가가 어떤 생각을 하고 그렸을지, 혹은 이 작품 속에 담긴 거대한 의미나 상징을 끌어내야 하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것은 예술을 모방한 자연도, 그리고 그 자연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을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 그리고 평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사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일이었지 그 사람이 돈이 많거나 훌륭한 사람이라고 미리 판단하고 모든 것들을 그 잣대를 기준으로 볼 일은 아니었다. 




지금 이 말을 하는 까닭은 이러한 기준이 어쩌면 음악을 들을 때에도 똑같이 적용될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위대한 음악이라 여기고 볼 게 아니라, 지금 내가 듣고 있는 음악을 있는 그대로 듣고 그 안에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씹고 뜯어보고 즐기며, 그렇게 들어보면서 그 음악 가지는 영감과 환희의 근원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지를 느껴보는 게 중요했다. 그리고선 '그 영감과 환희를 어떤 게 나의 몸짓으로 표현할 것인가?'를 생각해보고자 마음을 먹었다. 노래를 부르면서 화성악이나 또는 음료를 그리는 법을 알지 못해도 그 멜로디가 가지는 영감을 충분히 나의 목소리로 표현할 수 있듯, 비록 내가 화성악 등을 알지 못해도 충분히 있는 그대로 느끼고 무엇을 강조해야 하고 어딘가에서 서정적으로 느껴지는지를 많이 듣고 느끼고 또한 들리는 그대로 최선을 다해 들을 것이다. 노래를 부를 때처럼 눈을 감고 가사를 보지 않고도 그 감정을 내 입으로 전달할 수 있을 때처럼 재즈라는 독특한 구조의 이 노래를 듣고 그 감정을 말이 아닌 몸짓으로 표현해내리라. 그렇게 다짐했다. 호감을 느끼는 상대에게 느끼는 감정, 좀 더 그 존재를 알고 싶을 때 느끼는 그 두근거리는 감정으로 음악을 좀 더 사랑해보기로 했다.



‘어떤 노래가 좋을까?’ 



나는 사복님이 올려주신 플레이 리스트를 쭉 듣다가 Duke Ellington - Take The 'A' Train이 눈에 띄었다. '제목 없이 이 노래를 들었다고 하더라도 이게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었을까?' 아마 대충이라도 알았을 것이다. 음악을 주의 깊게 듣고 나서 이런 결론에 내렸다. 모를 수 없을 정도로 기승전결이 명확했고 트럼펫이나 여러 악기의 모든 지향점이 기차가 출발했다가 돌아오는 모습을 음악을 그리고 있었다.




<"Take The A Train"의 Backing Track>
코드의 흐름을 보면 전형적인 AABA 구조를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 backing track 은 AABA 구조를 연주에 따라 4번 혹은 6번의 반복하는데, 반복되는 각 구간의 멜로디가 주는 느낌을 조금씩 다르게 전하고 있지만, 세 번째 구간에 이르게 될 때, 마치 기차가 경적을 울리는 듯한, 큰 트럼펫 소리를 추가하여 극적인 효과를 강조한다.


어느 정도 음악의 흥겨움에 취하고 나니 구성이 궁금해졌다. 


'이제는 뜯어서 들어보자. 근데 악보를 본 적이 오래되었는데 어떻게 뜯어서 보지?' 


일단 인터넷에 있는 악보를 들여다보면서 음악의 흐름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노래방에서 악보 보기를 보면서 음악의 멜로디를 따라갔던 생각이 들어 일단은 멜로디를 중심으로 들었다. 그러나 악보의 구성이 복잡해서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악기별로 들어보기에는 악기의 이름도 제대로 몰라서 무엇이 어떤 악기를 지칭하고 있는지 알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무턱대고 유튜브에서 Take The 'A' Train을 검색했다. 쭉 내려서 이런 영상, 저런 영상을 살펴보다가 우연히 Backing Track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눌렀다. 코드만으로 구성된 단조로운 반복이 계속되었다. 


"이거다!" 


음악의 구성, 음악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왜 이 음악의 aaba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명확히 볼 수 있는 코드 구성이었다. 더욱이 재밌던 건 하나의 32마디 구조가 aaba를 이루고 있고 그다음 구조 역시 aaba 가 계속 반복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다음도 aaba 인가? 그런데 느낌상으로는 뭔가가 나와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원래의 음악을 다시 들어보았다. 그랬더니, 거기에는 기본은 aaba 의 코드 흐름이기는 하나, 하이라이트라고 부를 만한 빵 빵 빵 빵~~빠빵 하는 음악과 함께 곡조가 변화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 듀크 엘링턴은 기본 코드이기는 하나 거대한 반복되는 aaba 이기는 하나 세 번째 구간에 이르러서는 여러 악기를 사용하여 B의 느낌을 주고자 한 것이다. 이를테면 이러했다


https://youtu.be/E9H6cs-8n9M?si=miM5KH4DhTaZvk74



첫번째 32마디(A) : aaba

두번째 32마디(A) : aaba

세번째 32마디(B) : a'a'b'a'

네번째 32마디(A) : aaba   


물론 aaba 라고 해도 각 부분의 느낌은 약간씩 달랐다. 그러나 세 번째 구간 즉, B 구간에 이르러서는 분명한 하이라이트가 있었다. 기차가 경적을 울리며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기차가 커브를 돌면서 흥겹게 경적을 울리고 누군가를 다시 흥겹게 태울 정류장으로 다다른다. 큰 사각형 안에 비슷한 패턴의 사각형들이 나열된 느낌이었다.


음악 자체에서는 기차가 오는 풍경이 그려지더니 이윽고 그 구성에서조차 하나의 그림이 떠올랐다. '몬드리안이다!' 정사각형의 구성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각 부분에 대하여 비슷한 구성을 가지고 있으나 네 구간 중 가로 세로의 세 번째 구간이 눈에 띄는 구성! 몬드리안이라면 아마 그렇게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나는 음악을 들으며 몬드리안의 그림처럼 커다란 사각형 안에 격자를 대고 직사각형을 만들고 그 안에 각 음악의 구간이 주는 느낌에 따라 색깔을 칠해보았다. 구간의 형상을 몬드리안을 생각하다보니, 악기들이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음악을 형상화할 때에는 나도 모르게 칸딘스키의 그림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피트 몬드리안의 <빨강, 검정, 파랑, 노랑, 회색의 구성>(1920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 소장





<브로드웨이 부기 우기 Broadway Boogie Woogie 1942-44>
몬드리안의 그림을 검색하면서 알게된 사실은 그는 뉴욕으로 건너간 1940년에 스윙 댄스의 한 종류인 부기우기 작품 시리즈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위 작품은 경쾌한 리듬에 맞춰 신나게 몸을 움직이는 부기우기를 캔버스에 옮긴 작품이다. 이와 더불어 그는 춤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으며, 춤 추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칸딘스키 - 구성 8, 1923>
마치 여러 악기들이 나름의 신나는 소리를 내며 조화를 이루고 있는 듯한 이미지를 보며, 이따금 그는 필시 트럼펫과 섹소폰 등이 난무하는 신나는 스윙 재즈를 듣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그 구간 속에서 어떻게 춤을 출까? 음악을 흥얼거리면서 두 명의 댄스가 춤을 추는 이미지를 형상화해보았다. 아직은 각 구간에서 노래에서처럼 어떤 모습으로 강약을 보여야 할지 잘 그려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음악과 그것에 맞는 부분을 그려낸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재미가 있었다.


그렇게 복잡한 것들을 단순화하고 다시 모든 악기로 구성된 음악을 들으니 좀 더 그 음악과 악기의 소리가 비교적 쉽게 들려왔다. ‘이제는 악기별로 들어보자!’ 나는 각 악기가 내는 소리가 궁금해졌다. "둥둥둥둥둥!" 베이스를 따라가보니, 박자와 흐름이 눈에 들어왔다. 섹소폰을 따라가니, 멜로디가 눈에 들어왔다. "빵~~ 빠라바 빵~~!" 트럼펫을 따라가니, 변화와 악센트와 강조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든 악기가 조화를 이루니 머릿속에서 이들이 각각의 악기를 들고 연주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렇게 들으면서 다시 춤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했다. 


‘강약을 만들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강조하고 또한 무엇을 덜어내야 할까?’


어린 시절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약 10여 년을 사물놀이에서 꽹과리를 친 적이 있었다. 물론 20년도 더 넘은 시절의 이야기인지라 꽹과리를 다시 손에 잡으면 잘 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 시절에도 곧잘 대중들 앞에 나가 연주를 하곤 했는데, 각 악기가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꽹과리를 세게만 쳐서는 안 되었다. 빠르게 몰아치거나 할 때는 세게 칠 때도 있지만, 대체로는 여리게 치거나 내가 치는 것보다 더 조용히 쳐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20년이 지나 재즈를 의식적으로 듣기 시작한 요즘에 그때의 추억들이 많이 떠오른다. 박자를 탈 때나 이따금 애드리브를 따라가거나 혹은 춤을 출 때는 마냥 똑같이, 강하게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을 때에는 특히 그 시절의 몸을 흔들면서 박자를 맞춰가며 꽹과리를 치던 내 모습의 기억이 흐릿한 의식의 안개를 뚫고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매우 조용히 감미롭게 치다가 몰아치는 구간에는 속도를 높인다. 세게 치기보다 속도를 높이거나 나만의 애드리브를 보여야 한다. 재즈에서처럼 사물놀이에도 일종의 싱커페이션(당김음)이 존재하는데, 박자 사이에 음을 당겨서 친다든지, 박자와 박자 사이에 마치 트리플처럼 한 박을 더 집어넣는다든지의 애드리브를 통해 음악의 구성에 약간의 파격을 가한다. 결코, 악기들과 음의 흐름 사이에서 조화가 깨지지 않는 파격이다. 


나는, 손으로 꽹과리를 치던 그 형상과 환희는 현재의 나로 옮겨져 춤을 추고 있는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악기를 들고 있던 나의 손의 에너지는 전신으로 옮겨간다. 나는 미소를 띠며 상대의 손을 맞잡고 움직인다. 어떻게? 어떻게? 춤을 추는 현재의 나의 이미지에 이르러서는 나는 늘 쓰던 춤 패턴에 머무르고 만다. 그리곤, 다시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어떤 춤을 춰야 할 것인가? 어떻게 음악의 구간들이 주는 감정의 차이를 표현하고 또 상대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나도 재밌고 또한 상대도 재밌어야 할 것인가?' 


그런 고민이 머릿속을 맴도는 중에 어느 날, 유튜브에서는 스윙 댄스와 연관된 영상을 무심하게 보다가 어떤 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Nils & Euge - Pro Lindy Hop Mix&Match 1st place - Jumpin' at Istanbul 2023” 라는 제목의 대회 영상이었다. Stockholm Swing All Stars 가 라이브로 연주하는 I Got Rhythm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데, 약 2분 동안의 짧은 시간 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생각하고 있던 춤의 강약을 어떻게 음악의 흐름에 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지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https://youtu.be/fb8bcGaNj5I?si=kOfEAUjsB4KQ4kyR



눈앞의 상대는 나로서는 아직 쉽지 않은 무브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따라하지 못할 만큼의 엄청 대단한 것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음악의 변화, 흐름에 맞게 익살맞은 춤을 추고 있었고 상대도 그 움직임에 따라 반응하고 있을 뿐이었다. 액션과 리액션의 절묘한 조화였다. 보는 사람 모두가 음악에 딱딱 맞는 그들의 무브에 깔깔대며 환호성을 지른다. 


“그거 알아요? 이따금 리더들은 새롭고 참신한 패턴을 해야만 팔뤄가 좋아한다고 생각해요. 실은 그렇지 않은데도요. 기본만 하더라도 재밌을 수 있어요. 중요한 건 상대와의 교감인데 저는 보지도 않고 혼자 도취해서 추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이 기피 리더가 되죠.” 


누가 이 말을 했던가? 쌤이었던가? 아니면, 내가 좋아해 마지않던 완소 팔뤄였던가?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 두 사람의 춤이 바로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보기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오는 춤을 추고 있었으니까. 실로 음악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이 사람의 한 영상을 보고, 또 보고, 계속 보았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영상이었고, 볼 때마다 새로워지는 영상이었다. 그렇게 보고 나니, 다른 이들의 영상도 궁금해졌다. 그다음 영상은 Bianca & Markus – Pro Mix & Match Finals이라고 쓰여 있는 영상이었다. 그의 움직임은 Nils의 것보다도 더 패턴 중심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기본과도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도…. 이건……. 아니 이렇게도 출 수 있구나! 아니 이렇게 추는데도 엄청 멋지구나!’ 


https://youtu.be/lMHBEhFTrHc?si=ZwP_Lv7IID9F-QJ9



역시 음악이었다. 음악에 딱딱 맞는 무브! 이들은 안무하는 게 아니라 진짜 춤을 추고 있구나! 하하하하하하!!!


단지 발바닥 하나를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끌어당겼을 뿐인데, 음악과 절묘하게 조화가 되니 그토록 멋지게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지금껏 음악으로 무엇을 표현하려 했던 것일까?’ 


배운 패턴을 하는 게 아니라 음악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 Markus의 발동작 하나로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이 두 영상을 몇 번을 봤을까?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봤을 때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쌤과 춤을 추면서 내가 행복했고 심지어 마음이 고양되는 기분을 느낀 까닭을 잠시 생각해보면, 그녀의 앞에서는 아무리 부끄러운 움직임도 적극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었다. 아무리 부끄럽고 어색한 동작이라고 하더라도 그녀는 그거에 맞춰서 리액션을 해줬고, 그 반응은 나의 움직임에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존중!’ 

그것은 상대에 대한 존중, 상대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존중이었다. 


나는 이따금 이 춤에서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와 같은 남녀, 부부관계의 심리학을 느끼는데, 그중에 하나는 바로 이것이었다. 


‘여자가 남자를 존중(respect)하면, 남자는 여자를 사랑한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면, 여자는 남자를 존중한다.’


사랑과 존중의 정의를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그러한 정의에 앞서 우리가 흔히 중요한 상대에게서 사랑의 감정, 존중의 감정을 표현과 표정, 눈빛 등을 통해 느낄 수 있듯, 춤에서도 그와 유사한 감정의 교류가 표정과 표현, 그리고 배려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느끼게 되지 않을까 싶다. 즉 내가 자아도취 되지 않고 상대를 배려하고 눈을 맞추고 춤을 추는 것에서는 사랑의 감정에 가깝다면, 나의 움직임에 맞춰 반응을 해주거나 어설픈 행동에도 웃어주고 따라와 주는 것이 존중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 때 그 순간, 상대가 나의 엉뚱한 동작에도 웃어주고 또 어색하지 않게 따라와 줄 때, 그러한 감정을 느꼈다. 


쌤들과 함께한 두 달의 시간은 내게 있어서, '어떻게 춤을 춰야 할 것인가?' 아니, 그에 앞서 '왜 춤을 춰야 할까?' 에 관한 관한 나름의 결론을 만들어 낸 시간이었다. 특히, 그 당시 나는 톨스토이의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시작하고 있었는데, 그 책의 내용 중 일부는 내가 내리는 결론에 어느 정도 명분과 확신을 주었다. 책의 내용은 이러했다. (참고로 이 부분은 책의 도입부에 불과하며, 톨스토이가 주장하는 예술론과는 거리가 있다.)



쉴러는 미학에 관하여 많은 논의를 일으키고 있으나, 그에 의한다면 예술의 목적은 칸트와 마찬가지로 미이다. 그리고 미의 근원은 실제적 이익을 수반하지 않는 쾌감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유희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필요한 직업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생 스스로의 미의 표현이며, 미 이외에는 다른 목적을 수반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허버트 스펜서에 의하면 예술의 기원은 유희이다. 이 사상은 전에 쉴러가 주장한 것이었다. 하등 동물의 경우에는 온갖 정력이 생명 유지와 종족 보존을 위하여 소비되지만, 인간의 경우에는 그러한 필요성을 보완하고도 여력이 있다. 이 여력은 유희에 사용되며 나아가 예술이 되는 것이다. 유희는 실제 활동의 모방인 까닭에 예술과도 같은 것이다. 미적 쾌락의 원천은 세 단계로 되어 있다.


① 과도한 실행에서부터 오는 장애는 거의 없고 가장 완전한 방법에 갖가지 능력을 작용하게 하는 일

② 유쾌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많은 자극의 특이점

③ 그와 같은 특별한 결합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재기하는 것.


그랜트 알렌은 스펜서의 후계자이다. 그는 《생리적 미학》에서 미는 생리적 기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미학인 쾌락은 아름다운 것을 조용히 지켜보기 때문에 일어나지만, 미의 개념은 육체적인 경과에 따라서 얻어진다. 예술의 기원은 유희이다. 육체력이 과잉된 경우에는 유희를 일삼고, 인식력이 과잉된 경우에는 예술을 선택한다. 미는 최소한도의 낭비로써 최대한의 자극을 불러일으킨다.




사람은 태생적으로 누구나 어떤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고 한다. 나 역시 사람인지라, 이따금 이 유희적 활동에 즐거운 취미 이상으로 어떤 의미를 붙여보고자 하는 마음이 들곤 한다. 뭔가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차마 부끄러워서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마음 한편에 깊이 간직하고픈, 그래서 좀 더 나라는 사람이 이 땅 위에 존재할만한 이유가 될 수도 있는 것과 같은 그 어떤 의미를 이끌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와중에 톨스토이의 책에서 본 수많은 예술의 나열 중에 본 저 대목들은 내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하는 이 활동의 의미와 추구해야 할 방향에 한 줄기 빛을 보여준 느낌이었다. 물론 난 열렬한 탐미주의자도 아니고, 반대로 이 유희 활동이 사회에 이바지하거나 봉사할 수 있다고 보지도 않는다. 다만, 내가 춤을 추어야 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이 결국 그 춤을 추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에게 아름다움을 전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미적 쾌락의 원천은 여러 가지 생각을 낳게 했는데, 각각의 부분에 관한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① 과도한 실행에서부터 오는 장애는 거의 없고 가장 완전한 방법에 갖가지 능력을 작용하게 하는 일


이는 나 자신과 누군가에게 이 유희의 아름다움을 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즉 기술적인 부분을 전하는 말 같이 느껴졌다. 말하자면, 과도한 동작의 실행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없어야 하며, 가장 완전하다 여길 만한 기본기와 기술적 안정이 있어야 하며, 갖가지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그것을 음악의 흐름에 맞춰 적절하게 실행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② 유쾌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많은 자극의 특이점


나 자신 뿐 아니라 상대의 감정에도 유쾌함이 묻어나게 춤을 춰야만 했다. 이는 춤추는 상대를 배려하고 또한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킬 만한 갖가지 즐거움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말처럼 느껴졌다. 즉, 첫 번째가 기술적인 부분이라면 이것은 심리적인 부분을 일컫는 것 같았다. 



③ 그와 같은 특별한 결합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재기하는 것.


사실 원문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의문이 든 문장이었다. 부분적으로 재기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엇인가? 다만, 기술적인 부분과 심리적인 부분의 결합에 의하여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부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는 말이 아닐까 싶었다. 생리적-성적 관점에서 비유를 해보자면, 많은 성적 관계 속에서도 생명의 탄생은 부분적으로 일어나게 된다는 말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저 말은 여러 유희 활동 가운데에서 부분적으로 미적 쾌락이 발생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요즘에는 어느 글 또는 어느 상황에서라도 스윙 댄스를 상상하게 할 만한 것이 털끝이라도 있다면, 나는 마치 엉킨 실타래를 풀 듯 그 단어, 그 장면으로부터 시작해 스윙 댄스에 관한 생각들을 확장해 나갔다. 망치를 돈 목수는 모든 게 못으로 보인다던 영국의 속담처럼 지금 나는 스윙 댄스라는 망치를 든 목수와도 같았다. 그리고 그 목수는 또 다시 망치를 들어 이런 원칙으로 나만의 스윙을 위한 하우스와 울타리를 짓기로 마음 먹는다.


① 이 춤이 금이라면 나의 춤을 순금처럼 제련할 것 

② 나뿐 아니라 상대가 유쾌한 감정이 들도록 배려할 것 


첫 스윙을 시작하고서, 꼬박 1년을 달려왔다. 그 1년간의 세월 동안 반복해서 '왜 춤을 춰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춤을 춰야 하는가?'를 물어왔다. 그리고 나름의 해답을 가지고 돌아와 다시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 그 여정의 시작은 아마도, '유쾌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일 것 같다.


1년 전 처음 이곳에 와서, 남긴 첫 후기의 글을 다시 열어보니, 그 때의 나는 이런 글을 쓰고 있었다.


"스윙은 실수할 게 없어요. 인생과는 달리 단순하죠. 스윙은 정말 멋진 거에요. 만일 실수를 하거나, 스텝이 엉키거나, 당신은 그저, 스윙을 계속하면 돼요." 


If you make a mistake, if you get all snarled up, You Just Swing On.

<영화 여인의 향기 대사 중 탱고에 대한 알파치노의 대사를 패러디 한 것임>


스텝이 엉켜도, 실수해도 멈추지 않고 그 춤의 흐름 안에서 유쾌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행복한 춤이 아니겠는가? 나는, 내가 유쾌한 만큼 상대를 유쾌하게 만들고 있을까? 눈앞에 미소를 띤 이들이 서로의 움직임에 맞춰 유쾌한 듯, 춤을 추는 모습을 상상한다. 익살맞은 그녀의 표정과 움직임에 나도 모르게 동화되고 감동을 받는다. 



나는 그렇게 추고 싶다. 

내 앞에 나를 유쾌하게 만들어주는 이들처럼, 

나도 그렇게 이들을 유쾌하게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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