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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r 17. 2024

나의 발걸음이 어둠을 지나쳐 갈 때

Dance Flow에 관한 짧은 소고

1. 나의 발걸음이 어둠을 지나쳐 갈 때


새벽 2시, 다행스럽게도 집 근처를 지나는 마지막 광역 버스에서 서둘러 내린다. 문에서 내리자 조금은 쌀쌀한 바람이 얼굴과 목을 덮친다. 나는 두꺼운 잠바의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횡단보도 앞에서 서서 신호가 바뀌기만을 기다린다. 빼두었던 이어폰을 다시 귀에 끼우고 유튜브에서 익숙한 스윙 재즈 음악이 담긴 리스트를 켠다. 익숙한 목소리와 음악이 들려오자 나는 음악의 2와 4박에 맞춰 엄지와 중지를 튕겨 소리를 만든다. “딱~ 딱~” 핑거 스냅 소리가 음악과 겹치자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인다. 길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이윽고 발까지 움직인다. 횡단보도의 흰 선은 피아노의 흰 건반이 되고 검은색은 검은 건반이 된다. 나는 건반을 최대한 Jazzy 하게 건너본다. 


걸음을 걷는다. 마치 몇 시간 전에 바에서 춤을 추듯, 그렇게 부드러운 느낌으로 어두운 길을 걷는다. 주변에 아무도 없자, 좀 더 대담해진다. 입으로 “샤바삐리둔다~ 두비두바~” 멜 토메가 스캣 하듯 소리를 내어본다. 여덟 카운트의 지터벅 걸음으로 걷다가 이따금 트리플도 해본다. 오른손으로만 내던 스냅 핑거를 왼손으로도 내어보면서 당김음도 만들어본다. 앞에서 한 사람이 어둠을 뚫고 무심하게 다가오자 진정하고 이성적으로 지나치지만, 다시 음악을 타고 앞으로 나아간다. 적당한 어둠이다. 걸음인지 춤인지 모르게 만드는 실로 적당한 어둠이다. 부끄러움을 적당히 가려주는 어둠이다.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느낌이 힙합(hip hopping)이라면 스윙 댄스는 힙합이다. 아니 힙합이 스윙 댄스인 건가? 뭐 lindy hop이나 hip hop이나 다 들썩거리는 거니깐.


멀리서 우리 집이 보인다. 막대그래프를 닮은 내 집이다. 거대하고 육중한 기다란 거 빼놓고 볼 것 없는 저 형태로 들어가는 게 못내 아쉽다. 편안한 우리 집이지만, jazzy 한 것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직선적인 투박한 건물이다. 층과 층 사이를 오선지 삼아, 음표 그림이라도 있으면 재밌으련만, 저놈의 건물은 색깔마저도 회색빛의 단조로움 투성이다.


걸음의 폭을 조금 줄이고 대신 좀 더 느리지만, 더 리드미컬하게 걸어본다. 걷는 속도 대신 이번에는 발가락 끝에서 발뒤꿈치까지 지면에 닿는 시간을 음악에 맞추되 최대한 느리게 구불구불 걸어본다. 적당히 취해서 그런 걸까? 뭐, 움직이며 걸으니 육중한 저 건물이 걸을 때마다 위아래 움직이는 음악의 이퀄라이저 같아 보이기도 한다. 재즈는 구불구불하다. 세상은 반듯하거나 모서리 지거나 뾰족한데, 재즈는 구불구불하다. 나는 그 구불구불함에 맞춰 구불구불 걸어본다. 그리곤 부드럽고 구불구불한 것들을 찾아본다. 재즈라는 구불구불한 언어의 흐름 사이로 발끝이나 뒤꿈치로 악센트를 찍어보기도 하고 높낮이를 달리 해보기도 한다. 움직임의 크기도 크게 했다가 이번에는 작게 해본다. 물어보듯 음악에 맞춰 몸의 긴장을 높여보기도 하고 부드럽게 낮춰보기도 한다. 아까 함께 춤을 춘 상대들을 떠올리며, 마치 상대가 눈앞에 있다는 듯이 눈을 맞춰보기도 한다. 재즈라는 음악에 댄스라는 몸의 언어를 실어 상대에게 내 의사를 전달하고 또 물어본다. 나는 이렇게 할 거야. 너는? 자유로운 대화. 상대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대화. 지적인 대화, 격렬한 대화, 기쁨에 찬 대화, 위안이 될 대화. 비록 짧은 3분의 시간 동안이지만 그런 대화를 나눈다. 모든 건 언어다. 


왜 재즈가 미국, 그것도 미국 남부에서 태어났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그 까닭은 어쩌면 미국 영어가 가진 연결성과 부드러움과 리듬감, 악센트 등과도 관련 있지 않을까? 물론 다 가정일 뿐이지만, 미국식 악센트와 발음은 이따금 재즈와 많이 닮았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특정 예술의 발생과 진화는 그 지역, 나라의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이에 기여하는 여러 요소 가운데 언어는 그 발전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니까. 뭐, 그냥 술 한잔과 바닥에 보이는 직소 같은 블록의 선들을 음악의 선율과 비교해 보다가 문득 떠오른 추측일 뿐이다.




피에트 몬드리안,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세상은 온통 직선이지만, 이따금 곡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느린 음악이나 블루스를 들으면 피카소의 어떤 그림처럼 곡선들의 천국이었다가도 빠른 템포의 스윙 재즈 음악이 나오면 몬드리안의 부기우기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내 몸은 그 음악의 곡선을 따라 가보기도 하다가 스텝을 빠르게 놀려 발끝 하나하나 다른 색깔을 찍어보기도 한다. 눈을 살포시 감아보고 가볍게 밟으니 노란빛이 번진다. 조금 무겁게 밟으면 빨강, 더 무겁게 밟으면 검정, 오랫동안 락스텝이나 찐득한 스텝처럼 오래 밟고 있으면 큰 사각형, 수줍은 새색시처럼 발끝만 살짝 밟으면 작은 사각형이 어둠 속에서 번진다. 눈을 조금 더 떠서 흰 보도블록 가운데에 있는 작은 빨간빛의 블록 가운데에 하프 브레이크처럼 앞발을 쿵 떨어뜨려 찍어보기도 한다. 저 네모난 블록 가운데에 있는 빨간빛의 무늬가 마치 내 발끝에서 만들어진 것 마냥 그 한 가운데에 발을 찍은 게 흐뭇하다. 히히.


오늘 하루는 꽤 괜찮았어. 하루의 끝을 괜찮은 음악으로 물들이고선 그런 생각을 잠시 한다. 꽤 연습도 충실히 했고 춤도 많이 췄다. 빠닫을 하고선 뒤풀이에 가서 왁자지껄 놀았다.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잘 기억나지 않는다. 조금 시끄러운 와중에 춤에 관한 이야기도, 인생에 관한 이야기도, 연애에 관한 이야기도 좀 한 것 같다. 잘 기억나는 건 없지만, 아마 그랬을 것이다. 선명하지 않은 채 입 밖으로 빠져나가는 입김처럼, 흐릿한 기억들이 그렇게 입 밖으로 빠져나간다. 그 입김에 손을 대어보니 온기가 남아, 따스하다. 오랫동안 잡을 수 있는 온기는 아니지만, 추운 새벽을 녹이기엔 적당하다. 지금 듣고 있는 재즈 음악만이 기억의 배경과 주변을 온통 휘감는다. 


술을 마시고 나면 세상이 온통 동화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미녀와 야수에 등장하는 수많은 살아 있는 물건들처럼 모든 것들은 살아 있는 듯 움직이곤 했다. 동화의 탄생은 술 취함이 있어서 그렇다고 결론을 짓고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사랑해야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그때처럼 고주망태가 되지 않아도 생명이 없는 것들이 음악 속에서 살아나고 있다. 나의 발걸음과 손짓에 저마다 목소리를 내는 음악이 되어가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할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내가 모르던 세상을 아직 맛볼 수 있다는 행복감이 아닐까 싶었다. 혹하지 말아야 할 나이에 이르러 만난 이 춤은 나를 계속 유혹하고 있었다. 음악 속에서 모든 것들은 의식의 흐름을 따라 초콜렛 밀크쉐이크처럼 버무려진다. 



2. “너는 스윙을 하고 있지 않아.” 의 의미


어둠 속에서 음악을 따라 발걸음을 내딛다가, 문득 생각 하나가 떠오른다. '너는 스윙을 하고 있지 않아.' 그 생각 속에서 배리 해리스가 말한다. 


“드러머의 연주에만 의지해서는 안 되지. 우리들 모두가 박자를 끌고 가야 한다고.”


악기 하나하나가 스스로 박자를 끌고 가야만 한다는 말이었다. 예전에는 “너는 스윙을 하고 있지 않아.” 이 말이 인상에 남아 다른 것들은 생각을 못했는데, 이제는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저 말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영상에 대고 이렇게 계속 되물었다.  '나는 비트를 쫓아가고 있는 걸까? 아니면 비트를 만들어 있는 걸까?'


“스윙! 바운스라는 것은 엇박자를 원래의 타이밍보다 뒤로 살짝 밀어서 연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 박의 길이를 100이라고 한다면 제 박이 시작하는 타이밍이 0, 엇박이 시작하는 타이밍이 50이 됩니다. 스윙 또는 바운스는 이 엇박의 타이밍을 50에서 살짝 뒤로 밀어서 연주하라는 뜻입니다. 그냥 정수로 퉁 쳐서 51에서 99사이에 있으면 이게 다 스윙입니다.”


어느 날 유튜브 쇼츠로 ‘셔플과 스윙’박자에 대한 설명을 본 적이 있었다. 몇 분도 되지 않은 이 설명에서 스윙 리듬이 포괄적 구성과 왜 스윙 음악에서 스스로가 스윙하지 못하고 드럼에 의해서 스윙을 하게 되는지(드러머의 연주(박자)에 많은 연주자가 의지하게 되는지), 왜 배리 해리스가 스윙한다는 것이 박자를 끌고 가는 것임을 강조하는지 어렴풋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윙이라는 것은 한 박의 길이를 1과 100사이라고 한다면 51과 99사이의 그 어떤 곳에 있어서도 스윙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그 애매함으로 인하여 음악적 자유로움이 생기고, 셔플(66)이나 정박(50)의 음악처럼 정형화된 형식을 강하게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이 말이 내가 되묻던 질문에 어느 정도 답을 주는 듯했다. 정리하면, 51에서 99 사이에 존재하는 스윙의 리듬감처럼 나의 다리로 만들어 내는 바운스의 리듬감 역시 51과 99사이에 찐득하니 밟되, 베이스나 드럼 연주자들의 스윙을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말처럼 느껴졌다. 물론 이는 베이스나 드럼 연주자들의 리듬에 맞추지 말고 독단적으로 하라는 말은 아니었다. 음악이 제시하는 일정한 속도의 바운스를 유지하라는 말이었고 다만, 자기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의 연주를 따라서만 스윙을 하게 되면 점점 느려질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니까 템포 늦추지 말고 잘 끌고 가보자고. 한번 정했으면 쭉 유지하는 거야. 물론 쉽지 않지. 그러니 계속 신경 써서 집중하자고(Keep it up).” 


그 영상에서 노(老)교수의 마지막 말은 악기를 다루는 사람뿐 아니라 스윙 댄서로서 지켜야 할 한가지 규칙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 규칙을 생각하니, 그의 말에 공감하게 되는 한 가지 사례가 떠올랐다. 바로 라인 댄스인 심샘을 할 때였다. 심샘이 라인 댄스 음악으로 흘러나올 때면, 이따금 나 자신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바운스의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지 않고 음악의 박자에 의존하다가 특정 동작을 할 타이밍을 놓치게 되는 때를 종종 보곤 했다. 



3. “좀 더 찐득하니 밟아보세요!”

큰곰자리(네이버 백과사전)


“좀 더 찐득하니 밟아보세요!”


심샘을 떠올리니, 심샘을 다시 배우던 그날에 엽님이 주문했던 말이 문득 떠오른다. 좀 더 찐득하고 리드미컬하게, 끊어지는 느낌이 없는 플로우로. 


‘그래, 좀 더 의식하고 집중하면서… 좀 더 찐득하게… 밟아보자.’ 


그가 보여진 찐득한 스텝과 영상에서 본 프랭키 매닝의 발걸음도 떠올리다가, 약간은 나만의 스타일로 마치 힙합을 하는 흑인 래퍼들의 걸음같이 음악에 걸음을 다양하게 바꿔본다. 신발 밑창에 달달한 누텔라를 찐득하니 바른 것 같다. 그렇게 여러 느낌으로 걸어보다가, 문득 도보 위에 새겨진 나의 발걸음이 마치 피카소가 말년에 그렸던 닥스훈트나 소의 그림처럼 형체는 없애고 한붓그리기 같은 그림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나의 춤이 그러한 그림처럼 혹은 하늘의 별자리처럼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음악을 들은 나의 표현이 봄날의 곰돌이들도 되고 수줍은 처녀가 되기도 하고 열정이 가득한 헤라클래스의 모습이 되기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어이없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뭐 상상이야 내 마음이니까.



4. Flow에 관한 짧은 소고.


엽님은 최근에 플로우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우리말로 하면 flow는 ‘흐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끊기지 않고 계속 이동하는 것,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연결동작이라고 말하는 이 flow를 생각할 때, 나는 주짓수나 유도 또는 태극권 같은 유술이 생각나고 다른 한쪽에서는 ‘몰입’이라는 용어가 생각난다. 흐름에 역행하지 않는 것, 억지로 힘을 쓰지 않고 자연스러운 흐름에 역행하지 않는 기술,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여 제압하는 것이 바로 유술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따금 스윙 댄스의 그것도 유술과 비슷한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이따금 프레임이나 스텝, 플로우, 에너지 등의 용어들은 주짓수에서 비슷한 의미로 활용되기도 한다.)




문득 떠오른 '몰입'이라는 용어는 칙센트 미하이라는 심리학자의 책에서 비롯된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몰입’으로 번역되어 있으나 원제는 flow이기 때문이었다. 이 flow라는 용어는 댄스의 flow 오는 조금 다르게 쓰이는데, 이는 마치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느낌’이라든가 ‘물처럼 흐르는 편안한 느낌’의 심리학적 용어를 의미했다. 그렇기에 국내에서는 비슷한 의미를 지닌 ‘몰입’이라는 용어로 번역하기 충분했을 것이다. 


칙센트 미하이가 말하는 이 용어와 댄스의 flow와는 엄연히 다르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해보면, 누군가 댄스에서 flow를 말할 때, 그것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어둠 속에서 불현듯 떠오른 생각은 이랬다. 


“flow를 ‘물처럼 흐르는 편안한 느낌’이라고 볼 때, 댄스에서도 이것만큼 중요한 게 없지 않을까?” “그냥 단순히 ‘흐름’이라고 번역하기보다도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느낌’ 또는 ‘물처럼 흐르는 편안한 느낌’이라고 전달할 때, 댄스의 flow를 좀 더 바르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관점에서 댄스의 flow도 역시 ‘몰입’의 과정이라고 여길 때, flow를 달성하기 위한 조건으로 칙센트 미하이가 주장한 것은 댄스에서 몰입과정 즉 거스르지 않는 flow를 만들기 위한 수행의 필요조건들을 생각해 볼 수 있게 했다. 그 필요조건들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았다. 


1. 명확한 목표. 

2. 즉각적인 피드백. 

3. 과제 수준과 개인의 능력 사이의 균형. 

4. 통제감(통제력 강화).


물론 이는 최근 교육학이나 자기 계발서 등에서 일반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를 것은 없는 말이다. 다만, 어떤 과제 수행에서 있어서의 몰입뿐 아니라, 아닌 댄스에서 말하는 춤의 흐름(flow)을 바르게 이끌기 위해서도 중요한 조건이 아닐까?


더욱이 중요한 것은 ‘물처럼 흐르는 편안한 느낌’이었다. 이 말은 어떻게 보면, 형(形)이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걸 스윙 댄스에 빗대어 보면, 어떤 정형화된 패턴이나 형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춤과 리듬의 흐름을 깨뜨리지 않으면서 나와 상대를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게 더 중요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에 보게 된 한가지 영상이 있었는데, 바로 ‘Jamin Jackson’이라는 스윙 댄서의 유튜브였다. 그는 여러 대회 영상들을 리뷰하면서 그들의 퍼포먼스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곤 했다. 엽님과 그 사람에 대해 대화를 하던 중, 국내 대회를 리뷰한 영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보았는데 그 영상에서 Jamin의 발언은 내게 큰 의미가 되었다. 


그는 참가자들이 ‘패턴’ 일변도의 춤을 추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독창성(unique)이 부족하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패턴은 누구나 배우면 할 수 있는 것이며, 그보다 중요한 것은 두려워하지 말고 독창적으로 표현하는 것임을 계속 강조했다. 그리고 독창적이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동작을 보는 것으로 시작하고 그것을 마스터할 때까지 따라 해보고 그런 다음 무언가를 바꿔보라고 이야기했다. 


그의 이러한 조언은 어떤 형식을 배우라는 것에서 좋은 연결동작(flow)를 익혀서 내것으로 만들라는 의미와 계속 깨뜨려보라는 말에서 형(形)을 깨뜨리면서도 거스름이 없는 流의 의미, ‘물처럼 흐르는 편안한 느낌’(flow)의 의미와 이를 위한 방법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러한 flow에 관한 사소한 대화와 여러 생각, 그리고 Jamin의 조언은 앞으로 내가 이 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나아가야 할지 방향을 제시해 주는 듯 했다.



5. 춤을 춘다는 것의 의미.


flow이라는 한 단어에서 보게 되는 수많은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느 한겨울의 어둠에서도 별자리처럼 수를 놓는다. 인천의 밤하늘에는 볼만한 별도 하나 없는데, 별의별 생각들이 별거 아닌 것처럼 팍하니 튀어나오고 나는 그 지점을 발판으로 생각을 이어줄 다른 선들을 만들어나간다. 그리고 그 선 중 일부는 의미로 남아 깨달음을 준다. 이를테면, 이렇다.


①‘ 즐긴다’라는 말의 궁극적 의미는 ‘하늘을 날거나 물처럼 흐르는 편안한 느낌’을 추구하는 것이다. 

② 그러한 즐거움에 이르기 위해선 결국 어떤 것들을 계속 성취하고 통제해 나가야 한다. 

③ ‘즐기는 자’라는 건, ‘성취하고 통제하는 노력하는 것을 넘어서 저 경지에 이르는 자’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한 것들은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말로 다 전하기에는 추상적이며 어려운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렇게 의미가 된 것들의 하늘의 별들처럼 그 선을 이을만한 생각이 무엇이든간에 불현듯 떠오를 때마다 별자리처럼 잊어버리지 않고 계속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이제 집 현관문 앞에 이르러 잠깐 달콤한 어둠에 취해, 들어갈 것을 머뭇거리다가, 이내 집 호수와 비밀번호를 누르고 거대한 기둥 안으로 들어선다. 버스에서 내리고 나서부터 끊임없이 흘러가던 나의 발걸음은 그렇게 멈춰지고, 맞이할 이 아무도 없는 어두운 빈 곳에 이르게 되면, 어떤 적막감과 고독감이 은은한 여러 빛으로 물들던 나의 마음 한구석부터 차츰 어둡게 채색한다. 불을 켜지도 않고 안쪽 깊은 곳으로 들어가 그대로 누워, 듣고 있던 음악을 마저 듣는다. 어떤 기분들이 평범한 일상을 대체로 행복하게 혹은 무덤덤하게 만들다가도 어느 시기에 이르러 검정 잉크와도 같은 어느 불안한 요인 하나가 조금이라도 툭 튀어나오고 나면 이내 어둠은 불행으로 가득해진다. 그 기분을 무감각으로 만들기 위해 음악은 꺼지고, 휴대폰 속 자극적인 영상들로 눈과 귀를 이끈다. 온갖 중독은 어쩌면 불행한 기분을 감추기 위한 무의식적인 방어기제로 형성이 되는 건 아닐까 싶다. 어쩌면, 행복한 춤 역시 그러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춤은 불행을 감추기 위한 춤일까, 아니면 인생의 의미로 남는 춤일까? 인생의 의미로 남기를 바란다면, 지금의 내가 하는 노력과 기쁨은 어떤 의미가 될까? 나도 모르겠다. 이제 쉽게 미혹당할 나이는 아니건만, 아직도 나는 이 춤에 미혹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춤 속에서 아직도 사람을 찾으며, 사랑을 찾으며, 또한 제 나름의 (누군가가 보기에는 어리석을수도 있지만, 그래도) 의미가 될 어떤 것을 찾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Jazzy'함에 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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