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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색 모자 쓰고 사람들 굴리는…. 어?”

by Chris


피하지 말자. 두려워하지 말자. 아니 그냥 어차피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니 하고 싶은 거 다 해보자.


아침에 일어나니, 한 동료가 카톡방에 어제 했던 마마스튜 영상을 찍어 올려줬다. 그곳에서는 빨간 모자를 쓴 내가 활기차게 춤을 추고 있었다.


“빨간색 모자 쓰고 사람들 굴리는…. 어?”


영상을 보자마자 다른 친구가 말했다. 문득, 어제 한 동생이 춤을 추다 말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빠! 빨간 모자가 군대 조교 같아요.”


앞으로 라인을 강습할 때, 컨셉으로 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제 좀 프로페셔널해질 수 있도록 해봐야겠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점 중 하나는 ‘내 가치를 돈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가 아닐까. 내 춤이 누군가에게 가치를 지닌다면, 그 가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구매력으로 환산될 것이다. 물론 비즈니스는 실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지만, 기본적인 실력이 받쳐줘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생각해보니, 나는 패기 넘치던 20대 시절엔 내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모임을 운영할 때에도, 하다못해 참가비라도 받고 진행했었다. 그때는 당연하게 여겼던 일이었는데, 언제부턴가 돈 자체에 대한 일종의 ‘혐오감’ 같은 것이 생긴 것은 아닐까 싶었다.


시간과 노력, 노동의 대가를 환산했어야 선순환이 이루어지는데, 어느 순간부터 돈을 받는 것이 스트레스가 되어버렸다.


“뭘 돈을 줘? 그냥 해줄게.”


겉으로는 온정적인 태도였지만, 사실은 돈을 받으면 따라오는 책임감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스트레스가 싫어서 도망쳤고, 그렇게 내 가치를 평가받을 기회 자체를 회피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스트레스를 피하려 했던 것 같다. 우물쭈물하다가 시간이 지나고, 또 우물쭈물하다가 기회들을 놓쳤다. 죽을 때, 누구처럼, “우물쭈물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라고 묘비명에 써놓고 싶기라도 한 걸까?


최근 어떤 계기로 매일 만 원씩 저축을 시작했다. 이제 한 달이 지나가는데, 점점 왜 사람들이 저축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이 왜 꾸준히 저축하는지.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모으는 재미가 있어서 때로는 점심값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꾸준히 쌓아간다는 것, 매일 매일 거르지 않고 무언가를 하는 것은 마치 통장에 매일 조금씩 저축해 나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이불을 개거나 방을 청소하는 것, 하루에 한 페이지라도 책을 읽는 것처럼, 매일 어떤 작은 과업을 꾸준히 해 나가는 것들도 내게 성취라는 통장에 적은 돈이라도 쌓는 기쁨일 테다. 무언가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내가 만든 수많은 통장에 쌓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꾸준히 모아 언젠가 그 통장을 열어봤을 때, 제법 놀랄 만큼 쌓여 있는 것을 확인하고 제법 뿌듯해하지 않을까?


'그렇게 인생에 여러 과업을 저축을 해 나갈 수 있는 여러 형태의 통장을 꼭 만들어보자. 일단 만들어놓고 시도하자. 그리고 진짜 돈의 가치로 환산해줄 수 있을 만큼 프로페셔널해져보자. 그러려면 일단 시작부터 해야 한다. 만드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니, 두려워도 말고 어색해하지도 말고. 우물쭈물해 하지도 말고.'


거울을 보며 스스로 주문을 걸었다.

“한 번만 더 나에게 힘내라고 말해줘. 할 수 있다고 말해줘.”

“‘실망시키지 않을거지?’ 라는 말 대신 나를 바라보며 그저 ‘아무것도 아니야, 할 수 있어’라고 말해줘.”




아침 10시, 연습실에 도착해 몸을 풀었다. 다음 주 월요일 강습할 트리커레이션 라인 댄스를 8 카운트에 맞춰 동작을 나누고 연습했다. 가르치는 입장이 된다는 것은, 그저 동작을 할 줄 아는 것이 아니라 질문에도 막힘없이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강사가 당황하면 수강생들도 불안해진다.


지난 수요일 마마스튜 강습 때, 그 사실을 제대로 깨달았다. 당황하지 않으려면 카운트를 정확하게 세면서, 막힘 없이 설명할 수 있도록 연습해야 했다.


“잠시 후, 건물 전체 정전이 있을 예정입니다.”


관리 직원이 와서 알려줬다. 몇 분 뒤, 불이 꺼지면서 바깥과 연습실 모두 완전히 암흑이 되었다. 어두운 연습실에서 눈을 감은 채 다시 카운트를 세며 몸을 움직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오히려 중심 이동과 몸의 미세한 감각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어둠이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 불시에 환한 불이 켜졌다.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불빛이었다. 다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서 연습을 했다. 그러고 나선 캐리비안 심샘, 베이비캔 댄스, 딘콜린스 심샘 등을 추가로 연습했다. 3시간 동안 연습을 하고 나니 까먹었던 부분을 되살릴 수 있었다.


“그날 시간이 될지 모르겠는데, 혹시라도 연습하시는 다른 라인 댄스 중에서 안 되는 부분이 있으시면 미리 말씀해주세요. 할 수 있는 선에서 피드백을 드릴 수 있도록 준비해갈게요.”


연습을 마무리 하자 마자, 내친김에 명절 워크샵 단톡방에 글을 남겼다. 그럴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좀 더 연구하고 연습할 것만 같았다.


“다가올 추석 때는 Chew Tobacco Rag과 Hide and Seek을 해요.”


동생이 한마디 남겼다. 그러나 이 두 개의 라인은 세계적으로 보이콧당한 안무였다.


“필요하시다면 준비해서 알려드릴 수는 있는데, 성범죄 연루되었던 윌리엄이라는 사람이 만든 거라, 우리나라에선 아마도 틀어줄 곳이 없을 거예요.”


지터벅 스트롤을 위한 노래도 마찬가지였다. 하루는 모두가 떠난 바에서 지터벅 스트롤을 연습하고 있는데,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형, 이거 관련한 노래도 바에서 못 트는 거 알아요?”

“왜?”

"작곡가가 성범죄 전력 때문에 보이콧당했거든요."

https://youtu.be/h6-R_w59pk0

<지터벅 스트롤 안무곡 : At the Wood chopper's Ball>


https://youtu.be/kj769vtv0TQ

<금지곡 ‘Steven Mitchell의 Jitterbug Stroll’>


금시초문이었다. 바에서는 매번 노래를 ‘At the Wood chopper's Ball’ 로만 맞춰서 췄기 때문에, ‘Steven Mitchell의 Jitterbug Stroll’은 그저 다른 버전인가보다 싶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작곡가였던 Steven Mitchell은 성범죄에 연루된 사람이었다. 이 버전의 노래가 항상 안 나와서 아쉬웠던 나는 이 사실을 깨닫고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마찬가지로 Chew Tobacco Rag과 Hide and Seek을 동영상을 보며 힘들게 안무를 땄는데, 바에서 출 수 없다니 너무 안타까웠다. 신나는 음악이기도 하거니와 동작들이 너무 멋지고 동작들 사이의 연결도 다른 라인들에서는 볼 수 없었기에 그냥 버리긴 아까울 따름이었다.


과거에 ‘예술과 창작자의 도덕성’을 두고 독서모임의 사람들과 토론한 적이 있다.


"친일파 서정주의 시를 읽어도 될까?"

"그의 시 자체는 아름다운데, 작가의 행적이 그 가치를 훼손할까? 아니면, 그 작품 자체가 정말 좋으면 그 사람이 누구건, 무엇을 하건 인정해야 할 것인가?“


또 더 나아가 미술작품처럼 작가의 가치가 작품의 가치와 가격에 포함이 되는 구조와 저런 안무처럼 재물의 가치, 유형의 가치는 없는 안무 동작의 경우에도 같은 선상에서 봐야 할 것인가? 개인의 범죄에 따라 안무도 보이콧을 당하는 게 옳은 것인가? 등등.


결론만 말하면, 나 역시 "나는 이 안무가 좋아도, 의식 있는 공동체가 그것을 거부했다면 그 결정을 따르는 것이 맞다."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안무를 함께 출 수 없다는 건 여전히 아쉬울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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