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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보뽈로니오 Feb 25. 2018

그 프랑스 놈

열세 번째 이야기. 멘도사(Mendoza)

 경솔하게 판에 뛰어들었다가 내 손에 들린 패를 대부분 읽혔다. 다 지나간 일에 뭘 그리 집착하냐고 따져도 해인 앞에서는 속수무책. 질투가 많은 해인은 알아낸 패를 재조합해가며 이따금씩 나를 압박하는 질문을 하곤 했다. (처음에 너무 재밌게 들어줘서 나는 나란 사람이 거쳐온 삶의 궤적까지도 사랑해주는 줄 알았다. 심지어 해인이는 가을방학의 ‘3월의 마른 모래’를 좋아한다며 과거 내가 어떤 연애를 했든지 이제 우리가 함께 있는 게 더 중요한 게 아니냐라고까지 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내 차례다. 네 달이라는 시간 동안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자랑스레 말하며 도시 구석구석을 소개해 줄 때도, 말끝은 얼버무리며 흐렸다. 에둘러 설명을 하지만, 구체적이진 않다. 많은 부분을 내어주고 얻은 하나의 굵은 단서, 멘도사와 그 프랑스 놈.


 처음에 내가 느낀 질투는 억하심정에 가까웠다. 니가 그렇게까지 나를 괴롭혔으면, 나도 한마디 해보자란 식. 난 사실 이런 쪽의 질투에는 밝지 않다. 아무렴 어때 다 지나 간 이야긴데. 그래서 우리의 여정이 멘도사로 가까워질 때, 해인이 거기서 사귄 친구들을 다시 보러 가고 싶다고 했을 때, 진심으로 동의했다.  

험준한 안데스 산맥을 따라 구불구불한 도로가 끝없이 이어진다.


 하지만 버스가 칠레 산티아고를 떠나 안데스 산맥에 접어들면서, 칠레 여행을 위해 멘도사를 떠났다가 그 프랑스 놈이 너무 보고 싶어 안데스 산맥을 세 번 넘었다는 해인이의 무용담이 떠올랐다. 물론 몇 번의 연애를 거치며 나도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줘본 적이 있었다. 그래도 해인이가 나에게 품고 있을 마음이 누군가에게 한 번쯤은 가 있었다는 사실은 어딘가 모르게 서늘했다.  


 도착과 동시에 감회에 젖은 해인이의 표정을 보니 기분이 더 묘해졌다. 해인은 그저 자신의 옛 시간을 그리워하는 걸까, 아니면 잊고 있던 사랑의 감정이 떠오른 걸까. 흥분했다가, 차분해졌다가 반복하는 해인을 보면서, 아무 잘못도 없는 도시가 미워보이고, 그놈과 여기선 무엇을 했을까 라는 상상만이 맴돌았다.


멘도사의 한 광장. 맑은 날씨에 산 마르틴 장군은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 프랑스 놈과 해인은 매일을 함께 보냈다고 했다. 그놈과의 추억이 멘도사 구석구석에 흩뿌려져 있을 거고, 해인이 만나러 온 이곳 친구들은 그놈과 해인을 하나로 기억하고 있을 거다. 애초에 이 곳에 꼭 들리고 싶다는 결정 속에 어떤 생각과 감정을 품고 있을지는 해인만이 아는 노릇. 다시 와서 보니 옛날 같지 않다며 시시한 척 툴툴거리는 건 그냥 나 들으라고 해주는 말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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