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내가 서른 살일 때 죽었다. 엄마는 쉰여섯이었다. 생 전에 엄마가 한 말이 생각났다. 나는 오래 살진 못할 테니, 내 환갑 생일 파티는 춤도 추면서 재밌게 하자. 남들은 이제 잘하지도 않는 환갑잔치지만 엄마한테는 얼마 안 남은 생일일 수 있었으니까 즐겁게 보내고 싶다는 얘기였다. 그냥 그걸 못해준 게 생각나서 슬펐다.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많이 아팠다. 그건 내가 지금은 흔하지만 내 시절엔 흔하지 않았던 외동인 이유이기도 하다. 엄마가 아프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괜히 상상하게 된다. 장례식장에 오신 엄마의 학창 시절 동창께서는 항상 밝게 웃었던 예전 엄마의 모습을 회상하며 이야기했다. 옛날 사진 속 엄마는 예쁜 얼굴로 활짝 웃는 모습이 가득하다. 그 웃음이 계속 지켜졌더라면. 마치 영화 '애브리 띵 애브리웨어 올앳원스'에 나올 것 같은 평행 세계를 상상해보고는 한다. 엄마가 가지고 있었던 아름다운 예술적 잠재력들이 꽃피워지고, 충분히 그것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는 아름다운 중년의 여성의 모습이 그려진다.
안타깝게도 내가 살고 있는 평행세계는 그 버전이 아니긴 했다. 날 가장 마음 아프게 하는 것은 결국 엄마의 삶이 끝까지 아픔과 고통으로 마무리되었다는 거였다. 그녀는 끝끝내 현실의 삶에서 구원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그 '구원자'의 역할을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통스러운 그녀의 삶에서 행복을 주는 단 한 가지는 착한 딸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착한 딸만큼 그녀의 마음과 삶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딸은 그의 엄마를 연민했고, 완벽히 공감했으며, 그녀를 대신해 성공하기를 꿈꿨다. 언젠가 자신이 그녀를 구원할 것이라 믿으며. 딸의 마음에는 책임감이라는 이름의 부채감이 무겁게 쌓여 갔다. 엄마는 몸이 아플수록 딸을 의지했으며, 타인을 생각할 여력이 없어졌다. 자신의 처지밖에 생각할 수 없는 이기적인 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생존 본능이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구조하러 온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는 것과 비슷했다. 딸은 그런 엄마가 무척 미웠고, 싫었으며 너무나도 사랑했다.
마음의 부채감이 극도로 쌓였던 어느 시기에, 결국 딸도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양극성 장애. 유전율이 높은 병이라고 했다. 결국 엄마의 병을 내가 따라가는 것만 같아서 나는 극도로 무섭고 불안해졌다. 불안은 허상이었다. 아픈 것은 내가 무의식 중에서 닮고 싶지 않았던 부모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결국 나는 엄마와 나를 분리시켜야 했다. 나는 그녀의 구원자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때 나는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과 헤어진다는 것은 너무 큰 고통이었다. 연인이었던 사람과 헤어지는 것, 사랑했던 강아지의 죽음, 사랑했던 가족의 죽음. 모두 일어날 일이었고, 결국 일어났다. 나는 아팠던 시기 내내 사실은 이별을 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과 미리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어서 너무 아팠다. 내가 아팠던 시기는 엄마가 돌아가시기 몇 년 전이지만, 그때 미리 이별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엄마의 죽음은 갑작스럽긴 했지만, 항상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던 터라 견딜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빨리, 나의 삶에서 구원자 역할이 끝났다. 30년간 묶여있었던 엄청난 책임감으로부터의 해방. 엄마를 평생 아프게 한 하나님이 미우면서도, 날 해방시켜 줘서 고마웠다.
나는 이 세상에서 우리 엄마를 가장 사랑한 사람 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그녀를 가장 많이 기억할 사람이고, 그 때문에 가장 많이 눈물 흘릴 사람이다. 나는 내 애증의 엄마가 항상 아름답게 기억되도록 만들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