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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호랑 Feb 14. 2020

전시디자인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

아카이브 전시의 전시디자인을 위한 교과서적 제언

전문분야로 부상한 ‘전시디자인’


시각예술 분야의 전시에서 디자인의 중요성은 날로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이와 같은 경향은 지난 2010년을 전후해 본격화됐다. 국공립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전시디자이너를 직제에 편성해 전문 인력을 채용하기 시작했고, 전시디자인을 전문 과업으로 이해하는 흐름이 형성된 것이다. 2020년 현재에도 국립현대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한글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서울시립미술관 등 주요 국공립 미술관과 박물관에 고용된 전시디자이너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디자이너를 직접 고용하지 않은 미술관이라 하더라도 전문 디자인 스튜디오나 디자인 컨설턴시와 협업하는 경우가 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사립미술관의 경우도 유사하다. 대림미술관 같은 기업 소유의 일부 대형 상업 미술관에서는 관내 디자이너(in-house designer)에게 전시에 필요한 디자인의 제작이나 생산을 전담케하고 있는데, 물론 여기서 전시디자인은 전시장(공간)과 전시 홍보물(포스터, 리플릿 등의 그래픽)을 포괄한다.


이와 더불어, 일부 미술·디자인 대학은 전시디자인과를 만들어, 전시디자인 전문 인력의 양성이라는 현장의 요구에 대응하고 있다. 종래에 실내디자인이나 공간디자인의 차원으로 다뤄지던 것에서 벗어나, 전시디자인이 독자적인 영역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일련의 경향은 과거에 전시 ‘기획’과 선명히 구별되지 않거나, 기획에 따르는 부차적 과업 정도로 여겨지던 전시디자인이 현재 그 못지않은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근래에는 기획 단계부터 디자인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전체 전시의 향방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례도 등장하고 있고, 전시디자이너가 미디어의 주목을 받는 경우도 생겼다. 불과 십여 년 전까지 전적으로 기획자의 소관이었던 전시디자인 업무는, 이제 전문 디자이너가 맡아야 할 전문적이며 독립적인 과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아카이브 전시’ 개념의 등장과 확산


한편 ‘아카이브 전시’ 역시 최근 몇 년 사이 그 등장 빈도가 크게 늘어난, 비교적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전시 형식이다. 사실 이 용어의 용법이 명확히 정립된 것이라 보긴 어렵다. 다만 엄밀함을 요하는 개념적 논의를 미뤄둔다면, ‘일정한 의도를 가지고 축적한 자료 그 자체’, 혹은 ‘자료를 수집하고 보존하는 특정 장소나 기관’을 지칭하는 아카이브의 개념이 시각예술 분야로 침입해 전시의 형태로 구체화됐을 때, 대체로 이를 아카이브 전시라 통칭한다 볼 수 있다.


단언하기 어려우나, 아카이브 전시가 확산된 계기 중 하나로 2013년 베니스 비엔날레 《백과사전식 궁전(The Encyclopedic Palace)》과 같은 기간 프라다파운데이션에서 열린 전시 《When Attitudes Become Form: Bern 1969/Venice 2013》를 꼽을 수 있을 듯하다. 특히 프라다재단의 전시는 1969년에 스위스 베른에서 열린 《태도가 형식이 될 때(When Attitudes Become Form)》전을 재현한 것으로, 이 원본 전시는 예술 작품(오브제) 보다 창작 '태도'나 '과정', 예술가의 '사유' 등에 주목하며 각종 자료와 편지, 미완의 작품마저 전시의 소재로 활용한 전설적 전시 기획의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국내 주요 미술관에서 최근 몇 년 동안 개최한 전시 사례로 거칠게 한정하면, 아카이브 전시는 건축이나 디자인 같은 소위 비 순수미술 장르가 제도권 미술관에서 소비되기 시작한 흐름과도 깊게 연관된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2013년에 열린《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전이나 2017년에 열린 《종이와 콘크리트: 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1997》전,  2014년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 건축전의 한국관 등을 그 대표적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순수미술과 달리 전시를 전제로 제작하지 않은 비 순수미술 장르의 생산물은 대개 그 형식이나 크기 등이 전시에 적합하지 않은데, 이를 전시의 맥락으로 이입시키기 위해 제작 의도와 과정, 그 배경 상황과 맥락, 때때로 창작자의 삶과 철학까지 제반 요소를 두루 소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비 순수미술 장르의 전시에서 기존과 다른 전시 문법과 메커니즘이 요구되었고, 이에 적합한 형태의 하나로 아카이브 전시가 각광받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카이브 전시 디자인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비주얼 전시’, ‘인스타그램(인스타그래머블) 전시’와 같은 용어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일부 상업 미술관에서 화려한 볼거리 위주의 전시를 만들어 상업적 성공을 거두면서, 이러한 전략이 상당히 널리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미술 혹은 시각예술 전시의 대중화라는 긍정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빈약한 내용을 넘치는 디자인으로 덮은 전시가 반복해 등장하고 있는 현상에는 분명 비판적 성찰 거리가 존재한다. 특히 전시'디자인’의 역할과 중요성이 점차 강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이 전시의 흥행과 상업성에만 관계된 일종의 기교(테크닉)로 비칠 수 있다는 점은 우려스럽다.


오랫동안 디자인이라는 용어가 오남용 되어 온 것처럼, 전시디자인이 말초적 감각을 자극하는 도구로만 여겨져서는 곤란하다. 특히, 특별한 시각적 ‘볼거리’를 확보하기 어려운 아카이브 전시를 조직하는 입장에서, 전시디자인에 이러한 도구적 역할을 요구하고 싶은 충동을 쉽게 느낄 수 있으리라 본다.


시각적으로 매끄럽고 아름다운 대상을 소망하는 것을 비난할 수 없듯, 그러한 전시를 추구하는 것 자체를 나쁘게만 보긴 어렵다. 그러나 예쁘고 멋진 전시디자인만을 추구하기 이전에, 혹은 그와 함께 의식해야 할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전시디자인은 ‘전시가 담고자 하는 내용, 의미, 방향성, 문맥 따위를 시각적·형식적으로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를 고민하고 해결하는 데 집중해야 함이 마땅하다.


이런 맥락에서 '좋은' 아카이브 전시의 전시디자인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조금 엉뚱하게도, 그러나 분명히, 적절하고 유효한 시각으로 포착하고 발굴한 가치 있는 아카이브의 확보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그 아카이브를 통해 무엇을 얼마나 보여줄 것인지를 명료하게 아는, 다시 말해 ‘전시의 지향’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기획임은 자명하다. 이 선행요건들이 갖춰진다면, 아카이브 전시의 근본적 목적과 방향성에 다가서려 성실히 탐구하면서도 이를 적절히 시각화할 수 있는 디자이너를 찾고, 충분한 비용과 시간을 들여 협업하면 될 일이다.


분명 여기에 쓴 내용은 추상적이며 또 교과서적이다. 그러나 교과서적 제언보다 경계할 것은, 이런저런 사정을 핑계 삼아 점점 그와 거리가 먼 결과를 추구하게 되는 경우가 아닐까 싶다.






덧붙임

*이 글은 'ACC 라이브러리파크 중장기 발전방안 연구 및 공간 개선 기본계획 수립 용역 연구'(2019-2020)의 일환으로 작성한 글을 수정·편집한 것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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