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문신(文信) : 우주를 향하여>(2022.9.1.-2023.1.29.)가 오래도록 논란이 되는 모양이다. 전시 내용이 아닌 디자인이 그 이유다. 작품을 압도하는 날카롭고 복잡한 형상을 가진 좌대, 여러 질감과 색감이 뒤섞인 공간과 디스플레이 디자인이 전시 관람에 방해가 되었다는 문제제기가 잇따랐기 때문이다. 이 전시가 국립 미술관에서 열린 현대 미술 전시라는 점, 조망하려는 작가의 작품세계와 관계없는 과잉된 장치를 덧붙였다는 점 역시 문제의 핵심으로 지목되고 있다.
물론 이와 다른 견해도 있다. 아무리 한 명의 현대 미술 작가에 주목하는 전시라 할지라도 전시에서 기획자의 해석과 의미부여가 중요한 만큼, 이와 조응하는 전시디자인의 적극적 개입도 필요하다는 류의 의견이다. 특히 <문신> 전시의 경우, 잘 알려진 작가에 관해 기성과 다른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잉된 디자인을 이해할 만하다는 시각도 존재하는 것 같다.
짐작건대 이 논란의 요체는 전시디자인의 차원을 넘어선 데 있을 것이다. '포스트 화이트큐브 혹은 포스트모던 시대 전시의 역할은 무엇인가'와 같은, 근본적 질문과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전시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가운데서도 작품의 온전한 감상이 변치 않는 제일의 기준이어야 한다는 생각과, 큐레이터의 ‘창조적’ 역할을 중시하며 기존과 다른 전시 형식과 개념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는 생각이 충돌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금 결이 다를지 모르나, 일련의 문제는 '새로운 전시'의 역할을 논하는 데 빈번히 등장하는 ‘포스트 뮤지엄’ 개념의 딜레마와도 관련성이 있어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동시대 미술관/박물관이 과거보다 더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태도를 갖출 것을 주문한 에일린 후퍼 그린힐(Eilean Hooper-Greenhill, 1945~)의 이 개념이, 현실에서는 종종 시장 원리에 근거한 자본 친화적 활동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포스트 뮤지엄을 표방한 기관들이 연예인을 앞세우거나(서울시립미술관), 뷰티 브랜드에 박물관 상표를 넘겨주며(V&A) 논란을 일으킨 사례를 떠올려 보아도 좋겠다.
‘문턱을 낮추고’, ‘관객에게 다가가는’ 민주적, 공공적 방향성을 모색하는 일이 곧잘 시장의 논리와 행태를 수용하는 것으로 이어져 획일화되거나 질적으로 저열해지는 포스트 뮤지엄의 딜레마는 다시 전시디자인에서도 반복된다. 미술관과 박물관이 ‘관람객 인식과 경험의 확장’이라는 목적을 내세우며 전시디자인에 힘쓰는 모양새는 상당 부분 ‘공간 체험’을 매개로 작동하는 상업 공간의 논리를 닮아 있기 때문이다. ‘힙00’과 ‘핫00’, ‘000길’ 등으로 수식되는 장소의 범람이나, 근래 이색적인 공간을 조성해 유명해진 특정 백화점 사례는 공간에서의 경험 자체가 소비 대상이 된 최근 경향의 단면일 것이다. 전시디자인으로 화제가 된 근래의 몇몇 전시들이 여러 색감과 질감을 활용하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유사한 특징을 보인 점도 같은 맥락에서 언급할 수 있다.
전시디자인과 관련해 공공과 상업 영역의 경계가 모호하게 흐려지는 현상으로 더 언급할 만한 것은 국공립 미술관/박물관 전시를 상업색 강한 국제 디자인 공모전에 출품하는 관행이다. 공공의 재원으로 열린 전시가 그 디자인만을 따로 떼어내, 소비 산업의 맥락에서 유효하게 작동하는 출품-수상 메커니즘에 스스로의 성취를 종속시키는 모습은 어딘지 초라하고 씁쓸하다. 게다가 이러한 수상 실적이 미술관/박물관의 권위나 명성에 크게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행위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근본적 목적과 의미를 곰곰이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지적이, 전시디자인 전반이 무용하다는 이야기로 이해되지는 않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분명 내용과 형식을 통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전문가들이 국공립 미술관/박물관 소속으로 활동하며 만들어낸 긍정적 효과가 있다. 무엇보다 이 기관들의 전시가 기획과 유기적으로 연동되며 명료해지고 세련미를 갖추면서 쾌적한 관람이 가능해진 점을 꼽을 수 있다. 이런 효과는 평소에 체감하기 어려우나, 형식의 미흡함이 유독 두드러진 전시를 접할 때 새삼 실감하게 된다.
때때로 디자인에 유달리 힘쓴 전시가 전시 형식을 다변화하고 내용의 입체적 이해 가능성을 확장하는 순기능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특히 이러한 효과는 비 순수미술 장르를 위시한 아카이브 전시나 시대의 흔적을 간직한 물건들에 서사와 정보를 부여해 재해석, 재배치하는 박물관 전시에서 더 유효하게 작동할 여지가 있다. 이따금씩 지적되는 ‘과잉’의 사례를 경계한다면 전시의 의도, 목적이 디자인을 통해 더 효과적으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더 중요하게는, 2010년을 전후한 시기에 전시디자인 직제를 편성하며 시작된 국공립 기관과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의 협력 관계가 하나의 생태계 혹은 문화적 관행을 만들었다는 점도 언급할 수 있다. 그 협력의 범위는 오늘날 공간이나 전시 그래픽 전반까지 확장되었고 여기에 많은 디자인 창작자들이 관여하고 있다. 미술관/박물관이 외부 전문 인력의 힘을 빌려 전시의 표현력과 전달력을 높인 점, 디자인 스튜디오가 비교적 디자이너의 창의성을 존중하는 자유도 높은 일감의 수를 늘린 점도 빠뜨릴 수 없는 효과다.
요컨대, 전시디자인이 주목받고 있는 최근 현상의 이면에는 오늘날 전시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와 같은 근본적 질문을 포함해 더 깊게 생각해 볼 만한 지점이 있다.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복잡하고 모호한 현상을 마주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빠른 긍정과 부정이 아니라 현상의 명암을 충실히 살피려 애쓰는 일일 것이다. 전시디자인의 효과나 전시디자이너의 창의성을 신성시하거나 찬양하지 않고, 그렇다고 평가절하하거나 기각하지도 않는 건조한 태도. 그것이 전시디자인에도 그 현상을 지켜보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일인 것 같다.
이 글은 월간디자인 2023년 4월호 전시디자인 특집 에세이 코너에 송고한 초고를 다듬은 것이다. 잡지에 실린 글은 원문의 구조와 표현이 적지 않게 변형되고 삭제된 것이기에 이곳에 새로 공유한다는 사실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