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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호랑 Nov 04. 2023

오늘날의 디자인에 관해 생각해 볼 것들

이 글은 2023년 11월 1일 wrm에서 열린 '디자인 문화 워크숍/강연: 신중한 질문들'의 강연 원고를 서론부와 결론부 위주로 남기며 편집한 것이다. 원 문서에는 표기한 각주가 삭제된 상태임을 밝힌다. 



“A good question is always greater than the most brilliant answer.” 

– Louis Kahn(1901-1974)


“모든 디자인은 현상 유지에 기여하거나 현상을 전복하기 마련이다.”

 – Tony Fry(1944-)


우리 삶이 위태롭다는 이야기가 도처에 흘러 넘친다. 기후 위기, 식량과 물 부족, 부의 양극화와 불평등 문제, 세대와 성별, 민족, 종교 등으로 인한 갈등의 심화가 22세기를 상상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빠르면 이십여 년 안에 인류 문명이 붕괴하리라는 전망마저 등장하고 있을 정도다(‘2050 거주불능 지구’). 그야말로 우리는, 지속에 관해 위기 중의 위기인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러한 비관적 현실을 자각하는 일과 오늘날의 디자인에 관해 고민하는 일은 언뜻 서로 무관한 일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과연 그런가? 우리 삶의 대부분이 디자인 결과물로 채워져 있다면, 그리고 디자인이 대상을 보기 좋게 만드는 행위 이상의 무엇이라면, 디자인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논하는 데 필수적인 일이 아닐까. (“사물의 세계와 정치의 세계가 교차하는 곳에 디자인이 자리 잡고 있다” – 서동진) 혹은, 적어도 디자인은 지속불가능의 문제를 직시하고 미래를 그리는 또다른 접근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 글/강의는 거대 위기의 국면에서 지금과 다른, 지금보다 더 나은 디자인의 역할을 시급히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그러나 거창한 이론이나 구체적 대안, 성급한 낙관 혹은 비관론을 내놓으려는 것은 아니다. 아직 그럴 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미 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이 글과 강의는 현실에서 작동하고 있는 디자인의 모양새를 비판적으로 살피고 그에 관해 질문하는 데 주력해 보고자 한다. ‘이래도 좋은가?’, ‘이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와 같은 기본적인 질문 말이다. 대안을 논하기에 앞서 문제를 문제로,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는 것. 즉 현실의 진단과 인식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주변의 익숙하고도 수상한 디자인 현상과 개념들의 실체는 무엇인지, 그것은 무엇을 함의하는지 차근히 따져보도록 하자. 이는 분명 오늘날의 디자인에 관해 생각해 볼 만한, 아니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들일 테다.



1. UX부터 브랜딩까지

:『새시각』 2(2023)에 수록된 「백화점과 결합한 경험, 디자인, 브랜딩에 관해 생각해 볼 것들」 중 일부를 개고한 내용.


근래 이곳 저곳에서 ‘경험’을 언급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소셜미디어의 성장과 함께 부쩍 빈번해진 경험이란 말은 소비자본주의적 맥락으로 변용된 대표적 개념 중 하나다. 종래 이 단어는 현상의 감각과 지각을 통해 인식을 형성한다는, 다시 말해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 ‘지혜는 경험으로부터 온다’는 익숙한 말과 같이) 타불라 라사(Tabula Rasa, 백지)를 채워가는 과정에 관한 의미로 쓰였다. 그러나 오늘날 경험은 주로 소비와 관계된 흥미롭고 이색적인 즐길 거리나 일시적 체험 정도로 납작해진 경향을 보인다. (소셜 미디어에 난무하는 각종 ‘소비 경험(체험) 보여주기’를 보라. 혹은 주위에서 ‘경험’을 설파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보라)


(중략)

   



2. 배민 을지로체, ‘레트로’로 공공의 디자인을 전유하기

: 『문화/과학』 110(2022)에 수록된 「범람하는 레트로 디자인과 몇 가지 문제들」 중 일부를 개고한 내용.


이번에는 개념을 조망하기보다 구체적 디자인 결과물 사례를 살펴보자. 한동안 유행한 레트로 열풍과 디자인에 걸쳐 있는, 주목할 만한 사례는 을지로체일 것이다. 글자를 다루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을 을지로체는 배달 앱 서비스 배달의민족(이하 배민)에서 2019년 개발한 서체다. 배민은 2012년부터 꾸준히 거리의 오래된 간판 글씨를 바탕으로 서체를 개발하고 발표해 왔는데, 을지로체는 유일하게 구체적인 레퍼런스(지명)를 밝힌 경우에 해당한다. 


(중략)




3. 환경 없는 친환경 디자인

:『문화/과학』 107(2021)에 수록된 「진짜 친환경을 위한 디자인」 중 일부를 개고한 내용.


기후 위기, 생태 위기의 국면에서 ESG, SDGs, 탄소중립, 플라스틱 제로와 같은 개념이 부상하고 있다. 디자인 분야에서도 소위 ‘친환경’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도처에 널린 것이 친환경 디자인이니 환경 문제는 곧 해결될 것 같아 보인다. 과연 그런가? 친환경 디자인은 진정 환경을 고려하는가? 빅터 파파넥은 지속 가능한 디자인(sustainable design)이라고 특별히 지칭되는 영역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참으로 그렇다. ‘친환경 디자인’이란 말과 현상은 역설적으로 여태껏 디자인이 환경과 지속 가능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최근의 현실에서도 이 말이 그닥 진실한 언어로 쓰이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 (자사의 친환경 디자인 제품을 ‘더 많이 구매해 바다를 보호하라’고 외치고 있는 패션 브랜드들을 보라!) 여러 이유에서 이 용어는 분명, 없어져야 마땅한 말이다. 다음의 사례들을 통해 친환경 디자인의 실상을 살펴보자.

 

(중략)




결론을 대신하여


이 글/강의에서 디자인만큼 반복적으로 언급된 것은 아마도 ‘자본주의’일 것이다. ‘야수 자본주의’, ‘식인 자본주의’와 같은 무시무시한 딱지가 붙고 있는 바로 그 체제 말이다.(김누리와 낸시 프레이저를 참고하라) 바로 그것이 새로운 디자인을 상상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게 검토해야 할 의제라 할 수 있다. 디자인에 가식, 가장, 미화의 역할을 부여해 온 주범이기 때문이다. 이것과 디자인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 혹은 이것을 넘어선 디자인의 역할과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 그것이 마케팅에 가까운 ‘불쉿 잡’으로 전락한, 자본에 봉사하는 디자인에 무엇보다도 필요한 일일 것이다.(나이젤 휘틀리의 다소 거친 표현을 빌리자면, ‘자본주의의 똘마니’)


윌리엄 모리스, 독일공작연맹과 같은 익숙한 현대 디자인의 역사를 보자. 공리주의적, 민주적 이상에 근거해 현실 문제에 개입하고 보편적 삶의 질을 고양하고자 애써 온 이 역사의 ‘실패’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것은 아마도, ‘조형’과 ‘기술’ 차원에서는 그 문제의 해결을 기대하기 어렵하다는 사실이 아닐까. 그보다 디자인이 작동하는 기반 논리, 즉 체제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이 글/강의는 거창한 이론이나 구체적 대안, 전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문제에 대해 먼저 고민했던 이들이 적지 않다. 그것을 상기시키는 것으로도 충분하리라. 가령 지금으로부터 꼭 60년 전에 켄 가렌드를 포함한 디자이너 20인이 ‘중요한 것 먼저 선언’(The First Things Frist Manifesto, 1964)에서 제기한 내용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보다 더 멀리는 윌리엄 모리스(1834-1896)와 존 러스킨(1819-1900)의 이상주의, 더 가까이는 빅터 파파넥(1923-1998), 나이젤 휘틀리(1953-), 토니 프라이(1944-), 에치오 만치니(1945-), 존 타카라(1951-) 등 적잖은 인물들을 거론할 수 있다. 


디자인 영역 밖으로 시야를 넓히면, 낸시 프레이저(철학, 1947-), 케이트 레이워스(경제학, 1970-), 토마 피케티(경제학, 1971-), 나오미 클라인(언론인, 1970-), 사이토 고헤이(경제학, 1987-),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언론인, 1982-) 등 구체적인 나열이 민망할 만큼 현 체제의 위험성과 지속불가능성, 그리고 대안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논의들이 활발하다. 물론 이들 주장은 각기 조금씩 다르며, 맹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고로 당연히 모든 내용에 동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현실의 문제를 시급한 것으로 인식한다면, 그간 디자인 분야에서 별로 중요하게 다루어져 온 적 없는 이러한 논의들을 다시 살필 이유는 충분할 것이다.


빅터 파파넥은 “디자인이 모종의 의미 있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활동.”이라고 했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건물을 짓는다는 것은 생활 방식을 형상화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궁극에 디자인은 풍요로운 삶, 좋은 삶(부엔 비비르, buen vivir)의 모양새와 질서를 축조하기 위한 활동이어야 한다는 태곳적 이상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출발을 위해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는 일이 중요할 테다. 그래야 더 이상 그 소모적 일에 역량을 쏟지 않고, 본격적인 대안의 옥석 가리기에 돌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놀라을 정도로 비판적 디자인 문화 담론이 빈약한 우리 현실에서, 부디 이 내용이 소중한 시간을 내 참여한 여러분들에게 ‘사유의 일용할 양식’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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