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두밭_1
시어머니가 연고지도 없는 충청북도 영동 상촌면에 1,750평의 포도밭을 덜컥 샀다. 시이모가 사돈에 꿔 준 돈을 못 받아 영동 황간에 있는 땅으로 대신 받았다며 땅 구경을 시켜준 날, 옆 마을 매물로 나와 있던 포도밭을 산 것이다. 남편과 나는 어머니가 동생에게 샘이 난 것 같다 했지만, 어머니는 오래전부터 농사에 꿈이 있었다고 했다.
시어머니는 자식이 하나다. 아버지를 어린나이에 여읜 남편은 어머니와의 정이 돈독했다. 남편은 여든을 앞둔 나이에 농사는 무리라고 어머니를 말렸지만 꺾을 수 없었다. 시어머니는 포도밭은 손이 많이 간다며 갈아엎고, 다른 과실나무보다 키우기에 수월하다는 호두나무를 심겠다고 했다. 물이 잘 빠지게 하기 위해 굴삭기로 10m 간격 긴 고랑을 파고 고랑 위 둔덕에는 5m 간격으로 호두나무 120그루를 심었다.
밭 귀퉁이에 각종 농기구를 넣어 둘 컨테이너 창고를 만들었다. 전봇대에서 전기선도 끌어왔다. 시어머니는 서울에서 여섯시간이 넘게 전철과 기차, 버스를 갈아타며 호두밭이 있는 상촌으로 닷세마다 내려가 열흘씩 머물다 올라왔다. 내려가면 며칠씩 쉴 수 있는 시골 방도 빌렸다. 인부를 들이고 농자재와 농기구를 사며 평생 아끼며 모은 돈을 호두밭에 모두 쏟아부었다.
이, 삼 년이면 수확을 할 수 있는 재래 호두에 비해 작고 고소한 맛이 강한 전통 상촌호두는 십년을 키워야 과실이 열린다. 상촌 호두나무가 한 해 두 해 커 갈수록 시어머니의 시간도 흘렀다. 호두나무를 심은 지 여섯 해가 지나자 시어머니는 몸져누웠고, 호두밭은 동네 어르신 부부에게 도지비용 이십만 원을 받고 맡겼다. 시어머니는 수확을 두 해 앞둔 시월, 아들 품에서 눈을 감았다.
호두밭은 남편에게 상속됐다. 도지를 맡은 어르신 부부 중 할머니도 수확을 한 해 앞두고 먼저 떠났다. 할아버지는 도지를 포기했다. 상속받은 땅에 농사를 짓지 않으면 매해 세금을 땅값의 20%씩 내야 한다. 서울에서 맞벌이로 일하고 있기에 상촌에 가 호두밭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땅도 내놓고 도지 맡길 사람을 구하러 상촌에 수시로 내려갔다.
지방의 인구는 고령화로 해가 갈수록 감소하고 있다. 상촌도 마찬가지다. 농사지을 사람이 모자랐다. 매물로 나온 땅도 수두룩했다. 수소문 끝에 건넛마을에서 도지 할 사람을 겨우 구했는데 그는 도지 계약을 한 후 호두나무가 다 죽었으니, 호두나무를 다 베고 감나무를 심겠다고 했다. 비료도 뿌렸으니, 비룟값과 인건비를 달란다. 동네 어르신께 조언을 구했다. 고심 끝에 비룟값은 주고 도지 계약을 끝냈다.
‘다 죽었다고? 잎이 나왔는데?’ 믿을 수 없었다. 호두나무를 살려보기로 했다. 호두에 대해 모르면서 남에게 맡기는 것도 아니다 싶어 직접 호두 농사를 지어보기로 했다. 동네 어르신께 상촌에서 호두 농사를 크게 짓고 있는 아저씨를 소개받았다. 삼월엔 비료. 오, 칠, 구월에는 예초와 제초. 농약은 유월 등등 여러 가지 정보를 상세히 배웠다.
해보지 않던 일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으니 회사 일을 하면서도 주말에 내려가 일할 호두밭에 온 정신이 집중됐다. 컨테이너 창고에 굴러다녔던 휘발유 예초기 외 내가 쓸 가스 예초기도 한 대 샀다. 전기톱, 보호대, 안전모, 목장갑, 고무장갑, 양손 잡초가위, 장대 전지가위, 무릎 장화, 앞치마 등등 필요할 듯한 물건을 계속 사 모은다. 이러다가는 컨테이너 창고 공간이 모자르겠다.
처음 하는 농사에 모든 것에 허둥지둥한다. 예초할 때 남편은 땀이 난다며 예초기에 갈린 풀이 잔뜩 붙은 긴팔 옷을 벗고 반팔로 갈아입었다가 풀 독에 올랐다. 도톨도톨 불긋한 두드러기에 피가 나도록 긁고 또 긁었다. 땅벌 집도 건드렸다. 예초기를 내던지고 뛰는 남편 뒤를 벌들이 윙윙거리며 따라가 이십팔방을 쏘았다. 갈 때마다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일어난다.
나무가 다 죽었다는 도지 아저씨 말과는 달리 호두열매가 꽤 달렸다. 동네 어르신이 호두 달린 것을 보며 예전에는 상촌호두나무 한 그루만 있으면 자식 한 명을 대학에 보냈다는 했다. 십여 년 전 그 사실을 안 시어머니가 호두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 연세에 여기까지 내려와 혼자 힘든 농사를 왜 짓냐는 어르신 말에 “호두가 그렇게 비싸게 팔린다는데 내가 우리 아들 부자 만들려고 그런다”며 밭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 한 명 지나가지 않는 깊은 골짜기 속에서 호두나무를 심고 가꾼 시어머니. 호두나무를 심은 지 십년이 되었다. 오랜 시간 기다리다가 이제야 달리는 호두열매를 보니 두 해를 더 견디지 못한 시어머니가 그리워진다.
드디어 첫 수확이다. 호두 한 알 한 알은 시어머니의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