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랑이: "자기야, 저는 퇴근합니다. 매운 음식 주세요. ㅠㅠ"
몇 달 전, 한국 드라마를 보던 고랑이는 스트레스받는 날 매운 음식을 먹는 주인공이 무척 맘에 든다더니 퇴근길에 이렇게 메시지를 보냅니다. 오늘 하루가 무척 고단했는지, 매운 음식을 찾는 그의 메시지에 어떤 음식이 저녁 메뉴로 좋을지 고민해봅니다.
파 기름을 내고 매콤하게 양념해두었다가 프라이팬 끝을 그을려 불맛을 살린 제육볶음을 해볼까 생각을 했는데, 돼지고기를 미리 해동해놓지는 않았네요. 냉장고의 신김치를 들기름과 참기름에 새콤달콤하게 무쳐 매운 고추를 송송 썰어 넣은 뒤 비빔국수를 해 먹을까 싶다가, 문득 며칠 전에 넉넉하게 사온 쭈꾸미와 낙지 중간쯤인 작은 문어가 종이에 잘 싸인 모습에 오늘 메뉴를 정해봅니다. 매운 음식이 필요한 날에는 이만한 메뉴가 없거든요.
매콤한 낚지(문어) 볶음
당근과 방울양배추를 적당한 크기로 썰고, 양파도 준비한 뒤, 파와 냉장고에 남은 야채들을 적당히 섞어서 볶음 야채를 준비해 줍니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작은 문어를 꺼내어 낙지를 손질하듯 소금과 밀가루를 넣고 박박 걸레를 빨듯이 문질러주며 불순물을 제거해준 뒤, 뜨거운 물에 소금을 넣고 정말 슬쩍 발만 담그듯이 문어를 10-15초 정도 데쳐서 먹기 좋은 크기로 잘 잘라줍니다. 워낙 작은 크기의 문어라 금방 익어요. 제법 통통한 살이 야들야들하게 손끝으로 느껴져서 딱 알맞게 데쳐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밑손질을 한 뒤, 데쳐서 낙지를 볶으면 물도 덜 생기고 빠르게 볶을 수 있어서 질겨지지 않는다고 해서 오징어볶음도 낙지도, 작은 문어도 이렇게 손질을 하곤 합니다.
이제 고랑이의 요청대로, 매콤한 맛을 살리기 위해 매운 고추, 고춧가루, 마늘을 듬뿍 넣고, 맛술과 간장, 생강 다진 것, 된장, 굴소스 까지 살짝 더해 양념장을 새빨간색이 예쁘게 살아나도록 만들어 줍니다. 잘 나누어둔 문어 살점을 양념장에 가득 섞어주며 고춧가루를 더하거나, 다진 마늘을 조금 더 추가하며 보기에도 매콤함이 눈으로 코로 느껴질 정도로 잘 섞어서 재워둡니다. 한국에서 낙지볶음집만큼 화끈하게 맵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고랑이의 스트레스를 날릴 정도로 매운맛 문어(낙지) 볶음이 될 것 같아요!
고랑이가 집에 도착하고 손을 씻는 동안 팬에 기름을 올리고 마늘 편 썬 것을 살짝 볶아준 뒤, 준비된 매콤한 문어를 기름에 치익소리를 내도록 잘 볶아주기 시작합니다. 최대한 빨리 볶는 것이 포인트여서, 센 불에 치익치익 매콤하게 고추기름이 베어나는 냄새가 코를 스치면, 곧바로 야채를 한 번에서 두 번에 나누어 볶아줍니다.
문어를 맛깔나게 볶는 동안, 볶음 옆에는 매운 혀와 속을 잠시 달래줄 새우젓을 넣은 계란국의 계란이 폭신한 노오란 이불 같이 익을 때쯤 초록 초록한 파를 잘 올려준 뒤 국그릇에 담아 봅니다. 그새 다 볶아진 문어 볶음을 둥근 볼에 담고, 참기름과 깨소금을 솔솔 뿌려준 뒤, 다져놓은 김과 쌈야채를 들고 식탁으로 향합니다. 스트레스에 잔뜩 피곤한 얼굴이었던 고랑이는 코를 킁킁 거리며 주방으로 오더니 씨익 웃으며 저녁상 차리는 것을 도와줍니다.
오랜만에 만난 낙지볶음 스타일의 문어 볶음에 저의 입맛도 돌아왔는지 한국에서 거의 울면서 먹던 낙지볶음을 넣어 먹는 소면이나 쫄면, 비빔밥, 속이 확 풀리는 연포탕, 그리고 낙지볶음에 부침개, 낙지 호롱구이, 촉촉하고 야들야들하게 삶은 문어에 초장, 밥알 같은 알이 통통 터지는 매콤한 쭈꾸미에 계란찜 등 갑자기 먹고 싶은 음식들이 줄지어 생각이 납니다.
쌈을 싸서 그리고 야채와 곁들여 통통하고 부드럽지만 쫄깃한 문어 볶음을 곁들여 먹으며, 매콤함이 올라오면 계란국 한 술로 냉온탕을 오가듯이 속과 입을 달래 봅니다. 밖에서 사 먹는 맛에 비교할 수 없지만 맛있다를 연발하는 고랑이에게 아직 한국에 가본 적이 없는 고랑이에게 한국에서 먹을 수 있는 별미들을 이야기합니다.
호호 불며 살짝 매콤함에 얼굴이 붉어진 채로 볶음을 즐기던 고랑이는 제 말을 듣더니 한국에 가면 먹고 싶은 음식 리스트 수첩에 낙지볶음과 연포탕을 적어두겠다고 말합니다. 매콤한 저녁상에 고랑이는 스트레스가 좀 누그러졌는지,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입을 열더니 오늘 직장에서 힘들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와중에 이 매콤한 한 상에 한국사람처럼 소주 한 잔을 찾는 고랑이의 모습에 순간 웃었다가 함께 힘들었던 일을 안주 삼아 식사시간을 마무리해봅니다.
내일은 오늘과는 또 다른 하루가 될 테니까요.
맛있게 매콤하게 스트레스를 날리게 한 끼를 즐겼으나 무언가 빠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볶음밥이요. 소복하게 담긴 볶음 그릇과 후라이팬에 남은 양념을 모아, 냉장고에 있던 찬밥을 꺼내고 김가루와 참기름, 깨소금을 꺼내 오늘의 별미, 볶음밥을 적당히 볶아서 조금은 적은듯한 양만큼 만들어 작은 그릇에 디저트처럼 담아줍니다. 살짝 적은 듯해야 더 맛있게 먹을 수 있거든요.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안 봐도 맛있을 볶음밥 냄새에 고랑이는 '음~'소리를 내며 맛있게 싹싹 비우더니 혹시 내일 점심 도시락으로 이 매콤한 문어 볶음밥을 싸가도 되냐고 물어봅니다.
"밥이랑 문어 볶음, 계란으로 이미 내일 도시락도 준비해놨어.
일하면서 스트레스받으면 점심 먹을 생각하면서 기분 풀라고."
저는 눈을 찡긋하며 식사시간 동안 한 김 식은 런치박스 통 뚜껑을 닫아 냉장고에 넣어둡니다.
내일은 오늘과는 또 다른 하루가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