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은 예술가를 멀리서 보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해에, 더웠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극장으로 가는 길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왕가위를 보러, 나이가 되지 않아 미성년자 관람불가였던 영화를 보지 못함에도 홍콩의 영화감독 얼굴을 보고자 고양시 행신동에서 대학로까지 길을 나섰었다. 1998년 여름. 서태지가 <시대유감>을 발표한지도 2년이 지났지만 검열은 여전해서 '동성애'를 다뤘다는 이유로 왕가위의 6번째 장편영화 <춘광사설> (혹은 Happy Together 아니면 Buenos Aires)은 여저저기 편집당해 너덜너덜한 상태로 개봉되었다. 나는 이 판본을 결국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영화를 너무 보고 싶은 나머지 불법 복제 비디오 테이프를 구해서 보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내 기억의 춘광사설은 무삭제 버전 뿐이다.
나는 여드름 난, 고등학교 2학년짜리 왕가위 팬이었을까? 그것도 아니었다. 중학교 때부터 짝사랑하던 여자아이가 왕가위의 팬이었다. 영화를 좋아하긴 했지만, '왕가위'라는 이름도 알지 못했던 16살. 당시 우리 나라에서는 <중경삼림>과 <타락천사>가 매우 인기였다. 그 아이는 나이차이가 제법 나는 오빠가 둘 있었다. 그래서 서울과 가깝기는 했지만 지역 개발된 정도로나 문화적 수준으로나 시골이라 불려도 그닥 문제가 없을 행신동에서 그녀의 취향은 아주 멋져 보이는 것이었다. 어쩐지 그것에 홀린 것은 나 뿐인듯 했지만, 적어도 내 눈엔 그랬다.
아마 더웠을거다. 어릴 적부터 덩치가 컸던(비만이었던)나는 땀을 뻘뻘흘리며 코아아트홀을 더듬더듬 찾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왕가위를 봤다. 지하에 있던 극장에 계단을 타고 내려오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 난다. 사진을 찾으면 늘 쓰고 있는 그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가끔,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 들어가는 기분을 상상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만나길 기대하고, 나타났을 때 환영의 기분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모습은 어떤 것일까. 무척 멋쩍을 것 같기도 하고. 잘 상상이 안간다.) 지금 생각나는 기억은 그것이 전부다. 그리고 난 그곳에서, 영화도 볼 수가 없으니, 천 장인지 만 장인지만 만들었다고 홍보를 하던 OST를 사왔다. 3만원이 넘어서 나로선 아주 큰 맘을 먹지 않으면 안되었다.
왕가위의 친필싸인과, 영화 포스터, 여러 화보가 큼직하게 들어있는 LP 사이즈의 음반이었다. (음반은 CD)
대충 눈치채셨겠지만, 난 이걸 그 짝사랑했던 아이에게 가져다 주었다. 고마워 했었나? 아마 그랬을 거다. 착한 친구였으니까.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이 음반을 구하고자 수소문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인터넷이 더 활발해지고 나니 찾을 수는 있었지만, 도무지 지불하기 어려운 가격이 되어 있었다. 당시 구입했던 OST 테이프를 가지고 있어서 종종 듣고는 있지만, 아까운 생각이... 드는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나는 이 영화를 재개봉 할 때마다 보러 간다. 극장에서만 세 번 정도는 본 것 같다. 지금은 왕가위의 팬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이 영화가 내가 주는 감상은 영화 자체와는 무관한 것들이 많이 섞여 있다. 그래서 더 특별하게 기억된다. 아마 <빽 투 더 퓨쳐>와 함께 내 유년의 큰 자리를 차지하는 영화가 아닐까.
날이 덥다보니 문득 영화 속 이구아수 폭포와 빙글빙글 돌아가던 스탠드 같은 것들이 떠올라 끄적거려 본다. 가장 위에 걸어놓은 ASTRO PIAZZOLA의 FINALE는 아휘의 어깨를 베고 세상 모르게 자고 있는 보영과 그가 언제 사라져버릴지 몰라 근심에 찬 아휘가 택시를 타고 돌아가는 장면에 흐른다. 이제는 뭐가 어떻게 된건지, 여기가 어디고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될 건지 불안만 가득하다. 피아졸라의 반도네온 선율은 이들이 끝으로 가고 있음을 암시하지만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도 서로가 얼룩처럼 남아있을 거라는 걸 그들도 알고 우리도 안다. 영화는 Danny Chung의 Happy Together가 흐르며 흥겹게 끝이 나지만, 카세트를 붙잡고 울던 아휘의 얼굴이 한 동안 떠나지 않는다.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던 해, 왕가위는 서로에게 사라지지 않을 어떤 얼룩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야 하는, 버텨내야 하는 시간에 대해 그려내었다. 여름이 가기 전에, 다시 한 번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요즘 좀, 시간을 버티는 중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