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담다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만추 Apr 30. 2021

[이 시국에 장막 희곡] 엉킨 실

노만추의 Write with me (3)



나는 그저 선생님이 그날 정확히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2015년의 어느 가을날, 지하 강의실에 모인 우리들은 돌아가며 각자 관심이 가는 이슈 세 개씩을 이야기했다. 내가 그때를 더듬어 꺼내고 싶었던 선생님의 이야기는, 우리의 발표가 모두 끝나고 다음 과제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아마 그즈음에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A가 B를 죽였다는 Fact예요. 그러나 그 죽음의 이유를 네모라고 보거나 세모라고 보는 건 Truth예요.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른 거죠.”


정확하지는 않다. 책꽂이와 컴퓨터를 아무리 뒤져도, 그때 선생님의 입에서 나온 말들을 기록해 놓은 파일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충 이런 느낌의 이야기였는데, 추측하건대 각자 가져온 이슈에 개인의 해석을 덧붙여 희곡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SNS에 전시된 누군가의 삶을 똑같이 따라 하는 사람’에게 ‘누군가의 세계를 알고 싶어서’라는 말을 덧붙인 건, 누군가의 삶을 따라 해 보는 이에게 ‘번역가’ 혹은 ‘제자’라는 말을 덧붙인 건 나의 해석이었다.


닿고 싶지만,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세계를 눈앞에 둔 사람은 어떤 마음일지가 궁금했다. 열심히 헤엄쳐 보지만 그만큼 멀어지는 물고기를 보고, 그 사람은 바닷속에서 무얼 할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그런데 소재에 이유를 붙이면 붙일수록, 내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유는 분명 소재에 붙였는데, 왜 마음이 무거워졌을까. 내가 ‘누군가의 SNS를 따라 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고 그의 행동을 인정받게 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얘 이래서 그랬던 거예요. 이해 좀 해줘요.” 내가 뭐라고, 내가 뭐라고.

   

한편으로는 이런 마음도 들었다. “이유를 붙이면 안 돼? 왜?” 가끔 사람들은 이유를 붙일 필요가 없는 일에 집요하게 이유를 추궁한다. 나를 납득시켜 봐. 내가 지금 이유를 붙일 필요가 없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혼동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걸 나누는 기준은 뭐지.




“우연히 누군가의 SNS를 보게 됐는데, 그분의 삶이 너무 예쁜 거예요. 반짝이는 삶이었어요, 훔치고 싶을 정도로. 그래서 누군가의 SNS를 훔치는 사람이 나오는 이야기를 써보면 어떨까 했어요.”

“만추씨는 누군가의 SNS를 훔쳐본 적이 있어요? 현실과는 다른 가짜 계정을 만들어 봤다던가.”

“아니요, 없어요. 사실 저는… 그거 결국 가짜인데, 가짜인 걸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아는데 어디에서 만족을 얻는 거지 싶어서요.”

“저는 가짜 계정을 만들어 본 적이 있어요. 아마 만추씨는 그 글을 쓰기 어려울 거예요. 그 인물의 마음을 모르잖아요.”




여러 이유와 여러 말과 여러 생각이 얽히고설켜 엉킨 실이 되어버렸다. 엉킨 실을 풀고자 이 소재의 시작점을 찾기 시작했다. 그 시작점엔 2016년에 들었던 ‘희곡 읽기’ 수업이 있었다. 나는 누군가의 반짝이는 삶을 보고 훔치고 싶을 정도로 예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그걸 진짜 훔치겠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 마음을 절대로 모르니 타인의 SNS를 훔치는 사람에 대해 쓸 수 없는 사람이었다.


2016년에서 잠시 멈췄던 이야기는 2017년 11월에 ‘죽은 선생님께 쓰는 편지’와 합쳐졌으며 2018년 2월에 봤던 전시 작품 중 하나인 ‘그게 살아있는 목성이었으므로’와 합쳐졌다. 그것은 또다시 같은 해 9월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것’이라는 단상과 합쳐졌으며 흐르고 흘러 2020년 4월 에릭 로메르의 영화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의 첫 번째 에피소드의 제목인 ‘블루 아워’와 합쳐졌다. 그리고 거기에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졌다.


2016년에 ‘누군가의 SNS를 훔치는 사람’이었던 이야기는, 2017년에 ‘누군가의 세계를 알고 싶어 그가 생전에 했던 행동을 똑같이 따라 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되었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집어넣은 것이었다. 2018년과 2020년에는 그 마음이 명확해졌다가 이런저런 요소를 덧붙이며 흐릿해지기를 반복했다.


이번에 이 이야기를 다시 쓰기로 마음먹으면서 나는 또 혼란 속으로 빠졌지만, 엉킨 실을 풀기 위해 시작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와중에 한 가지가 확실해졌다. 시작은 다른 모양이었지만,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만들어 보려 했던 모양은 ‘누군가의 삶을 따라 하는’이 아니라,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건 닿고 싶지만 닿을 수 없는 세계로 향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무엇을 쓰고 싶은지, 이걸 왜 쓰고 싶은지가 명확해진 지금, 쓰고자 하는 주제와 처음 길어 올린 소재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든다. 굳이 SNS를 따라 하는 사람일 필요도 없고, 굳이 누군가의 제자일 필요도 없고 굳이 번역가일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이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른다. 주제에 맞는 인물을 발굴해 내는 게 다음 스텝이 되겠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다. 나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렸던 고민이 깔끔하게 해결된 것도 아니다. 이런저런 말들을 덧붙였던 과정은 이유를 추궁하던 과정이었을까 아니었을까. 아마 이 고민은 글을 쓰는 내내 나를 따라다닐지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 시국에 장막 희곡] 플롯은 또 바뀌겠지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