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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만추 Sep 13. 2021

파인애플 볼펜

3p. 12살의 구하나

2001년 4월 24일

날씨 맑음


오늘도 수업 시간에 최민호가 파인애플 볼펜으로 필기를 했다. 볼펜 윗부분에 커다란 파인애플이 달려있어서 멀리서도 알 수 있다. 최민호는 파인애플 볼펜을 그냥 쓰는 걸로도 모자라, 볼펜에 달린 파인애플을 뺐다 꼈다 했다. 파인애플이 최민호 손에서 벗어나 데굴데굴 굴러간다면. 데굴데굴 굴러서 청소함 아래로 들어가 버린다면.


우리 반에 파인애플 볼펜을 가진 사람은 딱 네 명뿐이다. 최민호, 연정이, 소연이 그리고 지혜. 어느 날부턴가 그 애들이 파인애플 볼펜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학교 앞에 있는 문방구에서 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파인애플 볼펜의 하얀 몸통 위에는 검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Hawaii’. 예전에 최민호가 말해줬던 비밀이 떠올랐다. “나 선생님 결혼식에서 노래하고 왔다.”


그러고 보니, 연정이도 소연이도 지혜도 한동안 점심시간에 선생님이랑 노래 연습을 하던 애들이었다. 연정이는 나보다 노래 못 하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선생님 결혼식에서 노래를 부르게 됐을까? 최민호랑 지혜는 합창부였고(작년까지 우리 선생님이 합창부를 맡았다), 연정이랑 소연이는 작년에도 선생님 반이었었다. 내가 작년에 합창부에 들었거나 선생님 반이었다면 나도 파인애플 볼펜을 가질 수 있었을까? 아니면 3월에 한 명씩 좋아하는 노래를 부를 때, 내가 노래를 좀 더 잘했다면.


“다들 하나.”

    

선생님이 선생님 책상 위에 있는 종을 치며 말했다. 선생님이 ‘하나’라고 말하면 하던 일을 멈추고 손머리를 하며 선생님을 봐야 한다. 선생님이 우리를 보더니 “둘”이라고 말했다. 이건 손머리를 풀라는 뜻이다. 선생님이 어제 우리가 그렸던 그림을 보여주며 말했다. “누구, 누구, 누구는 풍물놀이 체험한 걸 이렇게 정성스럽게 잘 그렸어요. 아주 잘했어요.” 그러면서 그림을 그린 애들이 속한 조에 플러스 점수를 주셨다.


선생님은 손에 든 그림을 내려놓고 다른 그림을 들어 올렸다. 거기에는 내가 그린 그림이 있었다. 선생님은 표정을 무섭게 바꾸더니 말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그림을 열심히 그리지도 않고, ‘대답 안 해?’” ‘대답 안 해’는 우리에게 풍물놀이를 가르쳐 준 사람이 했던 말이었다. 기억에 남아 적었던 것인데 그걸 쓰면 안 됐나 보다. 그런데 나는 수업 시간 내내 떠들지도 않고 열심히 그렸는데…. 나는 원래 그림 잘 못 그리는데….


선생님은 그림을 못 그린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너무 다행이었다!), 그 사람들이 속 한 조에 마이너스 점수를 주셨다. 그런데 나는 5조인데, 4조에 마이너스 점수를 주시는 게 아닌가? 내가 놀라서 움찔하자 김수빈이 “왜 그래?”하고 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내가 잘 못 본 걸까? 잘못 본 게 아니다. 머리를 묶은 사람이 장구 치는 그림. 그리고 ‘대답 안 해’라고 쓴 글. 그건 분명 내 그림이었다.


일주일 전에, 5조의 임태희와 이지영이 계속 떠드니까 선생님이 화를 내며 “이지영, 구하나 자리 바꿔.”라고 말했다. 그때 선생님이 내 쪽이 아닌 내 앞에 앉은 ‘은혜’ 쪽을 보는 것 같다고 느꼈는데…. 이로써 분명해졌다. 선생님은 나와 4조에 있는 ‘은혜’를 헷갈리고 있구나.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나와 은혜는 닮은 게 하나도 없는데. 게다가 선생님은 3월달에 나한테 ‘mbc 창작동요제’ 책도 빌려 가 놓고선.


손 들고 선생님한테 말할까? 그런데 우리 조 안 그래도 임태희 때문에 점수 낮은데, 괜히 나섰다가 우리 조 꼴찌 되고 다음 주에 화장실 청소하면 어떡하지? 그래도 말해야 하지 않을까? 나를 은혜로 계속 착각하시면 어떡해. 그런데 만약에 내가 잘못 본 거라면? 생각이 많아져서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점심시간이 됐다.


점심을 먹고 소연이 필통을 구경하면서, 소연이의 파인애플 볼펜을 꺼내 썼는데 볼펜이 나오지 않았다. 소연이는 아마 잉크를 다 써서 안 나오는 것 같다고 했다. 파인애플 볼펜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럼, 이거 나 주면 안 돼?” 소연이는 싫다고 했다. 이따 집에 갈 때 문방구에서 맛있는 거 사준다고 했는데도 싫다고 했다. 볼펜 심 바꿔서 쓰려고 했는데. 아쉽다.


나도 파인애플 볼펜 갖고 싶다. 미치도록 갖고 싶다. 소연이가 마음을 바꿔서 나한테 파인애플 볼펜을 주면 좋겠다. 아니면 바닥 청소할 때 누가 잃어버린 파인애플 볼펜을 내가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다. 파인애플 볼펜이 데굴데굴 굴러서 나에게 오면 좋겠다.




본 프로젝트는 문화예술진흥기금으로 추진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1년 아동·청소년 대상 예술 활성화 지원사업에 선정된 프로젝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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