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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만추 Jan 21. 2022

<들어가도 될까요?>

다락방의 미친 여자

등장인물

극작가 : 20대 후반

연출가 : 30대 초반

배우A/은린 : 20대 후반

배우B/호영 : 20대 후반

  

현재   

연습실 안과 밖

안에는 사각 테이블 하나와 의자 세 개가 놓여있다. 밖에는 낡은 서랍장이 있고, 그 옆으로 신발들이 늘어서 있다. 안과 밖은 철문과 벽으로 가로막혀 있어,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다. 안에서도 밖을 볼 수 없다.


밖.

극작가가 계단을 내려온다. 복도 등이 켜진다. 극작가의 한쪽 손에는 무언가로 가득 찬 비닐봉지가 들려있다. 다른 쪽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있다.

극작가는 핸드폰과 철문에 적힌 이름을 번갈아 보고는 조심스럽게 문 앞에 앉는다.  


안으로부터 무슨 소리가 들린다. 철문이 가로막고 있어서인지 잘 들리지 않는다.

극작가는 문에 몸을 바짝 붙이고 귀를 댄다.

복도 등이 꺼진다.


안.

은린, 책을 읽고 있다. 호영, 신문을 읽고 있다.

은린이 읽던 책을 내려놓고 두리번거린다.     


은린 : 무슨 소리 안 나?

호영 : 소리?

은린 : 강한 숨소리.

호영 : 바람 소리 아니고?

은린 : 아니야. 그거랑은 달라. 들어봐.


은린과 호영 소리에 집중한다.


호영 : 잘 모르겠는데.

은린 : 점점 거칠어져.


호영은 대꾸하지 않고 신문에 다시 집중한다.

은린은 여전히 소리에 집중하며, 손으로 숨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걸 표현한다.


호영 : 쫌. 나 신문 읽잖아.

은린 : 읽어.

호영 : 신경 쓰인다고.

은린 : 나도 신경 쓰여서 그래.


은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손을 움직인다. 커졌다, 작아졌다.

호영이 은린의 손을 낚아챈다.


호영 : (은린이 읽던 책을 흔들며) 너 내가 이상한 소설 그만 읽으랬지.

은린 : …그런 거 아닌데.


그때, 밖에서 기침 소리가 들린다.


은린 : 봐! 바람 아니잖아. 나가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호영 : (은린을 막으며) 누군지 알고. 그리고 이 늦은 밤에.

 

다시 밖.

극작가가 기침을 한다. 복도 등이 켜진다. 극작가 옆으로, 아까 손에 들려있던 비닐봉지와 ‘홈런볼’과자가 놓여있다.

극작가는 기침 소리를 최대한 안 나게 하려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안에 있는 사람들을 신경 쓰며 비닐봉지와 과자를 챙겨 일어나려는데 옷이 문틈에 끼었는지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허우적거린다. 힘을 주어 옷자락을 잡아당기고는 겨우 계단을 올라간다. 최대한 조용조용히, 그러나 재빨리.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극작가가 계단 쪽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다. 분위기를 살피고는 다시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온다.

 

극작가 : (작은 목소리로) 왜 이러고 사냐.

   

극작가는 문에 몸을 바짝 붙여 앉는다.

안에서 시작된 웃음소리가 철문 밖으로 삐져나온다.

극작가는 나란히 놓여있는 신발들 옆으로 자신의 신발을 벗어서 놓는다.

그리고는 아까 먹던 홈런볼을 하나씩 신발 위에 얹어 놓고, 자신도 하나 먹는다.     


극작가 : (작은 목소리로) 춥다.


복도 등이 꺼진다.     


다시 안.     


은린 : 나가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호영 : (은린을 막으며) 누군지 알고. 그리고 이 늦은 밤에.

은린 : 그러니까 가봐야지. 이 늦은 밤에 거칠게 숨을 쉬고 있는데. 쫓기고 있는 거면 어떡해.

호영 : 쫓고 있는 거면? 왜 항상 하나만 생각하고 둘은 생각 못 하지?

은린 : 그럼 문 살짝만 열고 틈 사이로 보자. 그건 괜찮지? (문 쪽으로 간다)

호영 : 야, 야!

은린 : 쉿! (작은 목소리로) 저기 봐. 저거 사람 다리 맞지? 움직여! 위에는 풀에 가려서 안 보이는데, 아파 보여.

호영 : (작은 목소리로) 알겠으니까, 그만하고 와.

은린 : 가봐야 하지 않을까?

호영 : 뭐?

은린 : 너무 아파 보여.


한쪽에서 둘의 연기를 보고 있던 연출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연출가 : 네, 좋습니다. 여기에서 잠깐 끊어 갈게요. 지금 전반적으로 나쁘진 않은데, 너무 아파 보이잖아.

배우A : 저요?

연출가 : 응. 아파 보인다는 대사를 할 때, 밖에 있는 사람보다 은린이가 더 아파 보여요.


연출가, 웃는다.

배우B도 함께 웃는다. 배우A도 어색하게 따라 웃는다.     


배우A : 지문에 ‘안절부절못하며’라고 쓰여있어가지고…. 너무 안절부절못했나요?

연출가 : 그러니까. 대본에 불필요한 지문이 너무 많아. 배우의 연기를 막아버리잖아. 안 그래요? 안 그래?

배우B : 그런 면이 있을 수 있죠.

연출가 : 여기도 그렇고, 뒤로 갈수록 더 심해져 더.


연출가, 보고 있던 대본을 덮는다.     


연출가 : 그 대사, 호영이를 떠보는 식으로 한번 해봐요.

배우A : 떠보는 식으로요?

연출가 : 응. 밖에 있는 사람이 걱정돼서가 아니라 궁금해서 거짓말하는 걸로.

은린 : 쉿! (작은 목소리로) 저기 봐. 저거 사람 다리 맞지? 움직인다! 위에는 풀에 가려서 안 보여. 아픈 건가? 아픈가 봐!

연출가 : 그래, 이거지. 이거야. 훨씬 좋은데요?

배우A : 그래요?

연출가 : 본인도 지금이 더 편하지 않아요?

배우A : …사실 저는, 궁금하기보단 걱정될 것 같아요.

연출가 : 재밌네. 매사에 진지한 타입이구나. 본인이 그렇다고 은린이까지 무겁게 만들어버리면 어떡해요.

배우A :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저는, 아파 보인다는 대사가 마음에 걸려요. 궁금했다면 굳이 아파 보인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연출가 : 다른 말을 했을 거다?     


연출가,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문 쪽을 본다.     


연출가 :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요?

배우A : (고개를 젓는다)….

연출가 : 제가 잘못 들었나 봐요. 호영이 생각은 어때요?

배우B : 소리요?

연출가 : 아니 소리 말고. 아파 보인다는 말.

배우B : 아하! 저는, 두 분 말씀 다 일리가 있어서! 어느 쪽이라도 제가 잘 맞출 자신이 있습니다!

연출가 : 아파 보인다는 말을 빼고, 다른 대사를 집어넣죠 뭐.

배우A : 뭘로 바꾸면 될까요?

연출가 : 그건 생각을 좀 해 볼게요.

배우A : 근데, 저는…, 아니에요.

연출가 : 왜요. 뭔데. 편하게 말해요. 아무도 안 잡아먹어.

배우A : 저는 왜 자꾸 그 대사가 마음에 걸리죠? 빼면 안 될 것 같아요.

연출가 : 나는 은린이라는 인물이 좀 더 호기심 많고 아이 같아 보였으면 좋겠어요. 그걸 보여줄 수 있다면 그 대사가 있든 없든 크게 상관없어요.

배우B : 좀 전에 잘 했으니까, 그냥 그대로 하면 될 것 같은데.

연출가 : 응!

배우A : 솔직히 저는, 은린이라는 인물이 엄청 섬세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마지막 장면에서 밖에 있는 사람으로 추정되는 여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은린이가 울잖아요? 밖에 있는 사람에게서 자신의 어떤 면을 발견한 게 아닌가. 자신과 겹쳐 보이기 때문에, 아파 보인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연출가 : 여기에서 꼬였네. 호영이 생각은 어때요?

배우B : 저는 ‘만약 나였더라면?’ 하는 생각으로 봤는데, 안도해서 눈물이 찔끔 나왔겠다.

연출가 : 그렇지, 그렇지.

배우B : 집으로 들였으면, 우리도 타깃이 될 수 있는 거잖아요?

연출가 : 그쵸, 목격자니까.

배우B : 네, 그래서,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배우A : 저는 안도하지는 못할 것 같아요. 왜냐면, 이 전에도 이 사건 이후에도 은린이한테는 변한 게 없으니까. 뭐, 호영이는 안도할 수 있겠죠.

연출가 : 그래요. 무슨 말인지 잘 알겠고. 내가 괜히 은린이를 밝게 만드려는 게 아니거든요? 은린이 캐릭터를 아까처럼 무겁게 가져가면 은린이가 말할 때마다 쳐져. 왜냐? 작가님이 대본을 그렇게 써 놨거든. 작가님도 매사에 진지한 타입이신가 봐. 무슨 인물이 걱정만 하다 끝나. 근데, 그러면 관객들은 졸다 가는 거예요. 우리가 그걸 바라는 건 아니잖아.


연출가,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다.


배우B : 왜요? 또 무슨 소리 들리세요?

연출가 : 나만 들려요, 이거?

배우A : 잠깐 쉴까요? 피곤하면 이상한 소리 들리잖아요.

연출가 : 진짜 나만 들린다고? 와, 나 은린이 됐네.   


연출가와 배우B, 웃는다.

배우A는 둘의 시선을 피한다.


연출가 : 잠깐 쉬었다가, 우리가 이야기 나눈대로 한번 해 보죠.

배우A : 밝은 거 말씀하시는 건가요?

연출가 : (싸늘하게) 내가 그거 말고 다른 이야기 한 적 있어요?

배우A : 아니요. 알겠습니다.

연출가 : 아파 보인다는 대사 전부 지우고 해봅시다. 20분 쉬고 다시 시작할게요.


연출가,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건다.     


다시 또 밖.     

극작가, 여전히 문에 몸을 붙이고 있다. 홈런볼 과자 봉지가 하나 더 늘었다. 갑자기 핸드폰 진동 소리가 들린다. 극작가는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꺼내다가 그만 떨어뜨리고 만다. 복도 등이 켜진다.


극작가는 핸드폰을 주우려는데 문에서 몸이 떨어지지 않는다. 극작가는 당황한다.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문에서 떨어져 보려고 하지만 소용없다. 덜컹거리는 소리만 날 뿐이다. 극작가는 안에 있는 사람들이 덜컹거리는 소리를 들을 까봐 몸을 크게 움직이지도 못한다.


극작가, 발을 이용해 핸드폰을 몸 가까이 가져오려는데 이조차도 쉽지 않다. 핸드폰 진동이 계속 울린다. 몸은 여전히 문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핸드폰을 가져오기 위해 쭉 뻗은 한쪽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극작가의 얼굴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눈물일지도 모른다. 


극작가는 손으로 얼굴에서 흐르는 물을 닦는다. 그리고는 아직 들러붙지 않은 자신의 신체를, 문과 벽에 갖다 댄다. 희미하게 웃는다. 복도 등이 꺼진다.


다시 또 안.

연출가, 핸드폰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고 있다.


연출가 : (혼잣말로) 안 받네….

배우B : 연출님. 한 대 태우러 가시죠?

연출가 : 나 잠깐 작가님한테 카톡 하나만 보내고. (중얼거리며) 작가님.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저희는 재미있게 연습하고 있습니다. 언제 연습실 한번 나오시겠어요? 대본 관련해서 이야기 좀 나누고 싶어서요. 수정이 좀 필요할 것 같아요. 배우가 몰입하는 걸 좀 힘들어해서요. 편하실 때 답장 주세요. 연습실 주소 보내드릴게요. (배우B에게) 가자.

   

연출가와 배우B, 문 쪽으로 걸어간다.

연출가가 문고리를 잡아 돌리는데 문이 잘 열리지 않는다.


연출가 : 어? 이거 왜 이래.

배우B : 왜요?


연출가, 문을 더 강하게 밀어서 열어 보려 하지만 여전히 꿈쩍하지 않는다.


연출가 : 우리 이거 문 왜 이러지?

배우B : 안 열려요?


배우B, 연출가와 같이 문을 민다.

배우A도 문 쪽으로 간다.


배우A : 문에 무슨 문제 있어요?

배우B : 와씨, 안 열려. 우리 갇혔어.

연출가 : 누가 마지막에 들어왔지?

배우A : 주인한테 문 안 열린다고 전화해 볼게요.


배우A, 전화를 건다.

연출가와 배우B, 계속해서 문을 열어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배우A : 안 받아요. 일단 문자 남겨놨어요.


배우A도 함께 문을 민다. 열릴 듯 말 듯.


배우B : 열린다, 열린다! 고지가 눈앞입니다. 하나, 둘! 하나, 둘!


겨우, 문이 열린다.

문에 무언가가 붙어있다.


연출가 : …작가님? 작가님이세요?

극작가 : 네, 저예요.

연출가 : 뭐 하세요, 여기서?

극작가 : 오지 말라고 하셨는데 와서 죄송해요. SNS에 배우님이 컵 차기 하는 영상 올리신 거 봤는데 너무 재밌어 보여서, 아 근데 컵 차기 하러 온 건 아니에요! 어, 그러니까, 어, 그냥 간식만 드리고 가려고 왔어요…. 저, 들어가도 될까요?


연출가와 배우A 그리고 배우B는 놀라서 입이 벌어진다.

그리고는 문에 달라붙어 있는 극작가를 한참 동안 본다.


극작가 : 저…, 그런데 저 좀 떼어 주시겠어요? 너무 오래 붙어있었더니 저도 문이 되어 버렸나 봐요.


다음 날,

연습실 안에는 연출가와 배우A, 배우B가 연습을 하고 있다.

연습실 밖에는 극작가가 여전히 문에 붙어있다.


은린 :  저기 봐. 저거 사람 다리 맞지? 움직인다! 위에는 풀에 가려서 안 보여! 

 

덜컹, 덜컹, 끼이익-. 철문이 부딪치고 긁히는 소리.

배우A와 배우B는 문 쪽을 본다. 그리고 연출가를 본다. 연출가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다. 다시 한번, 덜컹, 덜컹, 끼이익-.


연출가 : 대사, 원래 대본에 적혀있는 대로 가죠. ‘아파 보여’ 살려서.     

 

문밖에서 나는 소리가 잠잠해진다. 그러나 언제고 다시 철문이 부딪치고 긁히는 소리가 연습실 안을 뚫고 들어올 것이다. 그렇게 계속.


막.



본 프로젝트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창작실험활동지원에 선정, 지원을 통해 제작된 프로젝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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