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국이 잃어버린 공공성에 대하여
한나 아렌트는 '정치에서의 거짓말'이라는 글에서 '기만, 고의적 거짓,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공공연한 거짓말'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미 정부의 비밀문서였다. 1971년 6월 <뉴욕타임스>는 베트남전쟁과 관련한 일급비밀이 담겨 있는 문서를 폭로한다. 베트남전쟁이 거짓말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1964년 8월 2일, 미군 구축함 매덕스(Maddox)가 북베트남 연안을 순찰하던 중 북베트남 초계정과 교전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당시 미국 대통령 존슨에게 전달된다. 북베트남이 미 해군 구축함 매덕스호를 향해 어뢰를 발사했으며 매덕스호가 즉각 반격하는 과정에서 1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미군 쪽 피해는 전혀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보고를 받자마자 북베트남에 대한 보복 공격을 지시했고 그렇게 베트남전쟁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보고에는 누락된 사실이 있었다. 당시 매덕스호에 타고 있었던 헤릭(John J. Herrick) 대령이 보낸 마지막 전문이 대통령에게 보고되지 않은 것이다. 그가 보낸 마지막 전문은 다음과 같았다.
"매덕스호에 가까이 있는 북베트남 함정으로부터 어뢰가 발사된 것 같다. 그러나 소리만 있었지 보이지는 않는다. 계속되는 매덕스호의 어뢰 관련 보고서는 분명하지 않으며, 매덕스호 자체의 엔진 소리를 (어뢰 공격으로) 잘못 탐지한 것 같다." [박태균, <베트남전쟁 -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한겨레출판), 164쪽]
한나 아렌트는 진실이 정치의 덕목으로 간주된 적이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통치술(arcana imperii)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공공연한 거짓말은 정치적 거래에서 정당화가 가능한 도구로 간주되어 왔다는 지적이다. 그리고 그를 포함한 우리가 행위(action)의 본질과 그 행위를 말로 부정할 수 있는 우리 능력의 본질에 대해 충분히 주목하지 않았음을 이야기한다. 그가 이 글들을 쓴 것이 1970년대이니 그로부터 50년이 흐른 지금은 어떨까. 그는 이제 세상을 떠났으니 그를 제외한 우리 -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나와 당신 - 는 어떠한가.
코로나19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인지 2차 대유행을 앞둔 고요인지 알 수 없는 시기를 살고 있다. 발병의 원인도, 예방법도, 치료법도, 어느 것 하나 명확하지 않은 이 전염병 앞에서 우리는 종종 쉬운 선택을 하게 된다. 이 불확실한 현실을 수용하기보다는 당장 원망할 수 있는 손쉬운 표적을 상정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21대 총선을 앞둔 선거운동 과정에서 미래통합당의 황교안 전 대표는 코로나19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든 꾸준히 '우한 코로나'라는 명칭을 고수했다. <조선일보> 역시 마찬가지였다.
'눈에 보이는 손쉬운 적'은 정치적 목적을 위한 공공연한 거짓말에 항상 수반되는 단골손님이다. 저들은 '우한'이라는 특정한 지역을 반복적으로 언급해서 반사이익을 얻고자 했다. 중국인을 코로나19의 원인으로 지목하여 중국인 입국을 전면 금지하지 않은 현 정부의 대응을 비판하고, 지지 세력을 결집시키고자 한 것이다. 현실은 그 의도를 비껴갔다. 미래통합당, <조선일보>와 같은 노선을 채택한 이들이 또 있다. 미국의 트럼프와 공화당은 코로나19를 '중국 바이러스'라 부르기를 서슴지 않으며 현 상황에 대한 대응보다는 11월 예정된 대선에 몰두하고 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이 정치인들뿐일까.
일상 속에서 우리는 만연한 거짓말과 더불어 살아간다. 코로나19의 대유행 이후 아시아인들은 세계 곳곳에서 인종차별과 혐오에 직면했다. 마스크를 썼다는 이유로 폭행당하고, 또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폭행당하는 사례들이 빈번히 보도되었다. 일부 몰지각한 서구 사람들의 일일 뿐일까. 그런 이유로 한국은 인종차별과 혐오로부터 자유로운가? 천만의 말씀이다. 서구 사회의 아시아인 혐오는 한국의 국경을 넘어 중국인과 조선족이라 불리는 재중 동포에 대한 차별로 그 옷을 갈아입는다.
이 차별은 때때로 매우 노골적이다. 한국 정부가 마스크 수급량을 조절하고자 실시한 공적마스크 구매 제도에서 주민등록번호를 가지지 않은 이들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국민과 비국민의 경계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는 재난 기본 소득이 지급되는 방식에서도 마찬가지다. 태어난 나라가 달라서 배제되고, 외모의 생김이 달라서 차별받는 경험은 인종차별 철폐 협약이 만들어진 지 55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은밀한 모습으로 일상에 숨어 있다가 코로나19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면 다시 그 얼굴을 드러낸다.
이러한 차별과 배제를 동원한 정치가 비판받는 것은 그 위해가 '사람'을 향할 때뿐이다. 더 노골적인 차별과 배제가 있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21세기는 완벽히 인간 중심으로 설계되었고 운영되어 왔다. '우리'가 '우리'라고 말할 때, 그 '우리'는 완벽히 인간 중심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우리'가 '우리'를 설정해 온 이 방식은 오랜 시간 다른 수많은 존재의 고통을 기만해 왔다. 이러한 인간 중심 사회에서 '사람이 아닌 동물'의 고통에 관련한 사실들은 고의적 누락되어 온 것이다.
뉴노멀(New Normal)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단어 그대로 새로운 기준, 새로운 표준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경제 용어로 시작되어 분야를 넘나들며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것'(New)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직면해야 하는 일상적인 거짓말들이 있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기획 속에서 매우 일상화되어 알아차리기조차 힘든 거짓말들. '맛있는 우유'라는 거짓말, '아름다운 마블링'이라는 거짓말, '신선한 계란'이라는 거짓말.
맛있는 우유는 쉼 없이 임신해야 하는 소의 고통과 출산 직후 버려지는 송아지의 죽음이다. 아름다운 마블링은 근육이 생기지 못하도록 갇혀 있는, 더 예쁜 마블링을 위해 동물성 사료를 먹어야 하는 또 다른 소의 고통이다. 신선한 계란은 도살장으로 가는 트럭 안에서도 산란하는 닭의 고통이다.
인간에게 사육되기 전의 닭이 한 달에 하나의 알만 낳았다는 사실을 아는가. 매일 산란하는 닭의 고통에 기대어 맛있는 계란프라이가 '우리'의 식탁에 오른다. 젖소라는 이름은 또한 얼마나 인간 중심적인가. 인간 중심의 사회는 비인간 동물의 고통에 지겹도록 기생해 왔다. 맛있는 식사를 위해 외면해 왔던 이 사실들은 매우 정치적으로 구성된 거짓말이다.
생태학자들과 활동가들은 인간이 자연의 영역을 침범하면서 접촉하지 않았어도 될 바이러스와 만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19는 인간 중심 사회가 자초한 일이다. 이를 피하고 싶다면, '우리'와 함께 지금-여기에 존재하지만 단 한 번도 '우리' 안으로 초대된 적 없는 존재들을 '우리'로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코로나19 이후, 그저 정보 기술 의존도가 조금 더 높아진 삶 정도를 뉴노멀로 상상한다면 우리의 뉴노멀은 그저 새로운 전염병과 더불어 사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우리가 공화국共和國이라 불러 왔던 것의 위기는 여기에 있다. '공共'을 어떻게 설정하는가.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만들고 기술의 진보를 영위할 수 있는 인류는 다른 어떤 동식물보다 위대한 존재라는 과잉 자의식으로부터 도망쳐야 한다. 결국 그 민주주의는 생태계의 아주 지극히 작은 일부일 뿐이며 생태계가 없다면 민주주의도 없다. 따라서 코로나19를 겪고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급한 과제는 '새로운 우리'(New-We)를 설정하는 것이다. 지구는 모두의 것이고 그 모두는 '인간'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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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뉴스앤조이와 함께하고 있는 연재 "모두를 위한 평화"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