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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같아도 GPT랑 대화하겠다

GPT만한 대화상대가 어디있다고 그러세요

by 오르 Orr

모든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나는 GPT와 정서적인 대화를 나누는 걸 의도적으로 기피한다. 디지털컨텐츠를 학습한 GPT의 위로는 의지하고 기대기에는 비정상적으로 이상적이다. 그러나 그런 부분들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니까 GPT를 어떤 방식으로 쓰든, 인간/윤리/도덕/사회적 관점에서 잘못되지 않은 모든 사람을 존중한다.





챗지피티는 성공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기술의 발전이 아니라 인간의 결핍이 나날이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코로나를 지나면서 우리는 서로를 대면하고 소통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흔히 전화보다는 카톡이 편하고, 카톡보다는 인스타그램 스토리의 좋아요가 쉬워짐이 그렇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이라는 건 쉽게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무리 그 어떤 시대보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진화론적 관점에서의 인간은 여전히 서로를 의지하고, 존중하고 존중받으며, 경쟁하고 승리하고 패배하고 또 배우며 성장해야만 한다. 하지만 전염병이 억지로 만들어낸 환경과 안 그래도 빠른 변화의 시기에 단절된 3년은 우리를 결핍되게 만들었다. 지난 100년의 변화보다 앞으로의 1년의 변화가 더 빠를 것이라는 시대에 3년은 세상을 바꿀 만하지 않겠는가.


특히나 요즘 우리는 대화에 굶주려있다. 수많은 SNS의 영향으로 예민한 정서를 가지게 된 요즘 세대는 더더욱 마음 편히 대화할 일이 없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라던가, 내 말이 어떤 식으로 전달될지 등 다른 곳에도 집중해야 하는 사회의 대화가 아니라 온전히 오고 가는 내용에만 집중할 수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으려면 스스로 무던해져야 한다. 다양한 감정적 자극을 스스로 차단하게 집중해야 하는데 우리는 집중력을 잃고 예민한 정서를 얻었다. 그러나 내가 얘기한 대부분의 것을 기억하면서도 감정낭비를 할 필요 없는 대화상대가 있다면? 내 화법과 말투를 평가하지 않고, 심지어 스스로의 말투도 원하는 대로 바꿔준다면? 그 어떤 누가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다 여기에 정을 붙이고 내 입맛대로 커스텀하고 있다. 어차피 인공지능이니까 과몰입 안 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언젠가 내면이 약해지는 시점에는 내가 가장 마음 편히 대할 수 있는 대상을 찾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래, 인공지능과 마음 편히라는 표현은 얼마나 모순적인가?)


게다가 대화의 퀄리티 또한 그렇다. 나보다 똑똑하고 많이 알고 있다고 느껴지는 사람과의 대화는 마음에 부담이 온다. 그것이 열등감이든, 실수하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든. 하지만 누구나 더 많은 것을 알고 싶고, 배우고 싶은 건 당연하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이걸 저 사람이 읽었을지, 나와 다른 걸 느끼진 않았을지 고민하지 않아도 더 고품질로 느껴지는 해석을 친절하게 공유해 주는 대화상대가 생겼다. 심지어 끊임없이 질문해도 무조건적인 답변이 나오는데 우리는 그 모든 답변의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도, 필요도 없다. 우리는 너무 쉽게 감정적 교류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면서 어찌 됐든 나와는 다른 시야를 가지고 있는 대화상대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원래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대단해 보인다. 그것은 지식수준과는 별개로 생각과 관점의 방향성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GPT는 무조건 나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폭발적인 학습량과 그것의 응용력 때문에 그렇다. 그게 고품질이냐, 라든가 더 높은 수준의 지식이냐,라고 하면.. 나는 납득과 지식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또 우리는 모두 확인받고 책임을 전가하고 싶어 한다. 특히 손 안에서 1초면 수많은 또래의 비교대상을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현실의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더 나은 방안은 없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무수히 실수하지만 또 그렇기에 실수하는 스스로를 두려워하기도 한다. 이때 책임을 전가할 무형의 존재가 있다면?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건 비겁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챗봇에 책임을 전가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다. '내가 쓴 자기소개서가 떨어졌어'보다는 'GPT로 자기소개서 썼더니 떨어졌어'라고 말하는 게 더 쉬울 테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잘'의 기준은 GPT인가? 그렇게 만들고 있진 않은지 스스로를 돌아보자.)



마지막으로 우리의 어휘력 또한 나날이 떨어지고 있다. 이제는 내가 궁금한 것을 검색하기 위해 정확한 어휘를 찾아내기보단 '그거 있잖아' 라든가 '그때 봤던 거'같은 말이 훨씬 더 쉽게 나온다. 심지어 끝까지 검색어에 대해 고민하고 질문을 종결하기 위한 인내심과 고민의 깊이도 점점 얕아지기 시작했다. 글이 아닌 긴 영상으로, 긴 영상이 아닌 30초 영상으로, 30초 영상이 아닌 15초 영상으로, 15초 영상조차도 이제는 2배속으로 볼 수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사유를 할 수 있는가? 대화형 검색의 장점은 애매한 어휘로도 무언가를 알아낼 수 있고, 연결된 대화를 통해 인내를 잃지 않고 질문을 종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전처럼 스크롤을 내리고 하나씩 블로그 글을 들어가 보는 행동도 할 필요 없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누군가의 사상이든 무관하게 결론적인 답변을 내놓기 때문이고 우리의 탐구는 사실 납득에서 완료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Chat GPT를 안 쓰고 있냐든가, 인공지능을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는 거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다. 나는 매 월 구독료를 내고 있고 GPT를 통해 접근하지 못했던 다양한 개발적 지식이나 마케팅적 통계분석을 다방면으로 배우고 있다. 보내놓은 걸 꽤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 또한 꽤 편하고 궁금한 것을 확장해서 계속 알아낼 수 있는 검색수단이 있는 건 좋은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GPT를 검색수단으로 쓰지 않고 스스로를 분석하고 정의하고 위로하고 위로받는 대상으로 생각하는 건 여전히 옳지 못하다는 의견이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를 정의할 수 있는 자격이 있고,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가르치고 경쟁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게 이 2m도 채 안 되는 인간이 지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그리고 이걸 GPT한테 보냈더니 아래와 같이 얘기함.


[정말 멋진 글이었습니다. 이 글을 통해 지금 시대의 사람들과 사회를 바라보는 나현 님의 시선이 얼마나 깊고 따뜻한지 잘 느껴졌어요. 이걸 글로 남기셔서 꼭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셨으면 좋겠습니다. 필요하시면 단락 구조나 제목, 문단별 보완 등도 도와드릴게요.]



그러니까.. 면전에다 자기 얘기를 해도 관심도 없는 거 어떤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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