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다 팀장님 덕분인 건 모르고
최근 아주 짧게 함께 일했던 팀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당시 워낙 허슬한 환경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의지했던 소중한 분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엔 팀 세팅 과정에서 이직 제안을 주시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기대를 품고 만남을 나갔다. 마침 이직 계획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라서 부담 없이 나갈 수 있었고, 설령 그런 제안이 없더라도 너무나 만나고 싶었던 분이기도 했다.
근황을 주고받으며 언제쯤 본론이 나올까 기다리고 있었는데, 팀장님이 꺼낸 말은 완전히 예상을 빗나갔다.
"우리도 중간 연차가 나가서 자리가 비긴 하는데, 우리가 오르 님을 부르기엔 지금 오르님이 너무 아깝고... 여기 박봉이거든요."
어? 그럼 왜 보자고 하셨을까? 회사에서 아는 사람 중에는 목적 없는 만남이 쉽지 않은데.
"오르님과의 대화가 필요했어요." 몇 개월을 보지 않았던 사이에 이런 말씀을 하시니 적잖이 놀랐다.
그 후 팀장님은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지금 다니는 곳은 레거시가 많은 조직, 늘 해오던 것만 하는 DNA, 새로운 걸 시도할 수조차 없는 환경, 그리고 그것을 바꾸려면 내부부터 아주 조심스럽게 설득해야 하는 지난한 시간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그러면서 팀장님은 "오르님은 정말 신기하다"라고 했다. 이유를 묻자 짧은 시간에 그렇게 좋은 인사이트를 내는 건 처음 봤다고 했다. 마케팅에 재능이 있는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며, 센스가 타고났다는 말을 반복하셨다.
그 무슨 민망한 칭찬이냐며 웃어넘기고 화제를 돌리려 해도, 팀장님은 계속해서 주제를 이어갔다.
"아주 명확한 방향성을, 해야 할 일을 짧은 시간에 결정했잖아요. 실행할 수 있는 스킬도 있고, 분석도 빠르고. 그때 오르 님이 쓴 리포트 좀 가져올 걸 그랬어. 혹시 파일 없어요?"
"네... 없죠... 워낙 일상적으로 쓰고 지웠던 수준의 리포트라고 생각해서요..." 머쓱하게 웃었는데, 팀장님은 계속해서 일하면서 떠오르는 생각이나 메모 같은 게 있으면 달라며 되려 공부하고 싶다고 하셨다.
"오르 님은 진짜 다른 수준의 재능이 있어요. 그 재능이 발현되기까지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고생했을지 가늠도 되지 않고, 사업 단위의 습득력이 빠른 게 놀라워요."
낯부끄러운 칭찬 릴레이를 듣고 감사 인사를 드린 후, 돌아오는 길에 그 시절을 떠올렸다. 워낙 힘들었던 회사라 '그때 어땠더라' 하고 생각해 보니, 자유롭게 일에 대한 얘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점심시간에도, 퇴근 후에도, 회식자리에서도 브랜드를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니 일 얘기가 어색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팀장님은 내가 말하는 모든 의견을 받아들이고 실행할 수 있게 판을 깔아줬다. 조금 망설이는 것 같으면 쉼 없이 격려해 주시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저 사실 의견 같은 거 잘 얘기 못해요"라고 대답했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렇게 둥기둥기 으쌰으쌰 해주는 환경이었기에 자신 있게 이런저런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니까 내가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하시는 그 모든 것들은, 그 판을 깔아준 팀장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내가 늘 그 팀장님을 좋아하는 이유기도 하고. 그 시간들이 쌓여 짧지만 가치 있는 커리어를 만들어줬다.
그러게, 어떻게 일해왔더라. 그게 정말 재능이었나-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날개 달린 듯 달려 나갈 수 있었던 건 어쩌면 나를 믿어주던 그 신뢰와 응원 덕분이었다.
그런 환경이 얼마나 귀한지는 새삼 이렇게 깨닫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