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는 것은 결국 디자인.
비초에의 제품을 말할 때는 ‘좋은’이란 형용사로 말을 얼버무리곤 했다. 사실 그냥 너무 멋있어서, 뭐라 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오늘, 나는 이 글로 '좋은'이란 말의 기저에 담긴 어떤 멋있는 브랜드의 역사를 구구절절이 설명해본다.
비초에는 1959년 영국에서 발한 가구 브랜드다. 판매하는 제품은 선반, 의자 그리고 테이블 딱 세 개. 고작 세 개의 가구를 가진 브랜드가 50여 년 동안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평생 가구>라는 개념에 대해 말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지속성'에 관한 고민만큼 하나의 브랜드를 깊이 있게 만들어 주는 게 또 있을까. 이들은 지속 가능한 물질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그들만의 어법으로 이런 캐치 프레이즈를 말할 수 있었다. "새로운 것보다 나은 게 있다면 그건 오래된 것!" 오래된 것이 새로운 것보다 나은 경우엔 보통 '진짜' 좋은 것들이 실타래처럼 얽히고설켜있다. 물질이 역사가 되는 방법을, 비초에는 그들만의 어법으로 읽어내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 진귀한 브랜드의 디자인이 대체 어떤 모양을 했는지 조금 더 살펴보자. 50여 년간 이들이 세상에 내놓은 건 바로 ‘디자인이 없는 디자인’. 미니멀리즘이라는 (조금은 진부해진) 개념으로 얼레벌레 뭉개버리면 아쉽다. 더 나은 삶을 지속성 있게 유지하기 위해 덜어내는 것을 선택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우리는 단순히 ‘미니멀리즘’이라는 단어로 함축해 왔다. 애플의 디자인이 대성공하고, 애플이라는 거대 기업이 세상에 떨친 업적들을 찬미하며 생겨난 일종의 종교 관념들이다. 그것들 이전에 이미 비초에의 디자인이 있었다.
이 멋진 브랜드의 가구들을 구상하고 마침내 세상에 내놓은 자가 누구인지도 중요하다. 단 한 명의 디자이너다. 이름도 멋스러운 디터 람스(Dieter Rames). 1932년생, 독일 출신, 20세기 최고의 산업디자이너. 여기저기서 쓰이는 ‘Less but better’이란 말은 그가 입에 달고 살던 말이다.
나는 그가 '사유하는 디자이너'라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창조해낼 때, 내 손을 탄 것에 내 흔적을 묻히지 않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크리에이터로서 '나'를 부각하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고 '덜어내니 더욱 아름답더라'하고 말하기가 어디 쉬운가 말이다. 자신의 디자인에 모든 것을 내 던질 수 있는 초월적인 정신상태에 있어야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어쩌면 책임감 있는 위인 일지도 모르겠다.
디자인의 'ㄷ'도 모르는 나도 그가 이렇게 멋있는데, 그의 후배들은 얼마나 더했을까.
의미를 담기 위해 글 쓰는 사람들이 저명한 이의 말을 ‘인용’하는 소통 방식을 택하는 것처럼, 디터 람스는 많은 디자이너들에게 인용의 대상이었다. 그의 디자인을 인용하기만 해도(예를 들어 애플의 디자인) 사용자로 하여금 본질에 가까이 다가서는 경험을 제공할 수 있었다. 디터 람스가 정의 한 ‘좋은 디자인의 10가지 조건’이란 기준을 읽어보면 그의 디자인이 어떤 촉감을 가졌는지 잠시 상상해볼 수 있다.
1. Good design is innovative. 좋은 디자인은 혁신적이다.
2. Good design makes a product useful. 좋은 디자인은 제품을 유용하게 만든다.
3. Good design is esthetic. 좋은 디자인은 심미적이다.
4. Good design makes a product understandable. 좋은 디자인은 제품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5. Good design is unobtrusive. 좋은 디자인은 요란스럽지 않다.
6. Good design is honest. 좋은 디자인은 정직하다.
7. Good design is long-lasting. 좋은 디자인은 오래간다.
8. Good design is thorough down to the last detail. 좋은 디자인은 마지막 디테일까지 철저하다.
9. Good design is enviromentally-friendly. 좋은 디자인은 환경 친화적이다.
10. Good design is as little design as possible. 좋은 디자인은 디자인이 최소화되어있다.
디터 람스는 비초에와 함께 만든 ‘좋은 디자인의 요건’들에 꼭 들어맞는 가구들을 만들었다. 그런데 왜 비초에 였을까. 아마도 이 브랜드의 사명에 에토스(Ethos)라는 매력적인 개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설파한 설득의 3요소에 등장하는 낱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성을 뜻하는 파토스(Pathos), 논리를 뜻하는 로고스(Logos)가 있다고 봤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세 번째 요소로는 이성을 뜻하는 에토스(Ethos)를 꼽았다. 그래, '이성'말이다. 인간을 설득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고,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기능하게 하는 '이성'.
비초에와 디터 람스가 가구로 이미지화 한 제품들은 인간의 이성이 가진 힘에 대한 예찬에 가깝다.
1960년 디자인된 606 유니버설 선반 시스템(606 Unibersal Shelving System)은 사용자가 원하는 사이즈로, 원하는 공간에 둘 수 있는 효율적인 선반이다. '그 이후로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동화가 아니라, '그렇게 계속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지속성을 이야기한다.
이들의 의자 역시 놀랍다. 의자(chair)의 어원이 '앉는 것'을 의미하는 라틴어 ‘cathedra’에서 유래했듯, 의자는 본래 앉는 행위가 집약된 제품이다. 그러나 한 발짝 나아가 인류에게 ‘앉는 것’이란 뭘까. 1962년 디자인된 620 의자 프로그램(620 Chair Programme)은 의자에 앉는 행위에 ‘정착’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오프 화이트, 블랙 컬러의 외부와 레드, 초콜릿, 올리브 브라운, 시나몬 등 고전적이고 물림 없는 컬러로 채택된 것 역시 오래도록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의자에 대한 고민의 산물이다.
같은 년도에 디자인된 621 테이블(621 Table)은 티테이블, 사이드 테이블, 다이닝 테이블 등 다양한 테이블을 여러 개 두는 것에 반한다. 소파 옆에 두면 소파 테이블, 침대 옆에 두면 사이드 테이블, 침대 위에 두면 아침상. 줄지어 늘어선 두 개의 테이블이 가진 기능과 역할은 무궁무진하다. 급한 순간엔 스툴의 역할까지 한다.
순수 예술의 경지에 이른 가구, 무던하게 오래 쓸 수 있는 가구, 유행이 바뀌면 바꿔버리면 그만인 가구. 백이면 백 취향이 다르니 어떤 것이 좋은 선택인지에 대해서는 말을 아껴야만 한다. 그러나 절대적인 가구라는 것이 있다면, 그건 꼭 본질을 꿰뚫는 이성의 힘으로 디자인을 마친 무엇이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비초에의 ‘좋음’은 누구라도 한눈에 예쁘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지 언정, 그 자체로 편안한 데 의가 있다.
이미지 출처 비초에(www.vitso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