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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정 Aug 28. 2020

비트라 VITRA가 스위스 메이드인 이유

70년 명성의 비결은 역시


덴마크의 전설적 디자이너 베르너 판톤은 1967년 비트라와 협업한 '판톤 체어'를 세상에 내놓았다. 플라스틱 패널 하나를 이용해 제작한 세계 최초의 의자다.

스위스에서 탄생한 가구회사, 비트라에 대한 평가는 공연公然하다. 1950년 설립한 이후 출시한 가구 중 다수가 뉴욕 현대미술관(MoMA)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의 영구 소장품으로 등록돼있다. '비트라 캠퍼스'에는 프랭크 게리Frank Gehry, 안도 다다오Ando Tadao, 자하 하디드Zaha Hadid, 알바로 시자Alvaro Siza 등 세계적 건축가가 지은 건축물이 즐비하다. 이곳에 디자인과 건축에 관한 전시, 디자인 아카이브, 가구 컬렉션을 선보이는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까지 있다.


비트라라는 브랜드는 가구를 생산하는 동시에 디자인 역사를 함께 써나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토록 세계적이고 전설적인 브랜드의 중심에 스위스의 DNA가 있다.


지난 5월, 비트라는 직접 제작한 다큐멘터리 <Chair Times>를 공개했다. 이 다큐멘터리의 화자로 등장하는 사람은 예리한 의자 수집가이자, 1977년부터 35년간 비트라를 이끌 경영자 롤프 펠바움 Rolf Fehlbaum. 그는 스위스에서 나고 자란 사람으로 스위스인의 정신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CHAIR TIMES> 는 비트라 홈페이지(www.vitra.com/en-gb/chair-times)에서 볼 수 있습니다.
스위스에는 '본베다르프Wohnbedarf'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꾸밈이 없고, 반드시 필요한 것만 들어 있는 물건을 일컫는 말입니다.
사치스러운 물건의 반대말이기도 하죠.

스위스인에게 비싸고 사치스러운 물건을 샀다고 칭찬한다면,
굉장히 불쾌하게 생각할 겁니다. 궁중문화가 없는 스위스는 고전적 가치를 강조하고, 구조적으로 사고하며, 물건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지요.
 이건 스위스인의 DNA에 깊이 내재된 가치입니다.


가구 디자이너 없는 가구·디자인 브랜드

세계적 가구 디자인 회사인 비트라에는 소속 가구 디자이너가 없다. 이들은 '훌륭한 디자이너와 협업해 그것을 실제로 구현하는 데 집중한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이 원칙은 비트라의 설립자인 빌리 펠바움Willi Fehlbaum이 만들었다. 1934년부터 스위스 바젤에서 숍 피팅(상점의 내·외부를 장식하는 일. 오늘로 치면 쇼룸 VMD역할)을 운영하던 그는 탐구심이 가득한 남자였다.


1953년 당대 가장 크고 멋진 매장들을 보기 위해 미국 여행을 더난 그는 예기치 않게 미국인 디자이너 부부가 디자인한 가구를 만나게 된다. 바로 찰스·레이 임스Charles&Ray Eames의 'LCW'. 이들이 디자인한 의자를 본 빌리 펠바움은 곧바로 그 매력에 푹 빠졌다. 가벼운 플라이 우드를 이용해 가볍고, 내구성 좋고, 군더더기 없이 만든 이 의자는 스위스인인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빌리 펠바움은 수년간 협의 끝에 임스 부부의 디자인 판매권을 취득하고 가구 생산자가 되기로 했다.

찰스·레이 임스 부부. ©Eams Office 2005


찰스·레이 임스 부부가 1945년 디자인한 라운지체어 우드(LCW). * 유럽과 중동에선 비트라가, 그 외 국가에선 허먼밀러가 판매권을 가지고 있다.
젊은 베르너 판톤과 롤프 펠바움, 그리고 최고 기술자 만프레트 디볼트


그는 찰스·레이 임스 부부와 친분을 나누며 가구 디자인에 대한 안목을 높였고, 곧 조지 넬슨George Nelson, 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 등 '단순한 형태와 기능'을 근간으로 훌륭한 디자인을 선보이는 디자이너들의 판매권까지 사들였다. 역량을 인정해주는 생산자를 만난 디자이너들이 안정적으로 디자인에 몰두하자, '좋은 디자인'이 쏟아졌다. 베르너 판톤의 '판톤 체어'도 그 일례. (판톤 체어는 약 스무 곳의 제조사가 여러 이유로 제작을 거절한 디자인이었다. 당시 비트라의 경영자이던 롤프 펠바움은 이 의자의 프로토타입을 보고 즉시 비트라 최고 기술자인 만프레트 디볼트Manfred Diebold에게 연락했다. 베르너 판톤은 이후 "롤프 펠바움이 없었다면 판톤 체어는 없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고.) 제품들은 출시와 동시에 날개 돋친 듯 팔렸다.


디자인은 디자이너가, 생산은 생산자가 한다는 효율적 아이디어가 이토록 아이코닉한 디자이너들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한 셈. 비트라는 지금까지도 '디자이너와 함께 성장할 것'을 첫 번째 정책으로 삼고, 모든 제품을 각각의 디자이너와 프로젝트 형식으로 제작한다.


디자인 세계의 슬기로운 생산자
1981년 독일 바일암르하인Weil am Rhein에 잇는 비트라의 생산 공장에 큰 불이 났다. 그러나 이 화재는 그야말로 전화위복이 됐다. 텅 빈 부지에 공장 대신 비트라 캠퍼스를 세우기로 결정한 것. 비트라는 마치 가구를 만들 때처럼 이 프로젝트를 위해서도 세계적 건축가들과 협업했다. 안도 다다오가 콘퍼런스 파빌리온을 자하 하디드가 소방서를, 알바로 시자가 공장을 설계했고, 스위스의 건축 듀오 헤어조그&드 뫼롱Herzog&de Meuron이 롤프 펠바움이 수집한 수만 점의 의자를 보관한 수장고이자, 그 일부를 대중에게 공개한 박물관 스차우디포Schaudepot를, 프랭크 게리는 비트라가 생산한 아이코닉한 디자인을 한데 모은 디자인 뮤지엄을 설계했다.

롤프 펠바움이 평생에 걸쳐 수집한 수십만 개의 의자가 있는 스차우디포. 수집품 중 일부는 일반 관람객도 볼 수 있다.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의 파사드. 건축가 프랭크 게리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입체 조각 같은 형태의 설계를 여기서도 선보임.
건축 평론가 필립 존슨은 비트라 캠퍼스를 보고 "서양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가들이 설계한 건물이 한 데 모인 건 처음'이라고 쓴 적이 있다.

2010년에는 홈 컬렉션을 위한 쇼룸이자 실험공간인 '비트라 하우스Vitra haus'까지 오픈했다. 훌륭한 건축물 아래서 디자인 전시, 워크숍, 투어를 즐길 수 있는 비트라 캠퍼스에는 매년 평균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한다. 비트라 하우스는 현재 개관 10주년을 맞아 리모델링 중이며, 2020년 9월 재개장할 예정이다.


2012년부터 최고 경영자를 맡고 있는 이는 펠바움 가문의 3대 손 노래 펠바움Nora Felbaum이다. 그는 2020년 6월 비트라 공식 SNS에 게재한 영상을 통해 신제품 출시를 알렸는데, 콘스탄틴 그리치치Konstantin Gricic의 '시티즌Citiznen', 재스퍼 모리슨Jasper Morrison의 '모카Moca', 그리고 1941년 장 프로베가 디자인한 '세즈 투 부아Chaise Tout Bois'까지 총 세 점의 의자를 언급한다.

왼쪽부터 '시티즌', '모카', '세즈 투 부아'
인테리어 디자이너 찰랩&에레로Charlap&Herrero가 비트라의 클래식 디자인과 신제품으로 꾸민 쇼룸.

의자는 앉기 위한 도구일 뿐 아니라, 시대의 초상입니다.
재료, 기술, 취향, 사회적 우선순위가 녹아있기 때문이죠.
 우리는 기존의 디자인을 새롭게 출시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탐구합니다.


오래전 빌리 펠바움이 임스 부부의 디자인 가치를 알아보고, 그들의 디자인을 세계가 알도록 확산한 것처럼.

비트라는 여전히 그들의 원칙을 고수하며 오리지낼리티 그 자체에 값어치를 매기는 슬기로운 생산자 역할을 맡고 있다.




<행복이 가득한 집> 2020년 9월호 별책 부록 '스위스 스타일'에 게재한 글입니다.

모든 사진은 비트라에서 제공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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