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10월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냥 출근하자마자 오랫동안 쓰지 않던 메일 계정의 꽉 찬 수신함을 정리했다. 다음 날 아침 그 계정으로 메일이 한 통 도착했다. 조혈모세포 은행에서 온 거였다. 메일은 혈액암을 앓는 10살 미만 여아 환자와 기증자(나)의 유전자 일부가 일치하니, 기증 가능 여부를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환자는 조혈모세포 이식만이 유일한 치료 방법이라고 했다. 뭐야? 요즘은 이런 스팸도 있어? 기증? 내가? 언제?
02
퍼뜩 기억났다. 9년 전 대학교 새내기 일 때 학교에 헌혈차가 온 적 있다. 영화표를 받으려고 친구들과 함께 헌혈차에 올랐다. 초코파이를 하나 더 준다고 해서, 조혈모세포 기증에 동의하고 샘플용 피를 조금 더 뽑았다. 조혈모세포 은행의 코디네이터 선생님은 (그간 내 연락처가 바뀐 탓에) 오래전 메일로 연락했다고 했다. 내가 기증 의사가 있다고 하자 당시 내가 일하던 회사 앞까지 급히 찾아오셨다. 유전자가 전부 일치하는지 검사하기 위한 채혈을 했다.
03
소아 혈액암 환자는 대개 세상에 날 때부터 아프다고 한다. 그 애가 태어나던 시점에 내가 (초코파이 받으려고) 조혈모세포를 기증했고, 내가 퇴사를 결정한 이십 대 마지막 가을에 그 애가 날 필요로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이제 운명이 있다고 믿는다.
04
조혈모세포 은행에는 45만 개의 샘플이 있다. 수혜자와 유전자가 일부 일치하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단 두 명. 검사 결과 내가 적합했다. 코디네이터 선생님은 앞서 수십 번 했던 질문을 또 했다. "기증을 포기하실 수도 있어요. 그건 기여자의 권리인데요. 다만 그렇게 되면 수여자는 반드시 사망합니다. 그래도 하시겠어요?" 반드시라는 단어가 문맥에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가 하려는 말에 꼭 맞는 수식어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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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 절차는 내가 신경 쓸 것도 없이 착착 이뤄졌다. 코디네이터, 간호사, 병원 시스템은 이미 기여자와 수혜자를 위한 체계를 잘 갖추고 있었다.
06
열 살이 채 안된 수혜자는 내게 세포를 받기 위해 강도 높은 방사선 치료를 받는다. 몸에 있던 걸 다 없애는 과정이다. 나는 되도록 큰 병이나 사고가 있지 않도록 주의하면 됐다. 입원 며칠 전부터는 크리스마스 연휴인 걸 감안해 간호사 선생님이 집으로 방문했다. 전처치를 위한 주사를 내 팔에 놓고, 부작용이나 통증도 꼼꼼히 살펴주셨다. 나는 주사도 아프고, 부작용도 아프다고 징징거렸다.
07
드디어 오늘, 내가 병원에 왔다. 호텔을 방불케 하는 1인실. 기증자라고 뭔가를 하지는 않는다. 간호사 선생님이 챙겨주신 간식이 잔뜩 있는 방에 누워있는 호사가. 정해진 시간에 와서 주시는 밥 잘 먹고 누워있는 보릿자루. 주치의와 간호사 선생님이 보릿자루에게 전쟁 영웅 대접을 해주셔서 쑥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