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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Nov 12. 2023

한국 아동청소년 문학작품 속 포스트휴먼 이미지 고찰

11월 9일부터 12일까지 진행된 2023 세계방정환학술대회 3일 차에 「21세기 한국 아동청소년 문학작품 속 포스트휴먼 이미지에 반영된 동시대 인간성 고찰」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글입니다.



1. 들어가며

문학은 세계를 투영하는 물이다. 물이 맑다는 것은 그 물이 타고 흐르는 세계 역시 그만큼 청아하다는 뜻일 테지만, 실제로 티 없이 맑기만 한 문학은 상상하기 어렵다. 사회 곳곳의 음지를 깊이 응시하여 사람들 눈앞에 펼쳐내는 것이 문학의 본령이라면, 진실한 문학은 얼마간 어둡고 어지러운 세계의 풍경을 담고 있어야만 한다. 그렇게 혼탁한 문학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맑은 세계의 이상을 어렴풋이 감지한다.

주지하는 바 세계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중이다. 가파른 변화는 사람들에게 필히 감각의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에 선택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며 소위 세계에 대한 ‘통합된 이해’를 추구하는 듯 보이지만, 우리가 외부 세계를 일관되게 인식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부터가 어쩌면 거대한 착시현상으로부터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이렇듯 혼란한 감각을 현대 문학이 어떠한 방식으로 투영하고 있는지를 여기서 일일이 밝힐 수는 없겠으나, 다만 우리가 글을 쓰고 읽는 행위, 즉 문학과 관계를 맺는 더딘 행위가 그 변화의 난맥상과 완전히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음을 이제 우리는 안다. 때문에 숨이 가쁘게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우리는 문학을 통해 우리가 지나온 자리와 서 있는 자리,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자리를 필연적인 시차 속에서 가늠해 보게 된다.

오늘날 문학을 통해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일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기억하는 일이다. 인간은 어느덧 외부 세계의 이해를 뛰어넘어 자기 존재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거란 전망에 도달했으나, 그 현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앞으로 어떤 풍경을 우리 앞에 펼쳐 보일지에 대해선 그저 분분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문학적 성찰과 문학적 탐구의 지평이 열려야 한다.

이 연구의 목적은 21세기에 발표된 몇몇 아동청소년문학작품에 나타난 포스트휴먼 캐릭터의 이미지를 개관함으로써, 그 안에 담긴 동시대 인간성에 관한 시사점을 탐구하는 데에 있다. 이 말에는 직관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있다. 일반적으로 트랜스휴머니즘 논의에서 자주 등장하는 ‘포스트휴먼’¹은, ‘탈(脫) 인간’, 또는 ‘후(後) 인간’으로서 현생 인류 이후의 존재를 상상하거나 정의할 때 주로 쓰이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탈인간의 개념을 끌어온다는 발상은 언뜻 초점을 비껴간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때때로 탐구하고자 하는 대상의 속성이 일부 소거되거나 반대로 극단적으로 강화된 형태를 상상해 보는 것은, 오히려 대상의 현재적 본질을 파악하는 데에 보다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 이는 물론 우리 자신, 곧 인간의 존재론적 본질을 파악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우리는 오늘날 지구의 지배종이라 할 수 있는 호모 사피엔스²가 기술적으로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여러 한계를 조명하는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포스트휴먼을 활용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지닌 본질적 속성을 보다 깊이 사유할 수 있도록 설계된 일종의 사고실험이며, 또한 동시대 인간성을 탐구함에 있어 문학작품 속 포스트휴먼 캐릭터를 경유하는 방법론이 결정적으로 의미를 갖게 되는 지점이다.

본론에 앞서 작품 선정의 기준에 대해 간략히 일러두고자 한다. 이 글에 중요하게 언급되는 작품들은 첫째, 아동 혹은 청소년 인물이 주인공, 또는 그에 가까운 역할을 수행하고, 둘째, 포스트휴먼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존재를 비중 있게 등장시키며, 셋째, 앞선 두 주체가 일치하거나 혹은 긴밀하게 상호작용함으로써 서사의 중요한 전개가 이루어진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2. 포스트휴먼의 성립, 그는 스스로 살아있는가.

21세기의 한국 아동청소년문학작품에 나타난 포스트휴먼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그 출발점은 마땅히 이현의 『로봇의 별』(2010)이어야 하지 않을까. 'SF동화'라는 말이 아직 낯설게 들리던 시기에 본격적으로 살아있는 로봇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며 그들의 성장기를 설득력 있게 그려낸 『로봇의 별』은 가히 한국 SF동화의 총론이라 불릴 만하다. 처음에 인공지능로봇 '나로'의 이야기로 시작한 이 작품은, 나로와 똑같이 생겼지만 서로 다른 정체성을 지닌 로봇 '아라'와 '네다'의 이야기를 차례로 경유하며 세 권짜리 묵직한 서사를 완성해 낸다.

물론 현실에서 익숙하게 마주하는 로봇들은 이야기 속 로봇과 다르다. 이를테면 우리는 로봇청소기를 두고 포스트휴먼의 도래를 말하지 않는다. 살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시중에 유통되는 다양한 로보틱스 제품들은 포스트휴먼에 관한 논의에서 당연하게 전제되는 '살아있음'의 요건을 아직은 충족하지 않는다. 현실의 로봇과 이야기 속 로봇의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야기 속에서 개성을 부여받은 로봇들은 종종 인간처럼 사고하고 행동함으로써 스스로 살아있음을 증명해 내고, 또 그럼으로써 포스트휴먼의 지위를 획득한다. 즉 포스트휴먼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상상함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원칙은 그것의 ‘살아있음’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로봇의 별』의 주인공 로봇들은 포스트휴먼 캐릭터로서 가장 중요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명백히 살아있으며, 다른 누구에 의해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 나로와 아라와 네다는 모두 로봇 3원칙³에 기반하여 작동하도록 설계된 로봇이지만 각자의 여정을 통해 종국에는 독립적인 개별자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자유를 쟁취한다. 이처럼 『로봇의 별』은 기존의 아동청소년문학에서 좀처럼 주체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던 로봇을 포스트휴먼 캐릭터로 우뚝 세우며 서사의 전면에 배치하였다.

이제 『로봇의 별』에서 발견한 실마리를 따라 한 발 더 깊이 들어가 보자. 포스트휴먼의 존재를 긍정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건이 ‘살아있음’이라면,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살아있음의 방식, 즉 존재의 양식이다. 이야기 속 포스트휴먼은 어떠한 방식으로 제 삶의 의미를 획득해 내고, 그럼으로써 현실의 독자에게 설득력을 지니게 되는가.

임은하의 『복제인간 윤봉구』(2017)의 주인공 ‘봉구’는 형 ‘민구’를 원본으로 삼아 만들어진 복제인간이고, 오하림의 『순재와 키완』(2018)에 나오는 ‘필립’은 ‘키완’이 만들어낸 인조인간이다. 봉구는 비록 누군가의 사본으로 세상에 태어났지만, ‘진짜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매 순간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필립 역시 자신이 만들어진 이유인 중대한 임무 앞에서 시종 갈등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확장한다. 이들 서사를 통해 적절히 드러나는 바, 유일하게 의미 있는 존재 양식은 ‘스스로’ 살아있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의 수단으로서만 기능하는 이는 진정 살아있는 존재라고 할 수 없다. 설령 그 누군가가 창조주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처럼 인간이 창조주가 되어 생명을 지닌 존재를 빚어낸다는 이러한 발상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물론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또는 근대의 프로메테우스』(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 1818)를 만나게 될 것인데, 국내에 이를 메인 모티프로 삼은 SF동화가 있다는 것은 반갑고 흥미로운 일이다.

최영희의 『써드』(2020)는 존재의 양식을 세 갈래로 도식화하여 제시하고 있다. 도식에 따르면 제1의 존재는 인간이고, 제2의 존재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기계인간이며, 제3의 존재는 기계인간의 손에서 탄생한 괴물이다. 제목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이 작품의 중심 소재는 제3의 존재로서의 괴물이고, 이는 물론 프랑켄슈타인의 일그러진 피조물을 연상케 한다. 이야기는 등장인물 간 관계를 창조자와 피조물의 연쇄적 관계로 설정한 뒤 이를 거듭 역전시킴으로써 서사의 긴장감을 형성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써드』는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을 세상에 내어놓은 인간의 오만함을 지적하는 듯 보이는데, 결말에서는 그 괴물을 포용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동시대 윤리에 걸맞은 메시지를 만들어낸다. 요컨대 이 작품에서 포스트휴먼의 존재 의미는 약자의 정의를 실현하는 데에 있다고 말할 수 있고, 이는 극 중 인물이 자신의 존재 양식을 탐구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유의미하게 작용한다. 이것은 현실의 온갖 불의와 부조리, 약자를 향한 혐오가 인간 이후의 존재에 의해 거뜬히 해결되기를 바라는 희망의 발로일까.

현재의 인간이 경험하고 있는 개인적, 사회구조적 결함을 극복하거나 보완하는 방향으로 포스트휴먼 캐릭터를 활용하는 작품은 『써드』뿐만이 아니다. 따라서 트랜스휴머니즘이 반영된 작품을 통해 동시대 인간성을 고찰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각의 작품들이 지금의 인간이 지닌 어떤 한계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다음 세계의 인간을 설계하고 있는가를 짚어보는 데에 있다.


3. 포스트휴먼의 설계, 우리가 가진 것과 갖지 못한 것

정재은의 SF동화집 『내 여자친구의 다리』(2018)에 수록된 단편 「아바타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홀로그램 아바타를 이용하여 학교생활을 한다. 생물학적 기반으로서의 육체는 집에 둔 채, 가상의 신체에 접속하여 활동하는 이러한 형태의 존재를 포스트휴먼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 통상 포스트휴먼은 현생 인류와 질적으로 아주 다른, 그래서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 없을 만큼 어떤 불가역적 변화가 이루어진 뒤에 나타난 존재를 지칭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보다 폭넓은 논의를 위해 ‘인간의 지적, 육체적, 심리적 능력을 향상시키는 기술을 개발하고 확대함으로써 인간 조건을 근본적으로 향상시킬 가능성을 긍정하는 문화적 운동’의 결과로써 나타난 존재의 양식까지 포함하여 다루고자 한다.

위 동화집의 표제작 「내 여자친구의 다리」는 그러한 맥락에서 포스트휴먼 캐릭터의 주요한 용례로 간주될 수 있다. ‘연이’는 교통사고 이후 지능형 보조 다리를 갖게 되었다. 물론 인조 다리를 장착한 정도로 포스트휴먼의 범주에 넣는 것은 다분히 작위적으로 느껴질 수 있겠으나, 실은 자연 상태의 인간에서 어느 정도의 개량을 거쳐야 포스트휴먼으로 간주할 것이냐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진행 중이고, 가까운 미래에 결론이 날 것 같지도 않다. 여기에서는 서사 속에서 그러한 장치가 사용되는 맥락에 주목하여 논의를 이어가도록 한다. 연이는 인조 다리를 차고 발레리나 월드 오디션에 나가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데, 사람들은 연이의 다리가 인조라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갖은 비판을 쏟아낸다. 그러한 비판에 담긴 일말의 합리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동시에 독자는 다음과 같은 의문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인간은 과연 포스트휴먼의 도래로 인해 새롭게 규정될 존재의 본질을 오롯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현시점에서 포스트휴먼의 설계는 필히 인간이 갖는 근본적 결함, 또는 한계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는 문학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포스트휴먼 캐릭터를 중요하게 활용하는 작품들은 대부분 인간이 가진 것과 갖지 못한 것,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남유하의 창작동화집 『나무가 된 아이』(2021)에 수록된 단편 「뇌엄마」를 보면 쟁점은 보다 명료해진다. ‘지아’의 엄마는 8년 전 교통사고로 모든 뼈와 장기가 부서지는 손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이 세계에는 사람의 뇌를 분리하여 의식을 보존하는 기술이 마련되어 있다. 이제 지아의 엄마는 유리관 속 뇌와 의식으로서만 존재하게 되었다. 인간 정체성의 물리적, 생물학적 기반을 과감히 축소한 이 작품의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몸을 떠나서도 여전히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가. 제 의지에 반하여 신체를 박탈당한 인간의 정체성은 이전과 같을 수 있는가. 즉, 인간은 신체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이와 같은 질문은 비단 인간의 신체에만 국한되지 않고, 하나의 존재를 이루는 요소 전반에 걸쳐 뻗어나간다. 여기서 중요한 주장은 두 방향으로 나뉜다. 하나는 인간의 결함을 극복하고 보완하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재발견하고 수용하는 방향이다. 그리고 그 결함에는 개인의 신체적, 정서적인 것뿐 아니라 사회구조적 문제나 다수의 신념과 같은 관념적인 측면까지도 모두 포함된다.

제5회 한낙원과학소설상 수상작인 남유하의 「푸른 머리카락」(2019)은 눈에 띄게 이질적인 존재를 내세워 혐오와 차별, 그리고 화해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야기는 학교폭력의 피해자였던 주인공이 차별받는 이방인과 정서적으로 연대해 가는 과정을 그림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인간 사회에 만연한 혐오를 돌아보게 한다. ‘재이’의 푸른 머리카락은 그가 다른 행성에서 왔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표지로 작동하는데, 이처럼 간결하고 가시적인 설정을 통해 이야기는 인간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 어느 때보다도 시의적절한 화두를 던진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 포스트휴먼 캐릭터가 등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꼭 인간의 개인적·사회적 결함을 극복하는 방향으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그들은 결코 닿을 수 없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존재한다. 윤해연의 『빨간 아이, 봇』(2021)에는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한 4기의 로봇이 중심인물로 등장하는데, 이들의 여정은 폐허가 된 지구에서 마지막 남은 인간 아이를 찾는 과정에서 의미를 획득한다. 이 이야기가 택한 전개에 따르면, 로봇은 그가 아무리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고 움직이더라도 인간이 살아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있을 수 없다. 인간의 생명력은 기술적으로 결코 흉내 내거나 따라잡을 수 없는 무엇이다. 즉, 포스트휴먼은 인간을 대체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인간 아닌 무엇을 대체할 수 있으며,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존재하는가.


4. 포스트휴먼의 미래, 그들은 무엇을 대체하는가.

단요의 『다이브』(2022)에 등장하는 복제인간 ‘수호’는 죽은 자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제작된 대체품이다. 딸의 죽음을 견딜 수 없었던 수호의 부모가 복제인간을 만들어서라도 그것을 극복하려 했다는 건데, 정작 인간 수호는 제가 죽고 난 뒤에 자신의 복제품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문제는 복제인간 수호가 인간 수호의 그런 감정적 기억까지 모두 데이터로 보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복제인간 수호는 딸을 대신해 주길 바라는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극심한 갈등을 빚는다.

여기에서 생각해 볼 만한 딜레마가 제기된다. 복제인간 수호가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한들, 수호의 부모는 그가 단지 기계장치로 이루어진 제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부모의 손에는 제품을 초기화할 수 있는 스위치가 들려 있다. 스위치를 누르고 지난 시행착오에서 확인된 불필요한 기억들을 지우면, 수호는 다시 그들이 원했던 딸의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적어도 한동안은. 무신경하게 스위치를 누르려는 순간 질문이 날아든다. 이거면 충분할까. 우리가 포스트휴먼에 관한 수많은 발상들에서 찾아내고자 했던 것이 정말 해진 부품을 갈아 끼우는 정도의 존재성이었을까.

최영희의 「안녕, 베타」(2015)를 보자. 이 이야기에서 ‘베타’는 대체 인간이고, ‘진아’는 원(原) 인간이다. 대체 인간의 용도는 원인간이 하기 싫거나 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하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대체 인간의 존재성은 명백히 원인간에 종속된다. 그의 존재론적 본질은 고유한 개성이 아니라 기술적 모방의 정교함에 있다. 그러나 베타는 이야기의 시작부터 스스로 사라지는 돌발 행동을 함으로써 주어진 임무에서 능동적으로 이탈한다. 이 의외성이 역설적으로 베타에게 고유한 정체성과 함께 독자적인 서사의 자격을 부여한다. 결국 베타의 돌발 행동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비틀고 변형함으로써 스스로 존재 증명을 해내려는 저항의 과정으로 볼 수 있고, 실은 그것이 베타가 이 이야기 속에서 존재하는 진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독자는 이 작품이 원인간과 대체 인간의 관계성에 주목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인간성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어째서 우리는 이야기 속 포스트휴먼을 떠올릴 때조차 인간성에 대한 고민을 떼어내지 못할까. 간단히 답하자면 물론 우리 자신이 인간이기 때문이겠지만, 이야기 속에서 포스트휴먼과 인간이 직접적으로 관계 맺는 방식을 들여다보면 보다 구체적인 대답도 가능해진다. 요컨대 이 문제에는 현생 인류와 미래의 포스트휴먼 사이에 표면적으로는 유의미한 차이점이 없을 수도 있다는 인간의 의구심이 반영되어 있다.

남세오의 『너와 내가 다른 점은』(2023)은 그러한 의구심을 제목에서부터 직선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야기 속 ‘로엔’은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려울 만큼 인간과 똑같이 만들어진 안드로이드이다. 인간 ‘나리’는 그런 로엔의 정체를 우연히 알아내고 끈질기게 파헤치지만, 그 과정에서 얻게 되는 것은 로엔과 자신 사이에 사실상 다른 점이 없다는 깨달음일 뿐이다. 이처럼 정교한 인공존재의 출현은 필연적으로, 인간만이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는 자의적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만약 인간과 탈인간이 겉으로 구분되지 않는 물리적 형식을 공유하게 된다면, 포스트휴먼 시대를 떠받치는 기술적 진화에 관한 논의는 얼마간 힘을 잃게 될 것이다. 진화의 목적이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야기 속 포스트휴먼 이미지가 정말로 의미하는 것, 정말로 대체하고자 하는 대상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여러 작품들을 통해 살펴본 바 외적인 진화가 사실상 유의미한 차이를 수반하지 못한다면, 이제 중요한 초점은 인간 내적인 전환에 맞추어진다. 우리는 이야기 속 포스트휴먼에게서 우리 자신의 몸이 아니라 마음, 즉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성을 갖춘 특별한 존재라는 임의적인 자의식을 전환시켜 줄 가능성을 보게 된다. 다분히 역설적이지만 포스트휴먼의 의미는 인간 이후에 도래할 세계의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누구도 세계를 독차지할 만큼 특별하지는 않다는 성찰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5. 나가며

지금까지 21세기 한국 아동청소년 문학작품에 나타난 여러 포스트휴먼 캐릭터를 살펴보며, 그 안에 투영된 이미지가 각각 어떠한 특징을 갖는지 확인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파악될 수 있다.

첫째, 포스트휴먼은 무엇보다도 스스로 살아있는 존재로서 최초의 의미를 갖는다. 독자적인 판단으로 제 삶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그는 주체적인 서사의 자격을 부여받을 수 없고,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포스트휴먼의 존재성에 어긋난다.

둘째, 포스트휴먼은 현재의 인간이 지닌 결함에 대한 인식에 기초하여 설계된다. 즉, 포스트휴먼은 결코 인간이라는 구심점으로부터 동떨어져 성립하지 않는다. 스스로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 포스트휴먼의 존재 의의가 빠짐없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므로, 우리는 다가올 포스트휴먼에게 모종의 가치 있는 삶을 기대한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인간이 아직 닿지 못한 지점에 대한 뚜렷한 지각을 기반으로 한다. 여기에는 개인적, 사회적, 신체적, 정서적, 물리적, 관념적인 것이 모두 포함된다.

셋째, 포스트휴먼은 인간이 가진 외형적 특질의 일부, 또는 전부를 강화하고자 하는 인간의 보편적 욕구를 반영한다. 그러나 포스트휴먼 캐릭터를 비중 있게 활용한 문학작품들이 일관되게 시사하는 바, 그들은 인간의 외면보다 먼저 내면에 자리한 의식 체계를 보다 성숙한 형태로 대체하는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맥락에서 인간 존재를 새롭게 정의 내리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세계 속에서 인간이 갖는 상대적 지위를 객관적으로 재정립하고, 그럼으로써 지금껏 이루지 못한 가치, 혹은 세계와의 조화를 실현하는 일이다.

위와 같은 시사점을 통해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이들 포스트휴먼 캐릭터가 다름 아닌 우리 자신과 사회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과 같은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이야기 속 포스트휴먼에게 기대하는 모습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기대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서사 장치로서의 포스트휴먼은 그렇게 동시대의 인간성을 고찰하는 데에 더없이 유용한 재료가 된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종차원의 변화가 예고되고 그에 관한 논의가 날로 활기를 더해가는 가운데, 정작 인간들 자신이 그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는 아직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는 듯하다. 우리가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포스트휴먼 시대의 도래는 이미 정해진 사실이기 때문일까. 그러나 다루어지지 않는다 해서 사람들이 무관심하다고 섣불리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이 글에 언급된 다양한 결의 아동청소년 문학작품들을 경유함으로써 우리는 사람들이 저마다 가진 인식틀로 현상을 능동적으로 해석하고 수용하고자 시도해 왔음을 알게 되었다.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쌓여가는 노력들로, 인간은 여기저기에서 느리지만 분명하게 변화를 일구어내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서, 어쩌면 기술적 진화로서의 포스트휴먼보다 문학적 성찰을 통한 인간성의 진화가 한 발 더 빨리 찾아오지 않을까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¹ 이종관은 그의 저서 『포스트휴먼이 온다』에서, ‘포스트휴먼’의 정의에 필요한 이론적 기반으로서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의 차이를 유의미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 글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포스트휴먼은 과학기술의 발달 혹은 가상의 존재에 관한 인간의 상상에 힘입은 ‘인간 이후의 물질적 존재자’를 광범위하게 통칭하는 개념으로서, 포스트휴머니즘보다는 트랜스휴머니즘의 견지에 보다 적확히 부합한다고 볼 수 있겠다.

²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세상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이 그들의 언어에 있음을 시사하는 가설을 소개한 바 있다. 이는 모종의 언어적 프로세스를 통해 새로운 존재의 출현을 예고하는 오늘날의 트랜스휴머니즘과도 맞닿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³ ‘로봇 3원칙은 1942년에 아이작 아시모프가 단편 소설에서 발표한 뒤 그의 모든 소설에 적용한 로봇의 기본 작동 원리로, 그의 세계관에서 이 원리를 무시한 로봇은 제작할 수 없다. 로봇 3원칙은 이렇다. 1원칙: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되고, 인간이 해를 입는 것을 모른 척해서도 안 된다. 2원칙: 1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3원칙: 1원칙과 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김보영, 「아이작 아시모프, 로봇 3원칙의 제안자」,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 돌베개, 2019, 79면에서 인용.

통상 SF에 등장하는 외계인을 포스트휴먼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때로 이들 외계인 캐릭터는 여느 진지한 연구 못지않게 포스트휴먼에 관한 쟁점들을 훌륭하게 드러내어 준다. 이 글에서는 남유하의 「푸른 머리카락」 역시 그러한 사례에 부합한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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