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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Nov 08. 2023

진실이 찾아오는 길

송찬호, 『초록 토끼를 만났다』, 문학동네, 2017

대학원 여름학기에 과제로 제출한 글입니다. 동시집 한 권을 골라 좋은 시 세 편, 아쉬운 시 두 편에 대한 비평문을 작성하는 과제였고, 그래서 아쉬운 소리가 조금 섞여 있습니다. 사실 작품에 대해 좋은 점만 나열하는 글은 훨씬 쓰기가 쉽고, 그만큼 좀 둔해지는 감이 있지요. 때문에 의식적으로라도 아쉬운 점을 찾아 써보는 연습이 필요한데 마침 좋은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다만, 과제가 아니었다면 아쉬운 작품보다 좋은 작품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쓰긴 했을 거예요.



연일 나쁜 소식이 들려오는 와중에 운 좋게도 몰랐던 시를 매일 읽었다. 읽으면서 지금이 시를 읽을 때인가를 생각하다가, 지금이라서 시를 읽어야 한다고 답하다가, 다시 지금이 지나가도 네가 시를 읽겠느냐고 묻다가, 쓸데없는 생각 말자고 했다. 어차피 생각은 마음을 따라잡지 못하고, 느껴본 바론 시도 그렇다.

나에게 시는 언제나 조금 불완전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 불완전함은 때로 더욱 완전했으면 하는 아쉬움으로, 또는 더 완전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안도감으로, 하여간 종잡을 수 없는 감각을 남기고는 금세 사라져 버린다.

그렇게 서툴게 읽은 동시들에서 꼭 한 가지를 건져 올려야 한다면, 그건 다름 아닌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말은 왠지 써놓고도 미덥지 않다. 진실에 대해 그렇게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진실 대신 마음에 꼭 맞는 단 하나의 낱말을 찾아 여기에 적어두고 싶지만, 적어도 이 글을 쓰는 동안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일단 진실이라는 것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고 치고, 불완전한 글들을 읽고 쓰는 동안 그것이 찾아오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이와 가까운 마음을 이 시집의 표제작 「초록 토끼를 만났다」에서 처음으로 보았다. 시에는 진실에 대한 시인의 신념이 드러나 있다.     


초록 토끼를 만났다
거짓말 아니다
너한테만 얘기하는 건데
전에 난 초록 호랑이도 만난 적 있다니까

난 늘 이상하고
신기한 세상을 기다렸어

‘초록 토끼를 만났다’고
또박또박 써 본다
내 비밀을 기억해 둬야 하니까
그게 나에게 힘이 되니까

―「초록 토끼를 만났다」 전문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시는 묻는다. 누군가 정말로 초록 토끼를 만났다고 했을 때, 당신은 그 말을 몇 퍼센트의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나는 살면서 초록 토끼를 본 적이 없지만, 그것이 세상 모든 토끼가 초록색이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로 쓰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까 세상 어딘가에는 정말로 초록 토끼가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것을 직접 보았다는 목격자의 증언이 나온 다음에야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럼에도 나는 왠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를 주저한다. 세상에 초록 토끼가 어디 있냐는 쉬운 말과, 눈에 보이는 증거를 대라는 옹색함으로, 그렇게 나의 세상은 또 한 번 확장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문다. 초록 토끼를 만났다는 말을 기회 삼아 초록 토끼가 없는 세계의 울타리를 단단히 세운다.

이것은 일종의 본능이다. 인간의 본능은 일관되게 편안한 상태를 추구한다. 낯설고 기이한 것들이 없는 세계는 편안하다. 그러니 일생을 편안하게 사는 것이 목표라면 굳이 밖으로, 세계로 뛰쳐나갈 이유가 없다. 바깥 세계는 미지의 현상으로 가득하고, 그중 어떤 것들은 한 사람의 이해를 제멋대로 휘젓다가 끝내 불쾌감을 안겨주고 떠난다. 불쾌해지고 싶지 않은 우리는 종종 대상을 앞에 두고 제 눈을 가리는 선택을 한다. 초록 토끼를 만났다는 친구에게 거짓말 말라며 눈을 흘기는 것 역시 그런 행위였을까. 그런 반응이 나올 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시의 화자는 “초록 토끼를 만났다”라는 선언 뒤에 곧바로 “거짓말 아니”라고 덧붙인다. 언뜻 조급해 보이기까지 하는 투다. 이런 반응을 처음 겪은 게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이어서 곧바로 “너한테만 얘기하는” 거라고 생색을 낸다. 이쯤 되면 진실보다 중요한 것은 논리적 진술의 정합성이 아닌가 싶어 의아해졌다가 문득 깨닫는다. 아, 우리가 지금 단둘이 있구나.

그제야 화자의 다음 진술이 비상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가 늘 기다렸다는 “이상하고/ 신기한 세상”은 초록 토끼가 존재하는 세상일 테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는 초록 호랑이도 존재해야 하고, 그것들을 모두 만났다는 화자의 말을 믿는 나도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이상하고 신기한 세상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적어도 화자가 지닌 신념의 범위 안에서, 그곳은 내가 경험하는 현실보다 명백히 더 나은 세상일 것이다. 그러니까 화자는 나에게, 오로지 나에게만,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의 청사진을 슬쩍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운 좋은 나는 이제 온갖 낯설고 기이한 것들과 더불어 불편하게 살겠다는 마음을 다진다. 불편함의 자각은 그렇게 운 좋은 소수만이 점하는 인간성의 보루가 된다.

아직 시는 끝나지 않았다. 화자는 자신만의 진실을 기록으로 남기는 중이다. 그는 “‘초록 토끼를 만났다’고/ 또박또박” 쓰고 있다. 믿을 만한 타자와 진실을 공유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고 본질적인 일은, 최초의 진실을 어딘가에 써두는 일이다. 그것이 그에게 힘이 되기 때문이다. 바랜 기억과 거친 부정 앞에서도 한결같이 진실을 지켜내는 힘은 그의 기록으로부터 온다. 기록은 곧 시가 되어 타인의 마음을 두드린다. 결국 시란 나와 타인의 마음에 진실을 아로새기는 일이고, 그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시를 읽는 모든 독자가 마주할 필연이다.

요컨대 우리는 어떻게든 삶에서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는 어린이 독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를 물었던 처음의 질문은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뻗어나가야 한다.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저마다의 진실을 품고 있어야 하는가. 다음 시를 보자.     


자기가 앵무새라고 생각하는
이상한 상자가 있어

종이로 만든 상자일 뿐,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앵무새로 보이지 않는데 말이야

그런데, 왠지 상자를 열어 보고 싶어
안에 정말 앵무새라도
들어 있을지 누가 알아?

가슴이 두근거려!
상자를 열면
상자가 앵무새처럼 막 지껄일 것 같아

―「앵무새 상자」 전문


시에 대한 일차적 해석은 앵무새를 상자의 꿈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 도식에서 상자는 금세 어린이가 되고 앵무새는 그가 품는 이상의 자리에 올라서게 된다. 어린이는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상자처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만, 기실 가능성은 그 어떤 결과도 담보하지 않는 허상이다. 결국 아무리 우겨봤자 상자는 상자일 뿐인데, 이상하게도 화자는 그 상자를 열어 보고 싶다. 그걸 열면 무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린이가 가진 남다른 꿈의 크기를 알아본 어른의 비스듬한 시선으로 쓰인 시일까. 그렇게 보아도 무리는 없겠지만, 어쩐지 지나치게 매끄럽다는 인상이다. 나도 왠지 이 이상한 상자를 한 번 더 열어 보고 싶다.

처음부터 다시 보자. 시의 제목은 ‘앵무새 상자’다. 상자와 앵무새의 임의적 결합에서 떠올리게 되는 가장 흔한 이미지는 물론 상자에 앵무새가 들어있는 형태일 것이다. 그 편이 어린이가 가슴속에 품고 있는 꿈을 표현하기에도 더욱 수월해 보인다. 그러나 시는 당혹스럽게도 자기가 앵무새라고 생각하는 상자와, 그 상자를 바라보는 화자의 독백으로 이루어진다. 예측과 현상의 괴리는 역설적으로 이 시에 매력과 개성을 부여한다.

주지하는 바, 상자는 앵무새일 수 없고 앵무새는 상자일 수 없다. 이 간단한 명제에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상식적인 대화를 이어갈 수 없다. 화자 또한 이 상자를 처음부터 “이상한 상자”라 규정하며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대화에 필요한 최소한의 합리적 토대이다.

동시에 화자는 ‘상자가 생각을 한다’라는 이상한 주장을 수용함으로써 일면 상자의 입장을 이해하는 듯한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 그러니까 화자의 시선에서 이상한 것은 상자가 자신을 앵무새라고 생각하는 것이지, 상자가 생각을 하는 것 그 자체는 이상하게 볼 일이 아닌 것이다. 바로 이 지점으로부터 시가 드러내는 모호한 진실이 피어난다. 거칠게 말하자면, 여기에서 진실은 사물의 속성이 아니라 화자의 시선에 달려 있다.

화자는 3연에서 “그런데, 왠지 상자를 열어 보고 싶”다고 말하며, “안에 정말 앵무새라도/ 들어 있을지 누가” 아냐고 묻는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설정된 이 물음은 바로 다음 연에 나오는 진술에 비추어볼 때 조금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4연에서 화자는 “가슴이 두근거려!”라고 외치고는, “상자를 열면/ 상자가 앵무새처럼 막 지껄일 것 같”다고 말한다. 즉, 화자의 기대 층위에서 3연의 상자는 앵무새가 담긴 상자이고 4연의 상자는 앵무새처럼 막 지껄이는 상자이므로, 당연하게도 두 연에 묘사된 상자는 근본적으로 다른 속성을 갖는다. 화자가 어떤 시선을 가지고 바라보는가에 따라 사물의 진실이 달리 구현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상자는 지금 앵무새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상자는 정말로 앵무새이고, 그에 따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상자가 입을 열어 마음껏 지껄일 수 있도록 놓아주는 것이다. 편견 어린 시선의 속박으로부터 풀어 주는 것이다.

이처럼 시에서 진실은 종종 전위적인 형식을 띠고 찾아와 예상치 못한 깨달음을 안겨주곤 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진실은 텍스트 안쪽에만 머무르지 않고 때로 그것이 읽히는 시점이나 상황과 결을 같이 한다. 다음의 시를 보자.


곰은
산 아래 내려가
벌통 꿀을 훔쳐 먹지 않겠다고
산뽕나무 앞에서 약속했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도
곰이 다니는 길목에
올무나 덫을 놓지 않겠다고
산뽕나무 앞에서 약속했다

곰과
사람들 사이에
산뽕나무가
사이좋은 경계가 되었으면 좋겠다

곰은 가끔씩 산뽕나무까지만 내려와
나무에 경계 표시를 하고 가고
사람들도 산밭에서 일하다 산뽕나무 그늘에
쉬었다 가고

―「산뽕나무」 전문


시집이 출간된 시점은 2017년 여름이다. 그리고 2023년 여름에 「산뽕나무」를 읽은 나는 이제 이 시에 보론(補論)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곰과 사람이 산뽕나무 앞에서 서로에게 해를 입히지 않기로 약속했다는 아름다운 신화는, 지금처럼 타는 여름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그건 이 시가 곰을 자연으로, 마을 사람들과 그들이 쓰는 도구를 인간 문명으로 각각 바꾸어 읽을 여지를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일대일 계약의 형식으로 파악하는 관점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인간은 일방적으로 자연을 무너뜨리고 있다.

물론 시 안에도 비슷한 문제의식이 투영되어 있다. 산뽕나무 앞에서 약속이 있기 전, 곰은 기껏해야 사람들의 꿀이나 훔쳐 먹었던 데에 비해 사람들은 곰이 다니는 길목에 덫을 놓았고, 실은 그것이 시의 핵심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시는 애초에 비대칭관계에 있는 두 주체 간 호혜적 공존의 가능성을 형식적으로나마 균형 있게 구현한 시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3연이 확정적인 해피 엔딩으로 기술되지 않고 화자의 희망을 드러낸 말로 매듭지어진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산뽕나무는 자연과 인간 사이 경계를 상징적으로 표시한다. 이것은 두 주체가 반드시 지켜야 할 책임의 한계선이다. 그리고 우리는 누가 그 선을 끊임없이 넘나들며 약속을 어기는지 익히 알고 있다. 곰은 인간의 꿀을 훔칠 수 없다. 오로지 인간만이 끊임없이 곰을 위협한다. 그러니까 지금의 산뽕나무는 둘 사이의 합리적 경계선이 아니라 곰을 가두는 창살이고 감옥이다. 앞으로 이것을 말하지 않고 에둘러 형식적 균형을 맞추어내는 일은 명백히 진실을 가리는 행위, 즉 기만이다.

정도는 다르지만 「빠삐용 고양이」에서도 비슷한 논의를 이어가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우리 집 고양이 빠삐용이 수상하다
금붕어한테 어항을 탈출하여
자유를 찾아 함께 떠나자고 꼬시는 것 같다

틈을 엿보다가, 앞발로 어항을 탁 쳐
놀란 금붕어가 물 밖으로 튀어 오르면
잽싸게 낚아채려는 계획인 것 같다

삐용아, 꿈 깨
이번에 새로 사 온 금붕어
금붕어학교 1등 하던 꾀 많은 녀석이야

―「빠삐용 고양이」 전문


프랭클린 샤프너의 영화 <빠삐용>(1973)에서, ‘빠삐용’은 감옥에서 만난 동료와 함께 탈옥을 시도하다가 붙잡힌다. 이를 염두에 두고 시를 읽으면 “고양이 빠삐용”이 “우리 집”을 감옥으로 여기고 있다는 표면적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시인은 옛 영화를 동시 속에 그대로 옮겨놓기보다 적극적으로 변형하고 패러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2연을 통해 잘 드러난 바, 화자의 시선에서 빠삐용은 금붕어를 함께 탈출할 동료로 보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이 시에서 진짜 감옥은 “우리 집”이 아니라 “어항”이고, “빠삐용”은 그저 “금붕어”를 꼬셔 낚아채려는 것뿐이다. 하지만 빠삐용의 시도는 실패로 끝날 것이다. “이번에 새로 사 온 금붕어”가 “금붕어학교 1등 하던 꾀 많은 녀석”이기 때문이다.

시에 담긴 익살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아쉽다. 일차적으로는 발상의 평이함 때문이고, 더 나아가면 화자가 고양이의 행위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어항 속 금붕어의 감정과 주체성이 당연하다는 듯 소거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에 새로 사 온 금붕어”의 역할은 그저 화자와 고양이의 유희에 보다 많은 재미를 불어넣는 것이라는 말인데, 그것이 이 시에서 반드시 필요한 장치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고양이가 “앞발로 어항을 탁” 쳐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금붕어를 놀라게 해도, “금붕어학교에서 1등 하던 꾀 많은 녀석”이라는 단서를 달아 죽지 않게 해 두었으니 괜찮은 걸까. 기술되지 않은 금붕어의 관점에서 진실은 세련되게 가려져 있고, 상황은 익살스럽게 포장되어 있다. 그래서 이 시가 건네는 농담은 나에게 그리 유쾌하거나 기발하게 들리지 않는다. 이럴 거면 사 오지 말지, 하는 푸념을 넘어 차라리 이 시에 금붕어를 들이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런가 하면 쓸 수 있는 기교와 기술을 모두 걷어내고 그저 담담한 문장으로 힘 있게 진실을 드러내는 시도 이 시집에는 들어 있다.


진달래가 피어 있는 연분홍 봄 산에
산불이 났다
소방대원들과
군인 아저씨들과
마을 사람들이
모두 달려가 산불을 껐다

산불은 다 껐지만
산은 새카맣게 다 탔다
마음이 아프다
진달래꽃만 끄고 내려온 것 같다

―「산불이 났다」 전문


이 시는 단 한 줄도 현실 논리에 어긋나지 않게 쓰였지만, 그를 통해 모습을 드러내는 진실은 여느 시 못지않게 강렬하다. 마지막 행의 “진달래꽃만 끄고 내려온 것 같다”에서 ‘꽃’과 ‘끄다’의 결합이 비교적 일상 언어와 거리가 있는 표현이라 할 수 있을 텐데, 그나마도 그리 멀지는 않다. 시에서 직관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진술은 없다.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것은 언뜻 운문의 미덕에 부합하지 않는 일로 느껴지기도 한다. 시라면, 보다 함축적이면서도 은근한 방식으로 진실에 다가서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런 아쉬움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산불이 났다」가 시에 대한 이러저러한 생각들에 매이지 않고 그저 현상을 가만히 응시하는 방식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시를 통해 독자는 알아야 하는 진실의 목격자가 된다. 이는 시가 시로써 작동할 때에만 가능해지는 일이다.

주로 미디어를 통해 산불 소식을 접하는 많은 이들에게, 주목할 만한 사건은 “산불이 났다”로 시작하여 “산불을 껐다”로 끝난다. 잘 짜인 연극 무대의 막이 올랐다 내렸다 하듯, 그렇게 산불도 났다 꺼졌다 한다. 그것이 값을 치르고 보아야 하는 무대의 전부인 줄 아는 이들에게, 이 시는 2연을 통해 막후의 진실을 드러내어 보여준다. “산불은 다 껐지만/ 산은 새카맣게 다 탔다/ 마음이 아프다/ 진달래꽃만 끄고 내려온 것 같다”에서 알 수 있듯 정말로 꺼진 것은 산불이 아니라 진달래꽃이고, 거기서 정말로 일어났던 일 또한 산불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죽음과 상실이다. 무겁고 힘겹지만, 그래서 더욱 똑바로 직면해야만 하는 진실이 시 안에 담겨 있다.


끝으로, 우리가 느끼는 주관적 세계의 진실을 압축적이면서도 환상적으로 그려낸 시를 옮겨 적는 것으로 글을 맺는다. 시의 옷을 입고 찾아오는 진실은 때로 이렇게나 간결하고, 그만큼 아름답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이
얼마나 빠른지 아니?

글쎄, 여름날 초록 기차가 터널로 쑥 들어가더니
어느새 가을날 울긋불긋 단풍나무 기차로 빠져나오
더라니깐

―「기차 터널」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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