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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Nov 15. 2023

기이한 상상의 막이 오르면

송현섭 동시론

『착한 마녀의 일기』, 문학동네, 2018

『내 심장은 작은 북』, 창비, 2019


송현섭의 동시집 두 권에 실린 작품들을 읽고 쓴 평론을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 공모전에 냈다가 떨어졌습니다. 『착한 마녀의 일기』는 제6회 문학동네동시문학상 대상 수상작이고, 『내 심장은 작은 북』은 제23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동시부문 대상 수상작이에요. 알려진 작품에 대해 쓰면서 너무 나이브하게 접근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쓰면서 재미있었던 글이라 올려 봅니다.



1. 들어가며


글을 읽고 해설을 붙일 때 나를 자주 망설이게 하는 것은 오독에 대한 두려움이다. 행간에 심긴 의미를 기민하고 섬세하게 포착하지 못하는 독자가 과연 타인의 글에 관해 쓰거나 말할 자격이 있을까. 나는 일면 실없어 보이는 이 질문에 나름의 답을 가지고 있다. 물론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텍스트에 관해서라면 누구든 오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밝힐 수 있어야 한다. 단 오독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는 전제 하에 그렇다.

그러니까 결정적인 두려움은 이것이다. 내가 틀렸으면 어쩌지. 오독에 대한 자각도 없이, 쓰지 않으니만 못한 글을 쓰고 하지 않으니만 못한 말을 하게 되면 어쩌지.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나는 분명히 ‘오독은 악한 것’이라는 명제를 옥조처럼 떠받들고 있다. 그런데 오독은 정말로 악한가.

이에 대해 사람들은 대체로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나, 나는 조금은 별난 투로 고개를 갸웃거려 본다. 누구든 틀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당신의 틀림을 지적받는 것도 그만큼 쉬운 일일까. 어떤 글에 대한 당신의 이해가 실은 매우 앙상하고 조악한 오독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을 때, 당신은 쉬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수 있는 일이라 말할 수 있는가.

오독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단위 텍스트에 허용되는 이해의 범위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는 뜻일 텐데, 나는 그것이 물리적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것은 보통 수많은 독자의 이해를 느슨하게 가로지르는 관념의 영역에 있다고 간주되며, 기실 그것만으로 상당히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평론이라는 것의 쓸모 역시 그러한 영향력 안에서만 작동하는 실체 없는 믿음이 아니던가. 어떤 텍스트에 대한 한 사람의 이해가 다른 사람의 이해보다 더 본질에 가까울 수 있다는 임의적 합의가 선행하지 않는다면 평론가의 언어란 곧 무색해지고 말 테니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문학 작품의 독자란 제가 읽는 텍스트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고, 실제로 다가가려 하는 부단한 노력들의 집체로 환원될 수 있다. 그리고 오독은 종종 그러한 노력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사후적 진단으로서 기능한다. 독자가 그토록 오독을 경계하는 배경에는 이렇듯 암묵적이고 관습적인 규범이 짙게 깔려 있다.

그런데 이러한 규범을 뿌리부터 전복시키려 하는 발칙한 세계가 있다. 이 세계에 발을 들이는 순간 익숙한 믿음은 그대로 뒤집혀 낯선 감각의 재료가 되고, 독자는 그 안에서 갖은 굴레를 벗어던진 채 화자와 자신의 욕망을 자유롭게 오가며 탐색한다. 그 과정에서 낯선 불쾌감이 불쑥 고개를 내밀 때도 있으나, 신기하게도 시가 어렵다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는다. 기존의 프레임을 기준으로 삼는 오독의 개념이 더는 유효하지 않으므로 송현섭의 동시 세계에서는 오독마저도 오락이 된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지금부터 그의 작품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오독에서 오락이 피어나는 세계


먼저 『내 심장은 작은 북』의 차례를 열어보자. 책은 총 4부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는데, 각 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시의 제목은 네 계절의 이름을 따라 지어졌다. 4부 구성에 네 계절을 각각 대응시킨다고 하면 1부 봄부터 4부 겨울까지 순서대로 흘러가리라 짐작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시인의 세계에서 제일 먼저 펼쳐지는 계절은 겨울이다. 이후 가을과 여름을 차례로 거친 뒤 봄에 대한 물음을 끝으로 동시집은 막을 내린다. 그러니까 이곳에서는 계절의 흐름마저도 자연의 시간을 거스르는 것이다. 계절만이 아니다. 그간 별 뜻 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던 온갖 사물들이 시인의 특별한 상상력에 힘입어 비로소 각자의 지향점으로 산개한다. ‘자연스러움’이라는 개념을 기존 관습과 규칙에 부합하는 현상으로 이해한다면, 이곳은 근본적으로 자연스러움에 길들여진 독자가 오독을 범할 수밖에 없는 세계이고 기실 그 지점에서 가장 흥미로운 오락이 피어나는 공간이다. 다음의 시를 보자.


사자는 톰슨가젤을 토하고     

톰슨가젤은 풀을 토하고     

풀은 바람을 토하고     

바람은 풍선을 토했어요.

―「평화를 위해」 전문(『착한 마녀의 일기』 72쪽)


이 작품은 아무리 봐도 말이 되지 않는다. 백번 양보해서 사자가 톰슨가젤을 토할 수는 있고, 톰슨가젤이 풀을 토할 수도 있다고 하자. 그런데 풀이 바람을 토한다는 것은 대체 무슨 말이고, 바람이 풍선을 토한다는 것은 또 무슨 억지란 말인가. ‘평화를 위해’라는 제목과 사자가 톰슨가젤을 토하는 첫 장면에서 독자는 역방향 먹이사슬을 어렴풋이 추론해 보지만, 마지막 연에 이르면 금세 어안이 벙벙해지고 만다. 어떻게 하면 이 시를 바르게 읽을 수 있을까.

한 가지 제안이 있다. 말이 안 되는 것에 애써 작위적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그냥 쓰인 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사자가 톰슨가젤을 토하고 톰슨가젤이 풀을 토하는 세계인데, 풀이라고 해서 ‘웩’ 소리와 함께 바람을 뱉어내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이런 세계에서는 바람이 풍선을 토하는 일도 가능하고, 물론 그보다 더한 일도 가능하다. 자, 당신은 무엇을 토하겠는가. 이 세계의 평화를 위해, 당신은 어디까지 토해낼 수 있는가.

평화라는 고결한 목적과 무언가를 토하는 격한 행위는 일반적으로 썩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고 볼 수 없지만, 익숙한 현실과 결을 달리하는 이런 발상은 송현섭의 작품 세계에서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나아가 이런 생경한 시도들에서 우리는 실체를 알 수 없는 해방감을 느끼기도 한다. 다시 한번 바람이 풍선을 토하는 기이한 장면을 떠올려보라. 그간 폭력적으로 구축된 모든 힘의 질서가 한순간에 설 자리를 잃고 날아가 버리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나는 이 찰나의 해방감이 작품에 대한 논리정연한 이해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느낀다.

이와 유사한 느낌을 주는 작품을 한 편 더 읽어보자.


내가 마법사가 되어
코스모스의 이름을 토끼로 바꿔 버리면
코스모스는 빨갛고 노란 얼굴을 흔들며
풀숲을 달려 굴속에 숨어 버릴 테고
놀라서 콩콩 뛰쳐나온 토끼들에게
“넌 코스모스야.”라고 부르면
토끼들은 길가에 앉아 큰 귀를 흔들 테고
깜박 실수로 가시덤불을 늑대라고 부르면
신이 난 늑대는 길가의 토끼들을
차례차례 꿀꺽 삼켜 버릴 테고
그래서 너무 뚱뚱해진 늑대 한 마리가
외갓집으로 가는 길가에서
누런 이를 씩 드러내고 나를 기다릴 테지만
나야말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호랑이로 이름을 바꾼 터라
늑대는 캐스터네츠처럼 이빨을 딱딱거리며

―「내가 마법사가 되어」 부분(『내 심장은 작은 북』 56쪽)


「내가 마법사가 되어」에 쓰인 낱낱의 시어들은 분명 우리에게 익숙한데 그것들로 쌓아 올린 일상의 풍경은 놀랍도록 생경하다. 따라서 이 시는 익숙한 대상을 새롭게 명명함으로써 발생하는 개념의 충돌을 재치 있게 다룬 작품으로 보이지만, 나는 여기에서 보다 중요한 초점은 ‘무언가가 뒤죽박죽으로 얽히고설키는 감각’그 자체에 있다고 느낀다. 시인의 마법이 작동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개념들이 멋대로 뒤섞이는 감각을 체험하게 될 텐데, 굳이 그 안에서 토끼와 코스모스와 가시덤불과 늑대 사이 임의적으로 설정된 규칙을 찾아 헤멜 필요가 있을까. 애초에 길을 잃으라고 설계된 난장판이라면 차라리 완벽하게 길을 잃어보는 것이 더 멋진 경험이 되지 않을까.

유려하게 설계된 미로에서 독자는 필연적으로 내면의 갈림길에 놓인다. 그것은 본능과 이성의 줄다리기에 빗대어 표현될 수 있다. 본능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미로 속 갈림길에서 더 깊이 들어가려 하지만, 이성은 어느덧 사방을 둘러싼 벽 앞에서 출구를 찾아 헤맨다. 머리로 시를 이해하려 한다. 이해되지 않는 것들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끝까지 완결성을 갖춘 설명을 추구한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그랬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 그러나 시는 끝내 하나의 정답을 내어놓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조금 더 마음 놓고 길을 잃어도 된다는 신호로 읽고, 미로 속으로 다시 한 걸음을 성큼 내딛는다.


멀리서 보면
소시지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보면
푸른 나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봇대야.

―「푸른 전봇대」 부분(『착한 마녀의 일기』 10쪽)


「푸른 전봇대」의 1연 역시 직관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살면서 전봇대를 소시지로 착각해 본 일이 있는가. 푸른 나무로 오해한 적은? 하물며 멀리서는 소시지로 보였다가 가까이에서는 푸른 나무처럼 보이는 전봇대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참신한 비유라 하기에는 소시지와 푸른 나무와 전봇대는 색감이며 질감이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말이다. 얼핏 당혹스럽기까지 한 이 비유에 대한 의문은 시의 마지막 연까지 읽어도 말끔히 해소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우리 마을에, 나 말고
새로운 괴물이
하나 더 추가된 거지.

―「푸른 전봇대」 부분(『착한 마녀의 일기』 11쪽)


그러니까 나도 괴물이고 전봇대도 괴물이라는 말인데, 그것이 앞선 소시지와 푸른 나무의 난데없는 등장에 만족할 만큼의 개연성을 부여해주지는 않는다. 어쩌면 이 시는 시인의 극히 개인적인 체험의 산물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이에 대한 해석을 놓고 적부를 가리는 일은 불필요하다. 독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저 자신과 세계 사이 어딘가에 똬리를 틀고 앉았을 고유한 괴물들의 존재를 둘러 살피는 행위이며, 당연하게도 여기에는 정답이 없다. 그냥 내가 거기 있다고 하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의 화자가 그리했듯 말이다.

이처럼 독자와 세계를 향해 거침없이 열려있는 태도는 송현섭의 동시가 지닌 가장 특징적인 매력이다. 그간 뚜렷한 실체 없이 마냥 존재한다고 간주되어 온 수많은 암묵적 규칙과 규격들은 이곳에서 알맞게 해체된다. 이는 물론 파격이라는 말로 수식될 수 있겠지만, 나는 왠지 그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 여분의 영역이 이 안에 있는 것만 같다. 송현섭의 동시 세계에는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장르적 정체성이 배어 있다. 파격이라고만 하기엔 너무도 일관된 욕망으로 설계된 이 기이하고 어두운 세계를 나는 동시의 장르적 변이, 또는 장르적 혼종이라 부르고 싶다.


3. 마녀와 덩굴, 그리고 어두움의 미학


아니야, 원숭이 털이 들어가면 안 돼.
수프를 먹다가 기침을 하게 되거든.
그러니까, 가죽을 이렇게…… 아니지.
너무 잔인한 표현은 쓰면 안 되는데
어떻게 설명하지……. 그러니까 그게
말하자면…… 그래, 바나나를 생각해.
원숭이는 그냥 바나나구나, 하고 생각해.
바나나처럼 껍질을 벗기는 거야.
이렇게, 너무 쉽지. 눈 감지 말라니까.
그래 가지고 어떻게 비법을 배울 수 있겠니.

―「마녀의 수프 끓이기」 부분(『내 심장은 작은 북』 46-48쪽)


하느님, 나의 하느님은
나를 조용히 나무 아래로 불러
검은 넝쿨처럼 자라난 손가락
하나씩 하나씩
예쁘게 잘라 주며 말씀하셨네.

아이고, 나쁜 생각이 많이 자랐구나.
손가락은 내가 가져갈게.

(중략)

나는 시옷 자의 풀밭에 누워
기름처럼 둥둥 뜬 흰 구름을 보며
생각하고, 고민하고, 의심하고, 추리했네.

젠장, 나는 분명 삥 뜯기고 있는 거야.

―「착한 마녀의 일기」 부분(『착한 마녀의 일기』 16-17쪽)


「마녀의 수프 끓이기」의 화자는 미덥지 못한 제자 앞에서 원숭이 가죽을 바나나 껍질처럼 벗기는 시범을 보이고 있다. 곱씹을수록 끔찍한 장면인데, 그럼에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마녀는 그간 여러 매체를 통해 숱하게 보아온 ‘사악한 여성 은둔자’의 전형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있는 듯하다. “너무 잔인한 표현은 쓰면 안 되는데/ 어떻게 설명하지……. 그러니까 그게/ 말하자면……”에서 느껴지는 긴 망설임은 그가 지금껏 본 적 없는 생계형 마녀에 해당하는 인물이 아닐까 짐작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원숭이 가죽을 벗겨 수프를 끓이는 일이 덜 끔찍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만으로 야유를 보내기엔 왠지 석연찮다. 삶에는 얼마간 비정한 구석이 있고, 우리는 주변의 크고 작은 끔찍함에 조금씩 무뎌지는 방식으로 각자의 생계를 이어왔으니 말이다. 이처럼 시는 적절히 변주된 마녀 이야기를 경유하여 우리 곁의 음지에 도달한다.

「착한 마녀의 일기」에서도 독자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다. 어린 마녀는 하느님께 속절없이 불려 가 손가락을 잘리고는 혼자서 툴툴댄다. “젠장, 나는 분명 삥 뜯기고 있는 거야.” 하느님이 무슨 생각으로 마녀의 손가락을 잘라갔는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잘린 것이 손톱이 아니라 손가락이라는 것이고, 마녀가 그것을 단지 삥 뜯기는 정도로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짐짓 어린이를 위하는 척하면서 실상은 그저 자기네 통제 아래 두기에만 여념이 없는 평범한 어른들의 위선을 비판하기 위해 이 시가 쓰였다면, 마녀가 예쁘게 기른 손톱을 잘라가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는 이 가학적인 이미지가 독자의 예상보다 더 어두운 지점을 향하고 있다고 느낀다. 사람들의 일상적 시선이 닿지 않아 더욱 비상식적인 폭력이 자행되는 곳, 그럼에도 그 안에 갇힌 누군가는 그것을 고작 삥 뜯기는 정도로밖에 인지할 수 없는 곳. 바로 아동학대의 현장이다.

동시가 이런 이야기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필요를 넘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런 메시지를 담아내는 데 있어 송현섭이 지닌 장르적 역량과 어두움의 색채가 얼마나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지 말하고 싶다.


다섯 개의 창문을 싹싹 핥아 먹고요.

열 개의 둥근 문고리를 오도독 씹어 먹고요.

나무에 올라 나무를 통째로 말아 먹고요.

아, 갈증 나! 마당의 우물을 돌돌 감고요.

바퀴 없는 자전거를 꿀꺽 삼켜요.

―「담쟁이덩굴의 식사량」 전문(『내 심장은 작은 북』 74쪽)


송현섭은 그의 작품에서 덩굴의 모티프를 매우 능숙하게 활용한다. 혼자 설 수 없어 주변 대상의 몸을 감거나 타고 오르는 덩굴은 기실 호러 장르에서 죽음과 어두움의 뉘앙스를 강조하고자 할 때 단골로 활용하는 소재 중 하나이다. 「담쟁이덩굴의 식사량」 역시 덩굴이 줄기를 뻗으며 제 영역을 확장하는 모습을 짐승의 먹는 행위에 빗대어 묘사함으로써 으스스한 감각을 극대화하고 있다. 먹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담쟁이덩굴은 보이는 대상을 닥치는 대로 핥아 먹고, 씹어 먹고, 말아 먹고, 돌돌 감고, 꿀꺽 삼킨다. 덩굴이 자라는 동안 그것에 잡아먹힌 대상은 점점 움츠러들다 끝내 자취를 감출 것이다. 그렇게 세계는 순식간에 검은 덩굴로 뒤덮인다.

비슷한 모티프는 다른 작품에서도 종종 드러난다. “넝쿨 잎들이/ 오물오물 삼켜 버렸지.”(「푸른 전봇대」), “검은 넝쿨처럼 자라난 손가락”(「착한 마녀의 일기」)에서 보듯 시인은 덩굴 모티프를 호러 장르의 클리셰에 맞추어 감각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에 활용하고 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장르적 요소들이 알맞게 모였을 때 시집의 전체적인 톤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마녀와 덩굴, 그밖에 다른 소재를 활용하는 송현섭의 방식에서 독자는 어두움과 죽음을 회피하지 않는 어떤 결연한 태도를 감지하게 된다. 나는 이것이 송현섭의 작품 세계가 갖는 가장 확고하고도 특징적인 톤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개별 작품들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가 그토록 강렬하게 독자의 마음을 두드릴 수 있는 것은, 이렇듯 치밀하게 설정된 세계관의 톤이 알게 모르게 독자의 뇌리에 스며 각인되기 때문일 것이다.

성공적으로 구축된 세계관에 힘입어, 독자는 이런 동시도 만나볼 수 있게 된다.


한여름 밤
외갓집 뒷마당

하얀 달빛 아래
검댕이 굴뚝 아래
축축한 담벼락 아래
오돌오돌 장독대 아래
날벌레로 무거워진 거미줄 아래

녹슬고
험상궂은
외다리 수도꼭지가
물방울의 목을
조르고 있었어요.









―「목격자」 전문(『착한 마녀의 일기』 44-45쪽)


동시집 『착한 마녀의 일기』의 인상은 내게 「목격자」로 깊이 각인되어 있다. 이 시가 다른 동시집에 실려 있었어도 같은 인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으리라 확신한다. 「목격자」는 『착한 마녀의 일기』에 실려 있을 때 진가를 발휘하는 작품이며, 나아가 송현섭의 작품 세계에 중첩되어 있는 다채로운 어두움, 죽음의 이미지와 풍요롭게 관계 맺을 때에만 비로소 고유의 빛을 발하는 수작이다.

간결하고 몰입도 높은 도입부, 점증적 호흡에서 비롯되는 긴장감, 수도꼭지가 물방울의 목을 조른다는 전위적 발상과 같은 요소들은 물론 모두 훌륭하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런 세세한 분석 대신 한 가지 감각에 집중하고자 한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며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호러 영화에서 관객의 공포심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가 폭발시키기 직전에 곧잘 떨어뜨리곤 하는 물방울의 효과음을 나는 이 시에서 실제로 들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일단 청각 신호의 인지가 귀가 아닌 뇌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납득할 만한 배경지식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나, 그것만으로는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 진짜 답은 송현섭의 동시집 안에 들어 있다. 「목격자」의 물방울 소리는, 하느님이 마녀의 손가락을 자르고(「착한 마녀의 일기」), 주무시는 할머니의 귀에 정성껏 손질한 참매미 시체를 집어넣고(「참매미 보청기」), 개미 떼를 따라가서 죽어 가는 것들의 세상을 만나고(「개미 떼를 따라가면」), 죽음을 앞둔 암탉의 유언을 듣고(「암탉의 유언」), 토끼가 풀을 지우듯 외할아버지가 토끼를 지우는(「토끼는 풀을 지우고, 외할아버지는 토끼를 지우고」) 세계의 독자에게만 제 존재감을 드러낼 것이다. 동시가 이토록 음습한 소리를 이만큼 또렷하게 들려줄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고, 그만큼 고무적이다.

이와 유사한 결의 장르적 쾌감을 안겨주는 작품은 『내 심장은 작은 북』에도 실려 있다. 아래 「뱀 쇼」의 전문을 보자.


엄청, 정말 엄청
겁 없는 개구리들이
뱀 쇼를 보러 가기로 했어.

“한번 가 보는 거지 뭐.”
“관객인데, 우릴 어쩌겠어?”

미끈거리는 다리를 꼬고
개골개골 앉아 있는
개구리들을 보자
뱀은 자존심이 꼬일 대로 꼬였어.

‘세상에, 개구리들을 위해 쇼를 하다니.
다른 뱀들이 알면 나를 뭐로 보겠어.’

쇼에 집중할 수가 없었던, 뱀은
꼬리 끝에서 머리끝까지 꼬불꼬불 화가 난, 뱀은

조련사가 활짝 웃으며
아가리에 손을 넣었을 때
꽉 물고 말았지 뭐야.

조련사의 빨간 비명 소리가
개골개골 개골개골
사방으로 튀었지 뭐야.

―「뱀 쇼」 전문(『내 심장은 작은 북』 14-15쪽)


일차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개구리들이 감히 「뱀 쇼」를 보러 가기로 작당을 했다는 사실이다. 익숙한 힘의 논리와 위계는 시작부터 어그러지고, 쇼를 선보여야 하는 뱀은 이미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해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개구리들은 태연히 앉아 뱀 쇼를 관람하고, 뱀은 애꿎은 조련사를 물고, 조련사는 이내 빨간 비명을 토한다. 시인은 사냥꾼과 사냥감, 또는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 도식을 의도적으로 뒤집어 제시한 뒤 응축된 긴장감을 일거에 해소하는 방식으로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가 기존의 낡은 규범에 대한 대안으로서 장르 관습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조련사의 빨간 비명 소리가/ 개골개골 개골개골/ 사방으로 튀었”던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어린이 독자가 뱀에 물린 조련사의 비명을 직접적으로 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작 뱀을 화나게 한 것은 개구리 쪽일 텐데, 이 뱀은 개구리를 향해서는 어떤 위협도 가하지 못한다. 그러니 개구리 입장에서는 뱀이 조련사를 문 것까지가 ‘뱀 쇼’의 완성인 것이다. 다시 말해 조련사의 비명은 놓칠 수 없는 공연의 피날레다. 그것을 감안하고 마지막 연의 개골개골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들이 느끼는 짜릿한 쾌감이 고스란히 전해져 올 것이다. 이제 당신의 귀에도 개구리들의 해방감이 들리는가.

이에 더하여 시인은 어린이가 직접 경험해야 할 감각들을 섣불리 해로운 것으로 간주하고 미리 차단하는 기성의 관점을 경계하고 있다. 시인이 독자를 「뱀 쇼」로 안내하고, 그 안에서 화난 뱀이 조련사를 무는 장면을 공들여 보여주는 까닭이 다 여기에 있다. 어린이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바탕으로, 어둡고 기이한 상상의 막을 활짝 열어 그들이 정말로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여주라는 뜻이다. 그야말로 어두움의 미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4. 다시 한번, 기이한 상상의 막이 오르길


송현섭의 동시는 시종 현실과 결을 달리하면서 그로부터 낯설고 역설적인 의미를 획득해 낸다. 물론 그 모든 의미가 처음부터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통상 익숙하지 않은 것을 마주할 때 반감이나 두려움은 증폭되기 마련이므로, 그의 작품을 처음 읽은 독자가 ‘무슨 동시가 이래’라며 부루퉁해진다 해도 그리 납득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불쾌함의 골짜기를 지나 조금만 더 가면 놀랍도록 감각적인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자연스러움’ 또는 ‘익숙함’의 관점에 길들여져 있을 때에 미처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감각들이 시집 안에는 절묘하게 묘사되어 있다. 시인은 때로 ‘자연스러움’이란 발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넘어 자연과 부자연의 관계를 거꾸로 뒤집어 제시하는 작품을 선보이곤 하는데, 이는 동시집이 출간된 해로부터 수년이 흘러간 지금 보아도 매우 참신하게 느껴진다.

나는 이 글 처음에 오독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망설임에 대해 썼다. 고백하자면 송현섭의 작품 세계에 대한 글을 쓰기로 처음 마음먹은 시점에도 나는 그런 두려움을 느꼈다. 다행히 동시집을 몇 차례 읽는 동안 두려움은 차츰 옅어져 갔다. 그새 익숙해져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변화였을 것이다. 읽을수록 어떤 확신이 찾아왔다. 그건 내가 결국 이 안개 덮인 음산한 세계에서 정답을 얻지 못하리라는 확신이었다. 그렇다면 존재하지 않는 출구를 찾아다니기보다 그때그때 내게 찾아오는 감각에 초점을 맞추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부담이 한결 줄었고, 동시를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졌으며,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재미란 말에는 묘한 구석이 있다. 많은 작가와 독자가 문학 작품은 우선 재미있어야 한다고 말하길 좋아하지만, 재미가 무엇이며 어떤 작품이 재미있는 작품인지 명백히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주관적 영역에 속하는 느낌이며, 그렇기에 모든 독자에게 똑같이 재미있는 작품은 존재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각자가 느낀 재미를 가장 정교한 언어로 옮겨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들이 재미있는 책이라고 말하는 대신, 송현섭의 작품을 시간 들여 읽은 한 사람의 독자로서 느낀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을 다음과 같은 말로 정리하고자 한다.

그가 보여준 동시와 장르 세계의 결합에서 나는 앞으로 이것이 한국 아동문학의 흐름에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품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기이한 상상의 막이 오르기를 기다린다. 마지막으로 고백하건대, 송현섭의 동시를 읽고 그에 관한 글을 쓰는 일은 나에게 무척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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