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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Jan 17. 2024

마침내, 우주를 품은 동화

하신하, 『우주의 속삭임』, 문학동네, 2024

* 쪽수: 160쪽



제24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우주의 속삭임』에는 총 다섯 편의 단편 SF 동화가 실려 있습니다. 각 작품의 제목은 「반짝이는 별먼지」, 「타보타의 아이들」, 「달로 가는 길」, 「들어오지 마시오」, 「지나3.0」이고요. 모든 이야기가 누군가의 1인칭 시점에서 서술되어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따뜻하면서도 쓸쓸한 정서를 다정하게, 또 아득하게 그려내고 있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독자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물론 훌륭한 동화가 자주 그렇기는 합니다만 이 책에서 좀 더 특별히 짚고 싶은 건 '시점'이에요. 개별 등장인물의 시점을 말하는 건 아니고, 그걸 넘어서 작품 전체가 추구하는 시점이 이 책에는 일관되게 담겨 있습니다. 이야기들은 저마다 우주를 향한 동경을 품고 있고, 지구인의 눈높이에서 우주를 내다볼 때의 경이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연히 시선의 방향은 위를 향하게 되지요. 우주를 올려다보는 지구인의 관점에서 어린이와 어른의 차이는 그야말로 미미하기 때문에 저는 이 작품들이 동화라는 걸 거의 잊은 채로 읽었고, 그건 또 다른 차원의 경이감이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인 감상을 좀 투박하게 표현하자면, 전 한국 어린이문학에 또 하나의 획을 긋는 책이 나왔다고 생각해요. 그럼 한 작품씩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반짝이는 별먼지」의 '나'는 고루한 할머니와 둘이 살고 있습니다. '별먼지'라는 간판을 내건 여행자의 집을 운영하면서요. 어느 날 오래된 라디오에서 잡음이 흘러나오더니 곧 여행자가 찾아옵니다. 여행자는 오랫동안 외계인을 찾아다녔다고 말하고는 2층 방에 묵습니다. 며칠 후 별먼지에 정장 차림의 두 사람이 찾아와 할머니에게 무려 50년 전 복권의 당첨 소식을 알립니다. 당시 할머니는 '50년 뒤의 미래를 예견한 사람에게 선물을 주겠다'라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는 '지구에 우주선이 오고 우주호텔이 생긴다'라는 내용을 엽서에 적었었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 할머니의 저 엽서는 어디에도 부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냥 할머니가 혼자서 간직하고 있었지요. 그러니까 할머니가 들은 라디오 방송은 아마도 먼 우주로부터 날아온 외계인의 메시지였을 것이고, 할머니가 엽서에 쓴 내용은 그 메시지에 대한 가장 진실한 응답이었을 겁니다. 근사하지요. 외계인과의 교신에 성공한 단 하나의 지구인이 나사의 과학자가 아니라 집에서 라디오 채널을 돌리던 할머니―당시엔 젊은 여성이었겠지요―였다는 건 정말이지 낭만적인 일입니다.


할머니는 50년 간 가슴에 우주를 품고 산 것에 대한 보상으로 '오로타 행성'에 갈 수 있는 우주 항공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별먼지는 지구 최초의 우주 호텔이 되어 '나'에게 넘겨지지요. 결말부 우주선에 오르는 할머니가 '나'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장면은 당연하게도 할머니의 죽음을 연상시키는데, 동화에서 누군가의 죽음이 이토록 아득한 경이감으로 이어진 적이 있던가요.


「타보타의 아이들」의 서술자는 인간형 로봇 'TAT-129'입니다. '티티'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로봇의 임무는 행성 '타보타'를 탐사하는 것입니다. 탐사기지에는 또 다른 로봇 'TAT-008', 'TAP-101'도 있고 드론과 로버도 있지만, 그중 의식과 지각을 바탕으로 다른 개체와 소통할 수 있는 존재는 티티뿐입니다. 이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티티의 외로운 독백으로 들리는 이유지요.


한때 이곳엔 인간 탐사대원도 있었는데, 갖은 질병에 시달리면서 모두 화성으로 떠났습니다. 타보타 행성을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탐사에서 정작 인간은 모두 떠나고 사실상 티티 혼자 남게 된 것이죠. 티티는 열악한 여건 속에서 탐사를 이어가는 한편, 자신의 애칭을 지어준 '홍 박사'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외로움을 달랩니다. 지질학자이자 식물학자인 홍 박사는 떠나기 전 주로 기지 내 온실에서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식물을 기르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겨진 기지를 돌보던 티티의 시야에 미약한 생명활동이 감지됩니다. 분석 결과 생명활동의 주인공은 이끼였고, 흥분한 티티는 이끼에게 '보보'라는 애칭을 지어주며 정성껏 돌봅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이야기의 진가가 드러나지요. 인간의 시간을 기준으로 했을 때, 이끼의 생육은 그렇게까지 고무적인 사건은 아닐 겁니다. 이끼가 자란 땅에 인간이 먹고살 수 있는 식물이 자연적으로 뿌리를 내리기까지는 우주적 규모의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요. 하지만 티티는 '충분히 오래 기다릴 수 있는 존재'입니다. 티티가 서둘지 않고 가꾼 보보는 언젠가 다른 동식물이 태어날 토양의 밑거름이 될 것이고, 이것은 어쩌면 인간들이 못 견디고 떠난 행성에 초록의 생기를 불어넣어 줄 최초의 숨결이 될지도 모르죠. 만약 그렇다면, 드넓은 우주의 관점에서 '생명'이란 정말 무엇일까요.


「달로 가는 길」의 서술자는 '진'입니다. 집안 여기저기서 부딪치고 다치는 일이 많은 진은 오늘도 로봇청소기에 발가락을 찧어 아파합니다. 진은 엄마아빠에게 낡고 걸리적거리는 로봇청소기를 버리라고 말하지만, 엄마아빠는 그 대신 최신형 휴머노이드를 구입하지요.


약간의 서술트릭이 가미된 작품이라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선 말을 좀 아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만 얘기하면, 나이 든 엄마아빠가 방금 말한 것도 깜빡깜빡 잊어버리는 걸 보면서 진이 걱정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이유를 알고 나서 이야기를 다시 읽으면 새삼 감탄을 하게 됩니다. 그 밖에도 저는 이 이야기를 낡고 버려지는 것들에 대한 만가로서도 의미 있게 읽었습니다.


「들어오지 마시오」는 학교폭력과 외계종족에 관한 발상을 매끄럽게 결합한 이야기이고, 이 책에 실린 작품 중 기존 동화의 판타지 문법에 가장 익숙하게 들어맞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인물 간 대립 구도를 설정하는 방식도 고전적이에요. 주인공 '현우'는 남몰래 길고양이 '장고'의 밥을 챙겨주는 인물이고, 악역 '지호'는 장고에게 돌을 던져 애꾸눈을 만든 인물입니다. 학교에선 전교회장을 맡을 정도의 모범생이지만 밖에선 패를 이루어 폭력을 일삼고 다니는 인물이기도 하고요.


이런 인물 구도에 외계종족이 개입한다면 큰 틀에서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대략 짐작이 가지요. 이들은 흥부전에 나오는 제비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게 되어 있고, 그건 진부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과 결말에 이르는 방식일 텐데, 그 지점에서 이 작품은 매우 탁월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작품 「지나3.0」은 제가 앞으로 여기저기 기회가 될 때마다 추천할 작품입니다. 그간 아동문학작품을 꾸준히 읽어온 경험에 비추어보았을 때, 남은 2024년에 이것보다 더 나은 무언가를 읽게 될 것 같지는 않아요.


이야기의 서술자는 '지나'입니다. 플롯의 전개 과정에 따라 지나1.0에서부터 단계적으로 버전 업이 되고요. 1.0은 자연 상태의 인간, 2.0은 사이보그, 3.0은 프로그래밍된 의식입니다. 그러니까 「지나3.0」의 주요한 발상은 인간 개량과 마인드 업로딩 사이 어디쯤에 있다고 할 수도 있겠죠.


시간이 공간을 압도하는 작품입니다. 성간비행 중인 좁은 우주선 안에서 30년에 걸쳐 일어나는 이야기이니까요. 한 인물의 일대기를 다루는 소설이야 많고 많지만 이건 동화고 게다가 단편이잖아요. 주인공이 처음에 열 살이었다가 마흔 살로 끝나는 단편동화라는 게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저는 이 작품을 읽고 알았습니다.


지나가 성간 비행을 하는 이유는 태양계가 곧 사라질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지나의 가족이 탄 우주선 '제라곤 호'는 태양계에서 4.2광년 떨어진 프록시마 켄타우리 항성계로 이동하는 중이고요. 우리가 흔히 '별'이라고 하면 태양과 같이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을 뜻하는데, 그런 별이 우리 은하에만 약 2천억 개가 있다고 하지요. 그 별들에 딸린 행성 중 지구와 같이 생명체가 살 수 있는 기본 조건을 충족하는 곳은 또 얼마나 많을까요. 이와 관련된 내용은 작중에서도 직접 언급되며 독자의 흥미를 끌어올립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비행이 길어지자 몸이 약한 엄마와 동생 '지누'는 일찌감치 동면에 들어갔습니다. 그때부터 우주선에는 아빠와 지나만 남게 되지요. 둘은 끝없는 우주를 가로질러 목적지에 닿고자 하지만 신체의 한계가 먼저 찾아옵니다. 무중력 상태의 근손실을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것이죠. 결국 지나는 신체를 개량한 사이보그가 되어 남은 비행을 이어갑니다.


이제 다가오는 결말에서 서술자가 해야 할 일은 이 우주선이 목적지에 닿았는지 닿지 못했는지를 암시하는 것이어야겠죠. 그게 익숙한 방식입니다. 저 멀리 지구를 닮은 행성을 발견하거나, 아니면 까마득한 우주의 한 점을 밝히며 묵묵히 나아가거나 하는 식으로요. 하지만 지나3.0은 동면 중인 엄마와 지누에게 지나2.0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의미심장하게 좁은 무대의 막을 내립니다. 이는 이야기의 전달, 곧 스토리텔링이라는 행위가 갖는 실존적 의미를 강조하는 결말이면서 동시에 우주를 표류할 때조차 끝까지 저버릴 수 없는 희망을 한 인간의 내면에서부터 길어 올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가늠조차 되지 않는 우주의 크기를 생각하면 인간은 실로 먼지보다 못한 존재라고 하지요. 하지만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으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이처럼 아득한 경이감으로 가득할 때, 우리는 어쩌면 우주보다 더 큰 생의 감각을 벅차게 누리고 있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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