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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Feb 14. 2024

동화가 들려주는 할머니 이야기

《아동문학평론》 2024년 봄호(통권 190호) - 이 계절의 비평

김동영, 「빗방울 저금통」

김송순, 「할머니네 돌담집」

양연주, 「생활의 달인 찾기」

윤태원, 「할머니의 시계」

이현정, 「민요소녀」


1. 들어가며


갈수록 시간이 빠르다. 경쟁하듯 역동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날마다 쏟아지는 새로운 것들에 어떻게든 적응해야만 한다. 시의를 읽는 것은 시민의 교양이자 의무이므로, 시류를 타지 못해 뒤에 남은 이들은 쉬이 비웃음 사고 잊히기 마련이다. 이런 분위기가 뿌리내린 지 이미 오래라, 이제 한 자리에 서서 정지된 사물을 응시하거나 오래된 전통을 되짚어 음미하는 사람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제자리에 머무는 것들은 이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사라진 것들은 모두 사라질 만해서 사라진 것으로 간주된다.

동화도 그렇다. 시대가 변화하면서 동화 속 풍경도 많이 변했다. 거리도, 학교도, 집도 모두 변했지만 가장 많이 변한 것은 역시 사람이다. 기실 동화 속 풍경이란 많은 경우 어린이의 눈에 비치는 세계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기 마련이므로, 독자는 결국 이 안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인물의 변화를 감지하게 된다. 이전에 바깥 세계의 부조리를 뚫고 겨우 설 자리를 마련하던 동화 속 어린 인물들은 점점 자기 내면에 자리한 복합적인 진실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비해 꽤 안락한 여건에서 살아가는 듯 보이는 인물들조차도 그들 내면의 주관적 층위에서 혼란을 경험하고 거세게 동요한다. 그리고 이 모든 혼란과 동요는 더 이상 사소한 문제로 치부되지 않는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오늘날 동화가 묘사하는 어린이의 관점에서 세계의 총합은 ‘나’라는 존재보다 한없이 작다.

최근 수년간 단행본으로 발표된 동화들의 면면을 볼 때 자주 느끼는 것은, 이렇듯 한 사람의 어린이를 세계 전체보다 우위에 놓는 관점이 오늘날 가장 세련된 사고방식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흐름은 다시 동화 속 어린이의 문제를 고도로 ‘개인화’하는 데에 알맞게 기여한다. 2020년대의 동화에 등장하는 메인 빌런은 대개 ‘개인’이라는 성역을 겁 없이 침범하는 이들이고, 자주 사람 아닌 무엇으로 묘사되며, 복잡다단해진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매우 치밀하고 세련된 형식을 취한다. 오늘날의 동화에서 치밀하고 세련되지 않은 빌런은 매력적인 빌런이 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소위 옛 동화에 익히 등장하던 평범하게 나이 든 인물들은 다분히 ‘매력적이지 않은 빌런’으로 보일 수 있다. 착하고 성실하지만 어딘가 무기력하고 삶의 중심에서 밀려난 듯한, 그래서 결과적으로 어린이에게 지속적인 걸림돌로 작용하는 어른을 끝끝내 아름답게 묘사하는 요즘 동화를 읽은 적 있는가. 이들은 어느 시점에부턴가 동화 세계에서 말끔히 소거된 것처럼 느껴지는데, 이는 결코 현실에 그런 사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진짜 원인은 그들이 그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꾸준히 주인공 개인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 빌런임에도, 동화에서 그에 걸맞은 매력을 부여받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세련된 이야기의 세계에서 매력적이지 않은 빌런은 가차 없이 탈락하고 만다.

그럼에도 나는 이 글에서 그런 매력적이지 않은 빌런의 한 축을 오랫동안 담당해 왔다고 할 수 있을 ‘할머니’ 캐릭터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런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보다 존재하는 세계가 결국 더 다양하고 풍성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내내 외면받는 동안에도 누군가 꾸준히 그들을 조명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비록 지금은 눈에 띄지 않고 어쩌면 앞으로도 긴 시간 주목받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곧 그들 존재의 무용함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므로 동화 비평에서 이를 다루는 일은 분명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제 잠시 숨을 고르며, 한 곳을 오래 응시하는 동화들을 보자.


2. 아픈 할머니에 대한 생각


윤태원의 「할머니의 시계」(≪시와 동화≫ 2023년 겨울호)와 김송순의 「할머니네 돌담집」(≪열린 아동문학≫ 2023년 겨울호)에는 공통적으로 치매 걸린 할머니가 등장한다. 가족들은 아픈 할머니를 시설로 보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고, ‘나’는 그런 가족을 보며 못마땅하게 여긴다. 할머니와 오래오래 함께 있고 싶은 손주의 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런 구도로부터 기인하는 가장 흔한 우려는 할머니란 존재가 이야기 속에서 자칫 하나의 소품처럼 도구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할머니의 시계」에서 할머니는 내내 가족들의 결정에 일방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고, 「할머니네 돌담집」 속 할머니의 동선 역시 가족이 이끄는 범위 안에서 수동적으로 결정된다. 두 할머니는 모두 서술자인 ‘나’의 시선 끝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데다가 말도 별로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들은 또렷한 언어로 자기 욕구를 드러내기보다, 동화라는 매체를 경유하여 독자에게 곧장 의미를 발신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것은 어쩌면 안녕달의 『할머니의 여름휴가』(창비, 2016), 권민조의 『할머니의 용궁 여행』(천개의바람, 2020), 구돌의 『일곱 할머니와 놀이터』(비룡소, 2022) 등 독자로부터 긍정적 반응을 이끌어낸 최근의 그림책들이 할머니 캐릭터를 세련되고 에너지 넘치는 모습으로 묘사하는 흐름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정말 동화 속 치매 걸린 할머니는 그저 작가의 필요에 의해 소환된 소품에 불과한 것일까.

「할머니의 시계」의 첫 장면을 보자.


“은수야!, 은수야!”
할머니가 부르신다. 난 인상을 찌푸리며 할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또 무슨 일일까 싶었는데, 역시나 할머니는 또 지금 몇 시냐고 물으신다. 아, 정말 오늘만 해도 벌써 몇 번째야? 도대체 할머니는 왜 그리 시간을 자꾸 물어보시는 걸까? 채워드린 손목시계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으시고, 틈만 나면 계속 시간을 물어보신다.

윤태원, 「할머니의 시계」, 《시와 동화》 2023년 겨울호, 100쪽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것은 ‘나’를 부르는 할머니의 목소리이다. 할머니의 부름에 곧바로 인상을 찌푸리는 것으로 보아 ‘나’는 이 상황을 별로 달갑지 않게 여기는 듯하다. 이어서 할머니는 ‘나’에게 시간을 묻는다. 언제부턴가 시간을 자주 물어보는 할머니에게 손목시계를 채워드렸지만 별 소용이 없다. 할머니가 시간을 물어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족 중 누구도 이 질문에 답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이야기는 바로 그 답을 향해 나아간다. 결국 이 작품은 할머니의 질문으로 시작하여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끝난다. 당연하게도 할머니는 이 이야기가 존재하는 가장 본질적인 이유가 된다.

이러한 특징은 「할머니네 돌담집」에서도 유사하게 발견된다.


“어머니, 자꾸 이러시면 시설에 입원시킬 거예요.”
할머니가 자꾸 하도리에 가겠다고 현관 밖으로 나가려 하자 엄마가 한 말이었다. 엄마가 할머니 앞에서 ‘시설’이란 말을 꺼낸 건 처음이었다.
“할머니가 왜 그런 곳에 가? 할머니는 나랑 말도 잘하는데.”     

김송순, 「할머니의 돌담집」, 《열린 아동문학》 2023년 겨울호, 68쪽


‘하도리’는 할머니의 고향이다. 고향에는 할머니의 돌담집이 있었다. 댐이 들어선 후 돌담집은 물에 잠겼지만 할머니는 그곳에 여전히 ‘우리 집’이 있다고 믿는다. 결국 가족은 3년 만에 할머니를 모시고 하도리로 향한다. 하도리 댐 근처에서 보낸 하룻밤 동안 ‘나’는 정말로 댐 속에 있는 할머니의 돌담집을 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할머니에게 말로만 듣던 ‘용굴’과, 그곳에서 용이 되지 못한 말썽쟁이 이무기가 드디어 용이 되는 광경을 본다. 꿈이었을까. 알 수 없다. 중요한 건 수십 년, 어쩌면 수백 년 동안 수많은 할머니가 제 손주에게 전해주었을 이야기가 이 작품에서 비로소 안정적인 결말을 맞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이야기는 익숙한 설화의 열린 결말을 극적으로 경유하여, 할머니와 손주가 서로를 생각하는 지극한 마음을 드러낸다. 그 과정에서 작품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인물은 물론 할머니이다.

두 작품을 통해 살펴본 바, 동화가 아픈 할머니를 자칫 도구적으로 활용할 우려가 있다는 시각은 어느 정도 재고가 필요해 보인다. 주로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삼아 서사를 전개해 나가는 동화의 특성상 아픈 할머니가 다분히 주변적으로 그려질 위험이 있다는 생각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멋지고 에너지 넘치는 할머니만큼이나 아프고 병약한 할머니를 그려내는 것도 동화가 해야 할 중요한 일 중 하나라고 믿는다. 거칠고 투박할지라도 그것이 결과적으로 이야기의 세계를 더욱 두텁게 만드는 일이며, 그럼으로써 어린이 독자의 현실을 조금 더 넓게 포용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3. 오랜 감각으로 이루는 조화


김동영의 「빗방울 저금통」(≪열린 아동문학≫ 2023년 겨울호)에는 비가 오면 들통에 빗물을 받아 쓰는 할머니가 나온다. 주인공 ‘수빈이’는 그런 할머니에게 묻는다.


“할머니는 귀찮지 않아요? 비 올 때마다 빗물 받는 거.”
“귀찮긴. 한 방울이라도 받아야지.”
“수돗물 나오잖아요.”
“예전엔 수도가 없었지. 그땐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와야 했거든.”     

김동영, 「빗방울 저금통」, 《열린 아동문학》 2023년 겨울호, 56쪽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수도가 없어서 우물에서 물을 길어와야 했던 때는 ‘예전’이다. 바꿔 말하면 ‘지금’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올 이유도, 들통에 빗물을 받아둘 이유도 없어진 세상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어떤 할머니들은 계속해서 빗물을 받는다. 마치 우물물을 길어오던 세상에서 혼자 시간을 건너오기라도 한 듯 옛 삶의 방식을 고수한다. 이들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양연주의 「생활의 달인 찾기」(≪시와 동화≫ 2023년 겨울호)에서 단서를 찾아보자.


“비도 안 오는데 부침개 했어?”
“날이 꾸물꾸물하니 곧 쏟아질 게다.”
할머니는 한손으로 프라이팬을 잡고 부침개를 훌떡 뒤집었다.
(……)
할머니는 비가 오는 날이면 김치 부침개를 잔뜩 부쳤다. 그러고는 식구들 나눠 먹고 노인정에도 갖다 줬다.
나는 노릇하게 구워진 김치전을 두 장 죽죽 찢어 먹었다. 부침개는 찢어 먹어야 제 맛이다.
그 사이 비가 후두둑 쏟아졌다. 할머니 말대로였다.     

양연주, 「생활의 달인 찾기」, 《시와 동화》 2023년 겨울호, 83쪽


할머니가 비를 예측하는 비결은 스마트폰 날씨 앱이 아니고 일기예보도 아니다. 날이 꾸물꾸물하다는 것만으로 할머니는 프라이팬을 잡고 부침개를 부친다. 보다 중요한 장면은 그다음에 이어진다. 흐린 날씨를 확인한 할머니는 손수 만든 부침개를 이웃에게 돌린다. ‘나’는 할머니 심부름으로 부침개를 가지고 노인정과 구둣방 할아버지와 파란집 할머니를 차례로 방문하는데, 모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를 맞아들여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눈다. 이렇듯 자연스러운 조화는 할머니가 오랜 경험으로 체화한 삶의 감각에 기대지 않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바쁜 현대인의 관점에서 종종 비효율적이고 부정확하다고 여겨지는 오랜 삶의 감각들은 동화 속 세계에서 다시금 빛을 발한다. 앞서 언급한 「빗방울 저금통」에서도 그렇다. 수도꼭지만 돌리면 물이 비어져 나오는 세상에서 번거로이 들통에 빗물을 받는 것은 실용적 계산에서 나오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오랫동안 세계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이들이 묵묵히 취하는 태도의 일부이고, 그렇기 때문에 가파른 시대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설득력을 갖는다.

그런 점에서 두 작품이 모두 비 오는 날을 배경으로 삼아 삶의 중요한 장면을 포착한 사실은 눈여겨볼 만하다. 여기에서 비는 옛날과 오늘날 사이의 ‘시차’를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비 오는 날 들통을 내다 놓거나 부침개를 부쳐 이웃에게 돌리는 것은 오래 살아온 이의 습관이다. 이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어진 옛 습관이 동화 속에서 재현되는 동안 희미해진 시차의 윤곽은 조금이나마 선명해진다. 그렇게 독자는 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범위 바깥의 시차를 어렴풋이 가늠해 본 다음, 오랜 삶이 지닌 또 다른 가능성에 시선을 돌리게 된다.

「빗방울 저금통」의 할머니는 집이 더워도 에어컨을 켜지 않는다. 지나치게 인색하다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 할머니는 안 쓰는 달력을 정성껏 오리고 꿰어서 만든 수첩을 선뜻 내어준다. 할머니의 정성스럽고 넉넉한 마음은 필시 긴 세월 빗방울을 모아 온 경험으로부터 우러나왔을 것이다. 「생활의 달인 찾기」에 나오는 할머니도 TV 프로그램 ‘생활의 달인’ 속 주인공은 아니지만, 자기만의 방식으로 가족과 이웃의 삶 구석구석에 따뜻하게 녹아들어 있다. 꾸물꾸물한 날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할머니의 부침개를 기다리는 이웃들의 모습은 그러한 조화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실용적이지 않게 느껴질지는 모르지만, 거꾸로 이들 삶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란 얼마나 삭막할지 떠올려보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옛 삶을 고수하는 할머니들은 맞춤한 위치에 헐겁게 끼워진 나사처럼, 오늘날 동화의 독자들에게 묵묵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4. 당신의 할머니를 생각하며     


그런가 하면 이현정의 「민요소녀」(≪시와 동화≫ 2023년 겨울호)에는 질투심 많은 할머니가 등장한다. 이 이야기는 할머니와 엄마가 며칠째 냉전 중이라는 것을 앞부분에 명시적으로 드러낸 다음 그에 얽힌 사연을 들려주고 있다. 얼마 전부터 할머니와 엄마는 문화센터에서 함께 민요를 배우기 시작했다. 첫 수업은 사이좋게 받았지만 두 번째 수업에서 문제가 생겼다. 민요 선생님이 엄마만 칭찬하자 할머니가 삐진 것이다. ‘나’는 둘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돌파구를 찾아보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다.

이 이야기가 묘사하는 고부갈등은 물론 현실의 그것에 비해 가볍고 아기자기하다. 동화가 반드시 현실의 문제를 축소하여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그렇게 함으로써 어린이 주인공의 주체성과 능동성을 한껏 강화하기도 한다. 「민요소녀」 역시 고부갈등의 부피를 일정하게 축소하는 한편, 그 안에 어린이가 나름대로 활약할 만한 공간을 적절히 마련하고 있다. 여기서 그 공간은 ‘나’의 친구 ‘다윤이’의 등장과 함께 구체화된다. 같이 숙제를 하러 ‘나’의 집에 온 다윤이는 뜻하지 않게 할머니와 엄마의 노래를 평가하는 심사위원 역할을 맡게 된다.


노래가 끝난 후 평가를 기다리며 다윤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입술을 꼭 다물고 듣고 있던 다윤이가 눈썹을 찌푸렸다. 할머니와 엄마는 그 모습에 바짝 긴장을 했다.
“발림은 안 배우셨어요? 손동작 말이에요. 노래와 발림은 같이 가야 해요.”
(……)
헉! 난 내 귀를 의심했다.
똑똑하고 예쁘다고 생각했던 다윤이가 이렇게 냉정하다니!

이현정, 「민요소녀」, 《시와 동화》 2023년 겨울호, 117-118쪽


민요소녀 다윤이의 냉정한 평가는 아이러니하게도 할머니와 엄마 사이에 흐르던 냉랭한 기류를 한층 누그러뜨리는 계기가 된다. 어느새 한 마음이 되어 다윤이의 흉을 보는 두 어른 앞에서 ‘나’는 어리둥절해진다. 제삼자에 대한 험담으로 어긋난 관계를 회복하는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어른스러운 모습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독자의 눈에 할머니와 엄마의 행동은 그리 밉게 보이지 않고, 이것은 이 작품이 할머니 캐릭터를 형상화하는 방식에 비추어 볼 때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요컨대 이 작품에서 진짜 ‘민요소녀’는 다윤이가 아니라 할머니이고, 그래서 ‘어른스러움’은 처음부터 할머니의 몫이 아니었던 것이다. 시작부터 내내 삐져있던 할머니가 괜히 투덜거리며 몇 마디를 주워섬기는 장면에서 독자는 자연히 소녀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된다. 세상에는 이런 할머니도 있는 법이니, 이런 할머니를 그리는 동화도 물론 있어야 하는 법이다.

동화 속 여러 할머니의 흔적을 이정표처럼 지나, 다시 이야기로 돌아온다. 본디 ‘이야기’란 할머니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무엇이다. 오늘날 우리가 읽는 동화를 유심히 들여다볼수록 우리는 그것이 할머니로부터 손주에게로 수없이 전해 내려오던 옛이야기들의 변형이고, 각색이고, 재해석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래선지 거꾸로 할머니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하는 동화가 요즘 들어 부쩍 반갑게 느껴진다. 대물림해 온 이야기의 빚을 갚고자 어떤 동화는 아직도 한 구석에서 옛 할머니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니 바쁜 시간에 작게나마 틈을 내어, 그 이야기들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면 어떨까. 이번에는 당신의 할머니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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