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만들어진 다음의 소통법
* 본 작품은 2021년 7월 31일 출간된 <그럼에도 불구하고, 씁니다> (포춘 쿠키)에 실린 9편의 에세이 중 "제가 어떻게 하면 뽑아주시겠어요" 부분을 출판사 허가하에 연재한 것입니다.
* 본문의 주석은 번호와 밑줄로 표기한 후, - 구분자를 이용해 출판사 버전을 간소화하여 실었습니다.
2015년 여름, 데뷔를 준비하는 웹툰 그림작가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 웹툰 글작가도 시나리오 형태로 글을 쓸까 궁금했다. 오디션 보는 기분으로 그간 써놨던 드라마 대본을 들고 그가 그림 작업하는 카페에 찾아갔다. 내가 그에게 대본을 넘기던 날의 카페 풍경이 지금도 기억난다. 카페 2층에 흩날리던 먼지들이 창으로 들어온 햇살과 카페의 조명을 더 판타지스럽게 만들어 주었던 것 같다. 날카로운 눈매로 “기획은 별론데……” 하고 웅얼거리던 그의 목소리에 긴장하던 내 손은 더 경직되었고 “대본이 상당히 재미있네? 좋은데?” 하던 소리에 오소소 팔의 잔털마저 솟아올랐다.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해 가을, 그가 웹툰 의뢰를 받았을 때 내게 연락해 왔다. 성인물이었다. 한 번도 써보지 않은 분야라 당황했지만 물러서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기획이 좋았다. 에이전시 측은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19금 웹툰을 여성의 시각에서 다룰 수 있는 작가를 찾는다’라고 했다. 마침 레진코믹스에서는 〈몸에 좋은 남자〉, 탑툰에서는 〈H-메이트〉가 히트를 쳤고 이 둘은 여성이 느끼는 성적 쾌락 면에서 큰 공감을 얻고 있었다. 2021년 현재는 유튜브에 자위 기구 리뷰를 올리는 여성들도 꽤 있고, 케이툰의 〈하지점〉 같은 여성향 19금이 좀 늘었지만 2015년에만 해도 꽤 획기적이었다.
드림팀이라 생각했던 기획이 비극으로 치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연재가 시작되고 세이브 원고를 다섯 화쯤 쌓고 시작했는데도 일주일마다 한 화씩 마감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시나리오에 점점 노란색 하이라이트가 늘어나며 PD들의 ‘이거 왜 이런 건가요?’, ‘재미없어요’ 같은 피드백이 난무했다. 가끔 대면 회의가 있는 날이면 PD들이 회사 카드로 고오급 식사를 샀다. 그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늘 “네, 알겠습니다, 노력해 볼게요”였지만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피드백에 이미 스토리는 산을 향해 가고 있었다. 자연스레 그림작가에게 감정적으로 의지하는 횟수도 늘어났고 필연적으로 작가팀과 PD들 사이에 격이 생겨버렸다. 그림작가는 그림작가대로 일은 많은데 내가 시나리오를 빨리 넘기지 못하고 삐거덕대고 있으며 콘티는 손으로 졸라맨처럼 그려 주니 어느새 둘 다 연재가 끝나기만 바라는 꼴이 되었다. 팀 담당 PD가 처음엔 셋이었다가 하나씩 줄어들었다. 소통은 잘 되지 않았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불편한 긴장감이 돌다가, 수익이 줄어드니 다른 팀 혹은 다른 회사로 가버렸다.
노랗거나 빨간 밑줄과 ‘재미없어요’라는 피드백은 글작가가 데스크를 넘기려면 뭘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알려주지 못한다. 일주일에 한 화 마감이라는 웹툰의 특성상 피드백이 이해 안 되는데 편집부에 어떻게 말할까 눈치게임 하다 보면 어느새 다음 연재일이 코앞이 된다. ‘무엇보다 기회를 주신 것만 해도 어딘가’와 ‘아니 도대체 뭐가 어떻다는 거야’라는 양극의 태도는 연재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편집부의 의견도, 독자의 의견도 중요하지만 처음에 등장인물부터 중요 사건, 세계관을 모두 구축하는 사람은 작가이며 작가여야 한다. 세상의 누군가가 재미있다, 없다 피드백을 하기 전에 작가는 이미 쓰면서 ‘이게 재미있을까?’라는 질문을 수백 번은 되뇌었을 것이다. ‘재미있을까?’를 쪼개어 구체적으로 ‘이게 논리적으로 재미있을까?’, ‘이게 공감대를 불러일으켜 재미있을까?’, ‘이게 마니아적으로 재미있을까?’ 등과 같은 질문도 수백 번은 했을 것이다. 내 경우에는 신 단위로 이 질문을 할 때도 있지만 심할 때는 대사의 라인별로도, 고작 두 글자로 되어 있는 대화에서도 이 질문을 해보았다. 그러니 내게는 ‘재미없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어떤 면에서 재미없다고 느껴지셨나요?’라고 질문할 권리가 있다.
지금 〈오늘의 남편〉을 연재한다면, 서사의 편집권은 우선적으로 작가에게 있다는 것을 먼저 밝히되 가장 현명하게 소통할 방법이 무언지 협의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은퇴한 아이돌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두고 팀 맷가마리 PD, 재담미디어 측과 대본 협의를 했을 때의 약속은 이렇다. 글자를 파란색으로 바꾸면 등장인물 대사의 길이가 길다는 뜻, 분홍색으로 바꾸면 해당 부분 내용의 이해가 어렵다는 뜻, 초록색으로 바꾸면 한 화에 플래시백이 두 번 이상 들어갔다는 뜻이다. 간결하고 명확했으며 효율이 높아졌다. 무엇보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았다.
작가는 이야기를 쓰는 것에 관한 공부뿐 아니라, 이야기를 세상에 공개하는 과정에 관여하는 모든 관계를 잘 풀어나가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지키는 공부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