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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노 Art Nomad Nov 20. 2024

#08 바할라 나 8화 _ 앙 파스코 아이 수마핏

신의 뜻대로

4.   


무더운 한 겨울. 꼬마전구가 반짝이는 성당 입구에서 한 무리의 아이들이 나왔다. 아이들의 입에서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카랑카랑하게 울려 퍼졌다.


Ang Pasko ay sumapit (앙 파스코 아이 수마핏)

크리스마스가 왔어요.

Tayo ay mangansiawit (타요 아이 마간시아윗)

우리를 찬양할 겁니다.

Ng magagandang himig (능 마가간당 히믹)

아름다운 멜로디로.

Dahil sa Diyos ay pag-ibig (다힐 사 디요사이 팍이빅)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요.


줄을 세우려고 애쓰는 수녀 선생님의 다그침에 잠깐 노랫소리가 잦아드는가 싶더니, 다시금 눈치 보는 노랫소리가 여기저기서 조심스럽게 시작되었다. 들뜬 기분의 아이들은 그렇게 잠시도 입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크리스마스라서.


그때 성당 사무장이 수녀 선생님께 다급하게 소리쳤다.


「바할라 나! 선생님! 여기 좀 와 보세요!」   


성당 앞마당에 주차된 스타렉스 타이어에 바람이 빠져 있었다.


「어쩌죠? 애들 데려다줘야 하는 데….」

「하는 수 없이 오늘은 두 번에 나눠서 갔다 오셔야죠, 뭐.」


사무장은 번쩍이는 새 스타렉스를 놔두고 자신의 낡은 혼다로 가며 아쉬워서 입맛을 다셨다. 바짝 마른 아이들을 혼다에 꽉 채우니 한 번에 여섯 명까지 태울 수 있었다. 한 아이가 다른 아이의 무릎 위에 앉고, 어떤 아이는 엉덩이를 반만 걸쳤어도 아이들은 웃었다. 좁은 차에서 내내 떠드는 아이들 때문에 머리가 지끈 거리는 사무장의 입만 댓 발 나와있었다.


차가 성당 마당을 떠나갈 때까지 차 안팎의 아이들은 하던 캐럴을 마저 불렀다.


Ang araw ay sumapit (앙 아로우 아이 수마핏)

그날이 왔다.

Sa Sanggol na dulot ng langit (사 상골 나 두롯 능 랑잇)

하늘에서 태어난 아기에게

Tayo ay magmahalan… (타요 아이 막마할란)

우리 서로 사랑하자…

 

떠나는 아이들이나, 남아 있는 아이들이나 서로의 소리에 지지 않겠다고 기를 쓰며 부르는 노랫소리가 하늘 높이 닿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한 실루엣이 있었다.


덜거덕 대며 성당 밖으로 나가는 낡은 혼다를 유심히 보던 실루엣은 차 안에 찾는 아이가 없다는 걸 확인했다.   

이윽고 실루엣은 성당을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

.

.


집에 들어선 민수는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수지가 달려 나오지 않았다. 에어컨은 계속 가동되고 있었는지 흠뻑 젖은 땀에 시원한 바람이 닿자 오히려 한기가 느껴졌다.

     

「수지! 수우―지!」


민수는 갸우뚱거리며 함께 퇴근한 아내, 안젤라에게 물었다.


「수지가 안 나오네?」

「오늘 교회에서 연습 있다고 했어요. 크리스마스에 바샹할머니(The Stories of Grandmother Basyang: 필리핀 국민 동화) 연극을 올린 데요. 걱정 말고 일단 좀 씻어요.」   

   

민수는 역시 안젤라를 만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와 안젤라가 만든 수지는 자신의 딸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사랑스러웠다.     


바샹할머니는 필리핀의 유명 동화 시리즈로 영문판도 있지만 주로 따갈로그로 되어 있었다. 그에게서 나온 수지가 한국어, 영어, 필리핀어 3개 국어로 조잘대는 걸 보면 그에게는 없는 비상함이 있는 게 분명했다. 한국을 떠나올 때쯤, 또래들이 딸바보가 되는 것을 보고는 한심하다고 생각했는데 수지를 낳고 보니 한심한 것은 그 자신이었다. 딸이 있는 세상은 딸이 없던 세상보다 훨씬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수지는 그날 밤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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