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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노 Art Nomad Nov 21. 2024

#09 바할라 나 9화 _ 재외국민 보호 의무

신의 뜻대로

5.


「아니 그러니까 제가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이거는요, 사건 수리가 안되요오―. 거 댁 근처에 왜 처가 친척들이랑 친구네 집도 많이 있잖아요, 왜애. 일단 집에 가서 기다리시면, 돌아올 거라니까요, 참 내.」

      

수화기 너머의 김영사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민수는 그가 이렇게 뒷말을 끄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민수의 심장이 벌렁거리는 것에 반해 그의 말투가 너무 가벼웠다.      


여섯 살 아이가 이틀이나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교회나 친구 집, 유치원, 자주 가던 식당, 쇼핑몰까지 안 가본 곳이 없었다. 혹시나 같이 봉사활동 나갔던 지역에라도 있을까, 집집마다 안 들어가 본 곳이 없고, 집 근처는 물론 다른 지역의 경찰 지구대에도 신고했다. 다니는 곳마다 오백 페소Peso 씩 찔러 넣었건만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어쩌다 걸려 온 전화는 정보료 흥정을 할 뿐, 막상 수지의 인상착의 하나 맞지 않았다.      


민수는 차오르는 화를 참기가 어려웠다. 영사관 직원에게 잘 보여야 한국의 수사 지원을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촌각을 다투는 때에 별일 아니라는 듯 구는 그를 참아내기 힘들었다. 만약 이게 전화 통화가 아니라면, 민수는 그를 한 대 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왜 안 된다는 겁니까, 대체! 여섯 살 아이가 사라졌는데!」 

「아하… 참… 제가 이런 말까지는 안 드리려고 했는데. 있잖아요, 장 사장님. 혼인신고 하셨어요?」     


민수는 아무 말하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출생신고도 안 하셨죠? 일단 수사 지원요청을 하려면 한국 사람이어야 할 거 아닙니까. 만약에요, 장 사장님이 길 가다 어디 칼을 맞았어요, 근데 요즈음 그런 일이 빈번한 거예요. 그럼 당연히 수사하겠죠, 재외국민 보호 의무라는 게 있으니까. 근데요, 장 사장님이 아무리 내 딸이라고 우겨도 서류가 없으면! 대한민국도 의무가 없는 거예요오―.」      


민수는 왜 혼인신고도 출생신고도 하지 않았던가 되짚어 봤다. 분명한 이유가 있었는데 잘 생각나지 않았다.      

아, 어디에서 무얼 하고 어떻게 사는지 쉬쉬하며 살던 때였구나.      


맞다. 그랬다. 민수는 도망쳐 왔다. 그 사실을 너무 오래도록 잊고 살았다.      


「그래도 선생님, 제발,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제 애만 그런 게 아니에요. 이 근처에 사라진 애들만 여섯, 성인 여자는 벌써 넷입니다. 이거 연쇄 납치잖아요.」 

「장 사장님. 증거 있어요? 실종이든 납치든 증거 있냐고요. 그 근처는요, 원체 떠도는 사람이 많아서 한자리에 오래 붙어사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러게, 제가 그 사람들이랑 그렇게 어울려 다니지 말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봉사를 갔으면, 먹을 거나 좀 주고 오면 그만이지 왜 거길 그렇게 들락거립니까? 아니 그리고 막말로 수지가 여섯 살이라면서요. 그럼, 한국 나이로 일곱 아니에요? 같이 산 지 칠 년밖에 안 됐는데, 수지가 진짜 사장님 딸이 맞긴 맞아요?」 

「뭐라고, 이 새끼야!」

「…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민수는 전화 너머로 상대의 차가움을 느꼈다. 눈에 실핏줄이 터지는 것을 느끼며 가까스로 호흡을 가다듬은 민수는 다시금 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딸애를 찾느라 이틀간 한숨도 못 잤더니 좀 예민했나 봅니다.」     


민수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실소를 들으며 이를 악물었다.      


「거 바쁠수록 돌아가야지, 애먼 데 화풀이하시면 쓰나요. 아무튼, 마음은 안타깝지만 사건 수리는 어려울 겁니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어려울 것이다.      


이 말은 즉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영사관 직원은 다 아는 척했지만 결국 이제까지 그래왔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므로 괜한 귀찮은 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혼인신고도 출생신고도 딱히 하지 않았던 걸 후회하며 접어야 할까, 아니면 마음을 돌리기만 하면 아직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다시 매달려야 할까.      


아주 단순하고 명확한 단 두 개의 경우의 수였다. 누구나 나는 못 봤다고, 나는 아니라고, 그렇게는 못 한다고 할 뿐, 딸을 잃은 민수의 감정을 묻지 않아 단 두 개의 경우의 수만 그 앞에 남았다. 끝없을 후회 혹은 가망 없는 희망.     


민수는 통화가 끊긴 휴대폰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때, 심란해하는 민수의 귓가에 소름 끼치는 비명이 들려왔다. 민수는 와락 짜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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