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쓴 한나 아렌트도 카프카를 읽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카프카가 자신의 소설에서 아이히만과 같은 관료들을 패러디한다고 해서 그의 소설 자체가 관료제를 비판한다는 식의 해석에는 반대한다. 관료제는 카프카의 세계에 존재하는 부조리한 요소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카프카의 글을 읽어보면 누구라도 알겠지만 이 남자가 무언가와 싸우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데, 그것을 꼭 관료제에 국한해서 이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실 「변신」이나 「선고」에서 독자가 읽을 수 있는 것은, 가족들을 향한 한 남자의 지나친 엄살 또는, 글 쓰는 남성의 사회적인 퇴행(19세기에 괴테가 양식화한 성장소설과는 정반대된다는 측면에서)이 아닌가? 그리고 앞서 말한 사이비 평론가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독자가 카프카의 소설을 통해서 부조리한 사회적 이면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 자체가 원래부터 카프카적 세계의 주요 정서에 해당했고, 따라서 카프카는 현실을 소설 속에 재현하기는커녕, 거꾸로 소설을 매개로 현실에 대한 독자의 얼어붙은 인식에 변경을 가했다. 즉 카프카는 현실을 재전유한 것이지 (예컨대 관료제적인) 현실을 비판한 것이 아니다(우리는 어떤 대상을 비판함으로써 그것에 의존한다. 예술 작품에서도 상황은 이와 비슷한데, 어떤 대상에 대한 비판은 작품을 그러한 비판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 감히 단언컨대 카프카가 자신의 작품을 정치적인 의도로 쓴 적은 없다. 그럼에도 가상(예술)과 현실(정치) 사이의 관계는 분명 존재한다고 나는 믿는다. 즉 카프카가 묘사한 현실이 비현실적이라고 해서 카프카의 소설이 현실과 완전히 유리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은 현실적이되, 현실 그 자체에 종속되거나 그것을 재현하는 일에 복무하지는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왜냐하면 작가의 정체성에 해당하는 스타일(문체)이 외부 현실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관점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메타 언어는 없다). 물론, 작품의 정체성은 작품을 쓰는 작가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비밀이나 밝혀야 할 진실 따위가 아니며 작가가 세계와 대면하는 과정에서, 오로지 그러한 과정으로서만 발생하게 되는 불꽃이다. 궁극적으로 이 불꽃을 점화시키는 것은 작가도 아니고 작가가 속한 현실 세계도 아니다. 작가의 순수한 내면은 글로 표현되는 순간 부지불식간에 언어 의미의 맥락 속에서 오염되고 분열된다. 현실은 언어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바, 세계와 현실이라는 단어 자체도 언어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프카의 소설은 현실 세계와 카프카 자신의 내면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근대 철학과 마찬가지로 언어 체계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해서 바로 그 회의 자체를 글쓰기의 동력으로 삼는다. 「변신」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부분이다. 소설 속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인간의 정신과 동물의 육체(벌레)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숨을 거둔다. 마치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서」 말미에서 원숭이 '빨간 페터'가 인간으로 진화했음에도 여전히 자신의 동물성을 부분적으로나마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정신과 육체, 인간성과 동물성, 더 나아가 가상과 현실 사이의 대립은 카프카의 소설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모티프이다. 소크라테스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의미부여 층위(천상의 올림포스)와 의미수용 층위(지상의 폴리스)를, 보편과 특수의 관계로 환원한 것처럼, 소쉬르의 기표와 기의의 자의성이라는 개념은 왜 모든 주체가 자기 분열적일 수밖에 없는지를 개괄적으로나마 설명한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운명과의 불화로 인해 죽어간 영웅(특수)들의 시신에서 회복되는 공동체성(보편), 또는 오로지 희생양의 위치에서만 회복될 수 있는 비극적 개인의 자유(생의 의미)가, 이천여 년이라는 시간대를 넘어 프란츠 카프카에게도 반복된다. 카프카의 등장인물들에게 닥칠 비극적인 결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소설이 시작할 때부터 일종의 정체성처럼 고정되어 있고( 「변신」,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서」) 때로는 법과 제도적인 틀( 「선고」, 「법 앞에서」)로 대체되기도 한다. 하지만 카프카적 비극이 그리스 비극과 다른 점은, 정체성과 법 또는 운명 자체에 내재한 자기 모순이 부조리한 형식 속에서 점차 드러나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라캉의 말을 빌려서 이를 '대타자 또한 비어 있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레고르 잠자와 시골사람(「법 앞에서」)은 위대한 영웅이 아닌 한낱 소시민으로서, 더 나아가 시민 사회로부터 소외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영웅의 희생 제의를 통한 공동체성의 회복은 더 이상 불가능하며, 비극을 통한 생의 의미 또한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의미의 죽음이 곧 언어의 죽음은 아닌바, 의미가 부재하는 텅 빈 기표는 법의 대문자 내부의 공백=결여를 되비춘다. 이것이 바로 카프카의 미러링 전략이다. 카프카는 관료제를 비판하지 않았다. 카프카는 법을 부정하지 않았다. 카프카는 세계를 부정하지 않았다. 카프카의 소설 자체가 하나의 세계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