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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람 Aug 26. 2022

영화리뷰

놉은 소재주의 영화이지만 그 다양한 소재들의 상반되는 면을 동시에 다루는 감독 조던 필의 특유의 영리함을 보여줍니다.


인종주의, 서부극, 관음증, 자본주의 등 오늘날 유행하는 담론들의 양극단을 서로 대면시킨 뒤, 어느 한 쪽의 편에도 서지 않습니다.


조던 필은 개별 씬이나 시퀀스들을 하나의 의미로 환원시키는 데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보입니다. 스크린 속 짐승처럼 날뛰는 이미지들을 고정된 의미로 환원시키는 데 익숙해진 관객의 입장에서는, 놉은 다소 곤혹스러운 영화에 해당하겠지요.


아시다시피 모든 의미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 '나'의 주관적 해석 절차에 의해 (소급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개별 데이터 또는 수치들의 객관성은 그것들을 해석하는 주체의 해석학적 틀과 역량에 의존적이며, 따라서 특정한 관점(결국 주관성)에 의해서만 일관된 의미를 획득합니다.


그렇다면 놉은 어떤 의미에서는 소크라테스적인 영화일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앎의 이중성을 폭로한 철학자인데, 이 그리스 철학자에게 인간의 앎은 두 가지 차원을 지닙니다. 첫 번째는 '내용'에 대한 앎이며 두 번째는 그러한 내용을 둘러싼 '맥락'에 관한 앎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한 것은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는 뜻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변증술의 대가이며, 변증술이란 화자의 주장들을 구성하는 전제 자체(맥락 자체를) 연속해서 되물음으로써 그 주장에 내재한 맹아적 모순, 즉 개별 내용과 전체 맥락 사이의 간극을 폭로하는 수사법입니다.


'의미'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영화 놉도 이와 마찬가지로 영화 속에서 다루고 있는 소재들을 구성하는 전제나 맥락을 관객 스스로 되물어보고 의심할 것을 요청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변적 요청은, 감독이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단순한 지시나 명령이 아닌, 감각적인 방식 즉 씬과 시퀀스를 배치하고 그렇게 배치된 이미지들의 파편성과 네러티브의 일관성을 충돌시키는 방식, 즉 이미지와 서사의 모순관계를 일변도 있게 반복하는 태도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놉은 (어떤 면에서는) 매우 진지한 영화입니다. 니체는 대표작 비극의 탄생에서 그리스 비극을 끝장낸 장본인으로 소크라테스와 그의 사변적 시선이 내면화된 에우리피데스의 희극을 지목하는데요.


마찬가지로 이 영화도 다소 실망스러운 결말부만 떼어 놓고 본다면 니체가 말하는 '비극'보다는 사변적 희극에 가깝기 때문에, 무의미를 긍정하는 듯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소재주의라는 태생적 한계에 갇힐 수 밖에 없는 영화입니다.


물론 그것은 놉이 (다루고 있는) 소재들에 국한되는 영화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놉이 소재들을 다루는 방식만 놓고 본다면 너무나도 사변적이기에 일종의 소크라테스적인 영토, 영화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등장인물들로부터 일정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관망할 수 있는 사변적 위치를 끊임없이 소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것을 포스트모던한 태도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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