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tics of misunderstanding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편의점에서 낯선 외국인 손님에게 칭찬을 받은 아르바이트생 이야기가 올라오며 이슈가 되었었다. 낯선 외국인 손님이 "놈흐옙흐네요(너무 예쁘네요)"라며 고백을 한 것인데 그 온전치 못했던 발음은 사실 농협은행이 어딨는지 물어보는 말이었다. 그녀가 끝까지 외국인의 말을 알아채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하루 종일 외국인에게 받은 칭찬에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학창 시절, 학교에서 교과서에 실려있는 작가의 소설이나 수필을 읽을 때, 누군가가 정해놓은 작가의 의도를 외우고, 글을 읽는 방법과 패턴까지 배운다.
우리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왔고, 무조건적으로,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학습을 해왔으며, 그 결과 교과서에 실려있는 작품에 대한 일률적인 대답을 알고 있고, 모든 소설과 시에는 답이 있다는 선입관까지 생겼다.
작품을 받아들이는 이런 태도는 학창 시절 이후 다른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데까지 이어온다.
미술관에서 작품을 관람할 때 큐레이터라고 하는 해설자를 따라다니며 작품에 대한 해설을 듣고, 때로는 그 해설자의 주관적인 의견을 들으며, 관람 후에는 그것이 자신의 주관인 것 마냥 받아들이고 그 한계 안에서만 해석을 한다.
과연 이러한 방법들이 무언가를 읽고, 바라보는데 맞는 방법과 시선일까? 말이나 글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에 정해진 방법이 있는 것일까?
모든 독서는 오독이라는 말이 있다. (Culler, 1998) 이때 오독(misreading)은 문장 자체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오류적 오독'이 아닌, '의도적 오독'이고, '창조적 오독'을 뜻하는 것이다.
읽기는 단순히 읽는 행위가 아니라 이해와 해석을 하는 활동이기 때문에 독자가 작품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굴절됨을 피할 수 없다. 오독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작가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으면서도 작가의 의도와 작품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작품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독자의 상상력에 의해 채워 가야 할 대상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작품은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오독하는 행위를 더 반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나는 미술관에서 큐레이터를 따라다니며 관람하는것도 좋지만, 내가 선호하는 작품 관람 방식은, 처음 몇 분 동안 작품만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작가의 의도를 마음대로 생각한 후에 작품 해설을 읽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작품 해설을 보지 않는것이다. 나는 이렇듯 자연스러운 오독의 과정을 의식하고 즐긴다.
의도된 왜곡과 자기합리화를 위한 오독이 아니라면, 그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더 다양한 생각을 하게 하고, 넓은 세상을 보게 해주는 하나의 수단이 될 것이다.
글을 읽을 때 행간을 읽거나, 글자가 아닌 문장부호에 주목하거나, 뒤에서부터 읽는 등 여러 가지의 다른 방법으로 읽어 보시라. 저자 스스로도 모르는 보물이 숨어 있을 수 있고, 여태까지 읽어왔던 우리의 책이 다른 표정의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
참고자료
[삶의 향기]엘리자벳 김 l 오독(誤讀)의 즐거움
http://www.koreatimes.com/article/20120909/750470
<오독(誤讀)의 유익> 이진경 기자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5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