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정말 끝인 건가?
첫 이별이었다. 17살의 소녀는(사실 17살이 아닐지도 모른다.) 저런 말을 되뇌며 멍하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나는 스스로를 ‘소녀’라고 칭하는 일에 어색해하는 편이지만 남자 친구와의 이별에 세상이 무너진 줄 아는 17세에겐 소녀라는 단어가 잘 어울린다. 그때의 격정을 설명해보자면, 이별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하더니 낯선 감정이 소나기처럼 한꺼번에 쏟아졌다. 그 소나기는 나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빗방울 하나 튀기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나이의 나는 대부분의 사실이 부끄러웠고 그래서 다른 누구에게도 이 감정을 공유하기 싫었기 때문에 그 소나기가 내게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렇게 낯섦과 안도가 뒤섞인 감정을 한차례 맞고 있자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가슴이 아파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누군가 가슴께를 있는 힘껏 누르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나는 이별이라는 상황이 이토록 물리적으로 실현된다는 사실에 경악스러웠다. 정말로, 말 그대로, ‘가슴이 아프다’니.
시간이 흐르고 혼란이 조금씩 가시면서는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고, 그 후로 지금까지도 내 안에 남아있는 것은 첫 이별의 애처로움이 아닌 감정이 물리적으로 실현되었던 그 통증의 존재였다. 흔히들 슬플 때 말하는 “가슴이 아프다”는 말이 과장이나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어떤 표현은 경험하기 전까진 진정한 뜻을 알지 못한 채 뱉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뜻했다. 이 사실들을 알게 된 것은 이후 내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경험해야 비로소 알게 되는 단어들, 표현들, 문장들, 그리고 아픔의 존재가 있다는 것. 나는 살아간다는 것은 진정으로 알게 되는 표현들이 늘어간다는 것,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몰랐던 아픔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후로는 아픔에 대해 말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내가 모르는 미지의 아픔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넘어진 아이에겐 제 무릎의 상처가 세상에서 가장 아픈 것처럼, 혹시 나의 아픔도 남들이 보기엔 티끌만큼의 상처뿐인 건 아닐지 걱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내가 가장 아프다는 확신을 가져야만 살아지던 때도 있었다. 다른 누구보다 내가 가장, 내 나이의 다른 청춘보다 내가 가장 아프다는 확신. 그런 확신이 나를 버티게 해 주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악의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눈이 부시도록 화목한 환경의 지인에게 나 역시 악의를 갖지 않기 위해서. 이 정도로 간당간당하게 살아내는 것이 내가 타인보다 아픈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위안하기 위해서. 이 정도면 잘 해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문이라도 뱉어보기 위해서.
그러한 방법은 대부분의 경우 효과가 좋았다. 가장 큰 효과를 보았던 것은 역시 가장 큰 좌절감을 맛보았던 때였다. 1년의 휴학 후 내가 모은 돈은 목표로 했던 유럽 여행을 떠나기에 적당한 액수였다. 좁은 고시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은 돈이었다. 그리 들뜨진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잃고 나자 스스로 그 돈에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했었는지 알게 되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일에는 생각보다 어마어마하게 큰 자금이 필요하다. 특히 버섯 농사는 더 그랬다. 그 자금을 고스란히 은행에서 대출했던 부모님은 분기별로 큰 이자를 감당해야 했다. 그런데 딸내미 대학 생활비도 대줄 수 없었던 그들이 이자 낼 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냥 그런 까닭이었다. 나는 엄마의 전화에 한참을 고민하다 돈을 입금했고, 그러고 난 뒤엔 속절없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의 나는 다른 누구보다 가장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1년 휴학 후 쌓은 것 하나 없이, 남은 것 하나 없이 학교로 돌아가도 용서해주어야 한다고.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소중한 젊음을 1년이나 낭비했다는 압박 속에서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그런 식의 자기 방어가 쌓이고 쌓여 나는 또다시 아픔에 무지해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겪은 고통이 세상의 다라고 생각하거나, 남들이 아파봤자 얼마나 아프겠냐는 오만에 빠졌던 것도 같다. 그러고자 의도했던 적은 없지만 사람이란 때론 어느 정도의 착각 덕분에 살아가기도 하니까. 머릿속으로는 ‘내가 겪어보지 않은 아픔에 대해 함부로 재단하지 말자’고 생각하면서도 ‘그래 봤자’ 하는 착각으로 당당하게도 살아냈다. 가끔씩 상상해보긴 했다. 4기 암 선고를 받은 엄마를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신체적인 통증일까, 생에 대해 고민해야만 하는 정신적인 고통일까. 전자는 아닐 것 같았다. 육안으로도 확인될 만큼 커다란 암덩어리를 가슴에 키우고 있었던 엄마에게 견디지 못할 만큼의 통증이 있었다면, 그 지경까지 암이 커지도록 병원에 가지 않는 일은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후자 밖에 남지 않지만, 그것도 답이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 남은 답은 그것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고통만은 내 상상보다 크지 않길, 엄마가 견딜 수 있는 만큼만 아프길, 의미 없는 바람만 되뇌었다. 그 이상을 짐작하는 일은 너무나도 두려운 것이었다. 엄마가 삶의 마지막을 상상한다거나 혹여나 지난 삶에 회의를 느낀다거나 하는 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렇게 건방지고도 나약한 지레짐작 때문이었을까. 나는 엄마가 응급실에 실려 가던 날 어린아이처럼 악몽을 꿨다. 엄마의 몸 상태에 이상이 생겼다는 조짐은 사실 조금씩 있었다. 소변을 눌 때 방광 쪽에서 강한 통증이 느껴지고, 소변에 혈액이 섞여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듣고도 나와 언니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 힘들다는 항암을 응급실행 한번 없이 무사히 견뎌냈고, 항암에 앞서 면역력 검사를 할 때마다 일반인보다 뛰어난 면역 수치를 자랑했던 엄마였기 때문이다. 그저 수술 뒤 면역력이 조금 떨어져서 방광에 염증이 생겼겠거니 하고 넘겼다. 게다가 방광염은 여성에겐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질병이고, 나 역시 매우 피곤했던 때 경험했던 적이 있기 때문에 더 그랬다. 나는 화장실을 다녀올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불안해하는 엄마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엄마, 병원에서도 표적 치료 부작용이라고 했다며? 나도 방광염 걸려본 적 있어서 아는데, 그거 항생제 먹으면 금방 낫는다.”
말하자면, 일종의 ‘내가 겪어본 고통’인 데다가 ‘별 것 아니었던 고통’으로 기억되어 있기 때문에 저런 말을 꽤 자신 있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비뇨기과에서 항생제 주사를 맞고 온 뒤 유난히 힘이 없다고 하더니 자리에 누웠고, 그때까지도 대수롭지 않게 TV를 보고 있던 나를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주연아, 따신 물 좀 떠온나, 빨리!”
나도, 언니도 그토록 덜덜 떠는 사람을 실제로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를 침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침착하게 뜨거운 물을 떠갔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처럼 떨리는 몸을 주체 못 하고 컵조차 받아 들지 못하는 엄마를 보자 점점 이성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119에 전화를 걸고 구급대원이 도착할 때까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거실과 방을 왔다 갔다 했다. 구급대원이 도착해 체크한 엄마의 체온은 41도를 넘어가고 있었다. 코로나 19로 인해 열이 나는 환자를 받아주는 응급실은 찾기 어려웠고, 구급대원이 제발 좀 받아주십사 여러 병원에 전화를 돌리는 와중에 엄마는 기어이 가슴 무너지는 말을 해댔다.
“내 이제 괜찮은 거 같은데. 괜히 내 때문에...”
나 때문에. 이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엄마가 암환자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건방지게도 별 것 아닌 염증이라는 말을 해댔던 스스로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코로나 19 검사를 받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대기해도 괜찮겠으면 오라는 어느 병원과 겨우 연결이 되어, 엄마와 언니는 응급차를 탔다. 나는 동반 가능한 보호자 1인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혹은 배려로, 집에 남겨져서 구급대원이 뱉었던 ‘패혈증’을 검색했다. 건강한 사람에겐 아무것도 아닌 염증이라는 게 면역력이 약해진 사람에게, 특히 암환자에겐 죽음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읽고 또 읽으며 등을 타고 올라오는 소름을 눌러 앉히려 애썼다. 그리고 그날 밤 엄마와 언니가 코로나 19 검사자들이 대기하는 병실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겨우 눈을 붙이며 악몽을 꿨다. 내용도 기억 안 나면서 두려움만 잔뜩 안기는 기분 나쁜 악몽이었지만, 나의 오만함이 가져온 결과에 비하면 가벼운 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려워졌다.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앞으로 살아가면서 ‘아픔’의 정의가 끊이지 않고 갱신될 것이라는 사실이. 내가 겪은 것들은 아마도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의 총량이 있다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에 대한 직면이. 한편으론 그것에 대해 알아갈수록 또 오만해질지도 모를 나 자신이. 아픔을 경험한다는 것의 마지막이 그것으로 인한 성장에 있다면 나는 지금까지의 어떠한 아픔도 소화해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견뎌내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화해내야 하는 지점이 온 것이 아닐까. 부디 아직 늦지 않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