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첫 책을 내고 난 뒤의 소회를 가감없이 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내고 나서 한동안 다시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만 지닌 채로 지냈다. 누군가 여전히 글을 쓰고 있냐고 물으면 “써야죠.”하고 웃기만 했다. 어떤 글을 써야할지 잘 모르겠기도 했고 선뜻 글을 쓰기 두렵기도 했다. 실제로 ‘글을 써야지.’ 마음먹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가 두 시간 동안 단 하나의 문장도 쓰지 못하고 다시 노트북을 덮은 일도 있었다. 써야할 사건과 감정이 명확했는데도 그랬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명백한 이유가 있었다. 내 이야기를 쓴다는 것과 내가 쓴 글이 내 삶이든 타인의 삶이든, 그 자체로 생명을 얻어 여기저기 영향을 미치고 다니는 것이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하루는 어떤 독자가 SNS를 통해 긴 메시지를 보냈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나의 상황이 비슷해 책을 읽고 많은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그러곤 어떻게 하면 작가님처럼 버텨낼 수 있냐며 조언을 구했다. 그(혹은 그녀)의 감정은 나도 비슷한 것을 겪은 적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가볍게 느낄 순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사연을 듣고 마음이 너무나도 아팠지만 뭐라 답을 하기 망설여졌다. 결국 나는 진부하기 그지없는 응원의 말들을 길게만 늘어뜨려 답장을 보냈다. 나는 나의 삶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줄 알지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선 어떤 말 한마디 보탤 능력이 못되었기 때문이다. 답장의 말미에 언제까지고 기억하고 응원하겠노라고 덧붙인 게 최선의 정성이었다. 나는 그 말을 지킬 것이다. 오랫동안, 어쩌면 평생동안 그 메시지를 잊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쓴 글이 미칠 수 있는 영향과 나라는 존재 사이에서 어마어마한 괴리와 무력감을 느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책에 대해 평가하는 방식의 두 번째로 낮은 점수를 내 책에 매겼다. 내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은 필연적이었다. 나는 늘 나와 전혀 관련이 없는 제3자의 감상이 궁금했고 의식적으로 찾아보곤 했다. 그 독자가 내 글을 불호한 것은 글이 어둡고, 마음을 찝찝하게 하고, 엄마와 딸의 관계가 애달파야만 한다는 전형적인 서사를 따랐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런 감상엔 억울한 점이 있었다. 그 애달프다는 전형적인 서사는 내가 의도하고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내가 살아온 이야기인데,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이므로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마음이었다. 내가 전달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그런 어둡고 찝찝하고 애달픈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말도 덧붙이고 싶지만 글이 이미 내 손을 떠났으므로 소용없는 일임을 잘 알고 있다.
이런 일들이 쌓여간다. 책을 낸다는 것은 브런치에 글을 올려 작가에게 직접 전달된다는 것을 너도 알고 나도 아는 피드백을 받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전혀 모르는 이가 나의 삶에 대해 낱낱이 알게 되고 나에 대해 이미 알던 이도 더 자세히 알게 되며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해석할 것이었다. 그 해석은 당연히도 내게 전해지는 것보다 전해지지 않는 것들이 더 많다. 그 사실들이 얼마나 두려운지, 에세이를 쓰고 책을 낸 것 자체를 진심으로 후회하기도 했다. 무게를 모르고 덤빈 스스로가 솔직히 좀 바보같기도 했다. 그래, 이럴 걸 모르고 그렇게나 솔직한 글을 썼단 말이야? 라고 묻는다면 믿기지 않겠지만 그렇다. 나는 솔직하지 않은 글을 쓰는 방법을 모르기도 했고 나의 삶은 내게 있어선 너무나도 명확한 것이기에 이토록 다양한 방식으로 소비되고 해석될 줄 몰랐던 것이다. 나는 늘 닥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면이 있다. 미리 여러 가능성에 대해 깊게 고민하지 않는다. 이렇게나 중대한 결정에 대해선 그래선 안됐는데, 너무 밝은 면만을 바라봤다.
그렇다고 해서 여전히 책을 낸 사실을 후회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모든 두려움과 비등하게 성취감이 컸다. 위로받고 감동받았다고 말하는 독자들이 훨씬 더 많다. 계속해서 글을 써달라는 감사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 글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표현하는 것에서 숨통을 트는 사람이다. 눈을 빛내는 청소년들 앞에서 나의 책에서 출발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겪은 적 없는 기쁨을 느끼는 경험도 했다. 그렇기에 글을 써야겠다. 쓸 것인데, 앞으로 계속해서 에세이를 쓸 용기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솔직하지 않은 글은 쓸 줄을 모른다.’는 이유가 내가 에세이를 계속 쓸 이유, 혹은 그만 쓸 이유 모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다.